111화.
“누가 엿들었나 보군.”
테르제의 근육이 위협적으로 부풀었다. 언제 봐도 적응되지 않는 근육에 어색하게 웃던 리아는 아래서 보이는 금발에 눈을 깜박였다.
“귀한 분이 여기서 뭐 하세요.”
리아의 물음에 수풀 속에서 커다란 인영이 솟아올랐다.
“엿들은 생각은 아니었는데 너무 잘 들리더군.”
머리에 붙은 작은 이파리를 떼어내며 등장한 그는, 황태자였다.
* * *
따스한 햇볕, 지저귀는 새소리, 솔솔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정자에 앉아 마주 본 테르제와 카시스.
완벽하고 숨 막히는 이곳에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할아버님, 역시 저는 들어가 보는 게…….”
“혼자 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딱 붙어있거라.”
팔을 잡아끄는 힘에 나는 반쯤 들었던 엉덩이를 다시 눌러 앉히는 수밖에 없었다.
얼떨결에 두 사람의 대화에 끼게 된 나는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만 굴렸다.
“테르제 공, 이르지만 선물을 준비해 봤네.”
생일은 내일이지만, 미리 주려는 것인지 수행원이 상자 하나를 테르제의 앞에 내밀었다.
세심하게 세공된 금색 상자는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바쁘실 텐데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하셨답니까.”
“중요한 날인데 없는 시간이라도 쪼개서 준비해야 하지 않겠나.”
어서 열어보라는 말에 테르제가 뚜껑에 손을 올렸다.
달칵,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이건…….”
“지지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이오.”
말을 잇지 못하는 테르제를 향해 카시스가 뿌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도대체 뭐길래 저렇게 놀라는 거지?’
슬쩍 고개를 내민 나는 상자 안을 곁눈질했다.
‘단검……?’
검 전체를 금색으로 휘감은 테두리와 붉은색으로 칠해진 검집, 손잡이에 박힌 붉은 보석이 차례대로 눈에 띄었다.
잘 관리하긴 했으나, 세월의 흐름을 비껴가진 못했는지,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었다.
‘빛이 나네?’
단검 주변으로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에 나는 눈가를 좁혔다.
단검에서 나는 빛인지, 아니면 햇빛에 반사돼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희미한 빛이었다.
“궁금한가 보군.”
물끄러미 단검을 바라보는 내가 신경 쓰였는지 카시스가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이건 시나이즈의 가보나 다름없는 것이다.”
“시나이즈의 가보요? 그게 왜 황실에…….”
하지만 도움이 되기는커녕, 나를 더 미로 속으로 빠트리는 설명이었다.
머리 위로 물음표를 마구 띄우자 카시스가 곤란하다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설명하자면 긴데……. 리아 양은 이미 시나이즈의 사람인 것 같으니 알아도 되겠지.”
당연히 그럴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말에 테르제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곧 시나이즈의 안주인이 될 텐데 알아둬야겠지.”
큰 어르신의 허락이 떨어지자, 카시스가 옛날이야기를 하듯, 운을 떼었다.
“리아 양도 제국민인 만큼, 건국 신화를 잘 알겠지.”
알다마다. 건국왕, 리산드로의 건국 신화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어린아이는 물론이요, 가방끈이 짧은 사람도, 나처럼 빙의한 사람도 모두 아는 전설이었다.
“저 단검은 건국왕, 리산드로의 물건이다.”
“……네?”
당황으로 떨리는 내 눈앞에 테르제가 단검을 내밀었다. 어서 보라는 듯이.
나는 빛나는 단검을 보며 침을 삼켰다.
공작성에 널리고 널린 단검처럼 보이던 물건에서 갑자기 위용이 느껴졌다.
“이. 이게 왜……?”
“원래 공작가의 물건이었거든.”
“네에?”
도무지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건국왕, 리산드로의 물건이 왜 시나이즈의 것이란 말인가.
리산드로가 시나이즈의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설마, 제가 생각하는 게 맞아요?”
“리아 양. 시나이즈가 살아있는 역사인 이유가 뭐겠나.”
제국은 천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다. 긴 역사인 만큼, 중간에 몇 번이나 이름이 바뀌고, 황위가 바뀌었다.
가문이 사라지고, 생겨나고, 권력이 뒤바뀔 동안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은 곳은 오직 시나이즈 공작가뿐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강하니까.
‘그런데 초대 황실 가문이었다니!’
강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정확히는 리산드로 황제의 분파 중 하나가 시나이즈의 가문이란다.”
내가 정신을 못 차리자 테르제가 직계는 아니라며 내 등을 토닥였지만 내 귀엔 그게 그거였다.
‘아니 애초에 직계가 존재할 수가 없잖아.’
리산드로 황제는 수많은 업적을 이루었으나, 병을 얻어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어떤 병인지는 모른다. 기록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때 입은 상처를 치료하지 못해 몸이 썩어서 죽었다는 말도 있고, 정적에게 처치당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뿐이랴, 운명이었던 소중한 연인을 잃고 상사병에 걸려 죽었다는 야화도 있을 정도로 그의 죽음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누구와도 혼인을 올리지 않았으므로 자식 또한 없었다.
