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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108)화 (108/143)

108화.

테르제가 딜리언의 등을 떠밀었다.

그가 직접 침실로 찾아와 당부할 만큼 오늘 일은 중요했다.

바로, 황태자를 마중 가야 했으니까.

평소의 딜리언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귀찮은 일이지만, 먼저 황태자를 불러들이라 말했던 만큼 책임을 져야 했다.

동시에, 시나이즈가 황태자를 지지하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리아 씨,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그리하여 딜리언이 떠난 현재, 나는 테르제와 마주 앉아 꽃꽂이하는 중이었다.

장미의 가시를 잘라내던 나는 얼굴을 찌르는 시선에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할아버님,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큼, 그런 거 없다.”

없긴, 내 얼굴에 구멍 날 것 같은데. 조용히 내 옆에 앉아 있던 나단도 부담스러운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아닌 척 고개를 돌려도 자꾸만 내 얼굴을 흘긋거렸다.

‘저게 무슨 조합이야.’

탄탄한 이두박근을 가진 팔로 여리디여린 꽃을 들고 내 눈치를 보는 할아버지라니.

환장의 조합에 말문을 잃은 것도 잠시, 나는 먼저 판을 깔았다.

“편히 물어보세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이야기를 꺼냈다.

“3황자와는 무슨 사이인 거냐.”

하, 내 이럴 줄 알았어. 한 치의 예상도 빗나가지 않는 질문이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분이 3황자님인 것도 처음 알았단 말이에요. 정말이에요.”

“그런데 왜 그런…….”

애타는 눈으로 운명이라는 말을 하냐고?

‘그러게 말이야. 난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역시 대화를 한번 나눠봐야 할 것 같단 말이지.’

무조건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입장을 정리하고, 과거의 연을 완전히 끊어내야만 했다.

물론 딜리언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괜히 혼자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곤란했다.

“안 된다.”

“네?”

상념에서 깨어나자, 단호한 표정을 한 테르제가 장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똑, 하고 반으로 꺾인 장미가 간신히 줄기에 매달려 대롱거렸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장미가 테르제의 인내심처럼 보였다.

“딜리언이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홀라당 3황자에게 가면 안 된다. 알겠느냐?”

“네?”

“권력, 재력, 그리고 외모까지 딜리언의 압승이다. 그런 애송이는 상대가 안 되는 건 너도 알겠지?”

잠깐, 지금 테르제가 