“시나이즈가 황위에 관심이 없는 게 정말 다행이지 않은가.”
시나이즈 가문과 척졌다면 몹시 곤란했을 거라며 카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알고 있네. 공은 물론이고 공작도 그다지 권력욕이 없는 사람이지 않은가. 그래서 이걸 주는 거라네. 선물도 선물이지만, 친선의 의미거든.”
나는 훈훈한 장면에도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테르제가 가문의 보물을 찾은 건 다행이었으나, 과연 황제가 가만히 두고 볼까?
‘시작이 시나이즈라고 한들, 지금은 황실의 소유인데?’
카시스는 무슨 힘으로 이걸 공작가에 돌려준 거지?
혹시라도 이걸 빌미로 공작가를 건드릴 생각은…….
“내가 시나이즈의 등을 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나 보군.”
단검을 바라보던 나는 불시에 끼어든 목소리에 어깨를 떨었다.
나와 눈을 맞춘 카시스가 피식 웃었다.
“걱정할 것 없어. 이건 내 생일을 맞이하여 폐하께 직접 하사받은 선물이거든. 이제 내 것이니 어떻게 쓰든 내 마음 아니겠나.”
더 좋은 걸 가질 수 있음에도, 테르제를 위해 이 단검을 받아왔다.
이 한마디는 테르제의 심금을 울리기엔 충분했다.
“황태자께서 이 늙은이의 생일을 이리 축하해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나야말로 고맙네.”
카시스는 황태자였지만, 외가의 힘이 약해 지반이 단단하지 않았다.
원작에선 아이나와 대신전의 전폭적인 지지와 악이었던 딜리언을 처단하면서 완전히 입지를 다지게 된다.
하지만 어둠의 등장으로 바빠진 아이나는 카시스에게 신경 쓰지 못했고, 그 탓에 신전의 지지가 사라지고 말았다.
하나, 이건 그에게 기회였다.
렉스터와 마누스가 나를 노리고 있으니, 딜리언은 거슬리는 둘을 치우기 위해서라도 카시스의 손을 들어주었으니까.
‘이걸 예상한 건 아니었을 거고, 처음부터 테르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생각이었네.’
내가 알기로 그의 생일은 1월 무렵이다. 그럼 그때부터 이걸 넘겨받고 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게 아닌가.
‘생각보다 더 영악하고 치밀하잖아?’
하긴 이러니 황제가 되었겠지.
유들유들하기만 하던 그가 처음으로 권모술수에 능해 보였다.
“리아 양. 이 단검에서 뭔가 특별한 게 느껴지진 않나?”
“글쎄요. 굳이 뽑자면 단검 주위로 빛이 아른거리는 게 다예요.”
하지만 이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무생물이더라도 간혹, 특별한 힘을 품은 물건이 나타나기도 하니까.
강한 염원을 품거나, 기도를 올리거나, 혹은 신성한 곳에 오래 머물수록 특별한 힘을 갖게 된다.
이 단검은 무려 천 년 전, 그것도 황실 깊숙한 곳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보관되어 있었을 테니 충분히 특별한 힘을 품고도 남았다.
‘다만, 그 힘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거지.’
이런 물건은 신전에 들어가면 널리고 널렸다며 고개를 젓자, 카시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리아 양이라면 알아봤을 줄 알았는데.”
“특별한 힘이라도 있나요?”
“이 검, 성검이야.”
그의 말에 화답하듯, 검에서 은은한 빛이 맴돌았다.
“이게요……?”
내가 아는 성검이랑은 다른데?
지금껏 내가 듣고 보고 전해 들은 성검은 어마어마한 신성력을 갖고 있어, 곁에 서면 위압감에 짓눌릴 정도라고 묘사되곤 했다.
이런 하찮은 단검이 아니라.
“역시 알아보기 힘든가 보네. 하긴 대신관도 긴가민가하더군. 아무래도 천 년 전 물건이라 그런가.”
카시스의 말대로다. 그가 성검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절대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희미한 빛이었다.
“선조로부터 전해져오는 말에 의하면 초대 황제의 피를 이은 사람만이 저 검을 가질 수 있다더군.”
“성검이 주인을 택해야 하는 거군요.”
“그래. 선택받지 못한 자가 검을 쥐어봤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그저 작고 낡은 검에 불과하거든.”
자신 또한 선택받지 못한 자라며 카시스가 아쉬운 눈으로 성검을 바라보았다.
‘이게 성검이란 말이지?’
신화에서만 보던 성검을 직접 보자 감회가 남달랐다.
“할아버님. 만져봐도 돼요?”
“물론이다.”
편히 만지라며 성검을 내미는 그에게 인사한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검집에 손이 닿은 순간, 전기가 통하듯 손끝이 찌릿거렸다.
순식간에 눈앞이 빙글 돌고, 귀에 물이 찬 듯, 주변의 소리가 웅웅거리며 서서히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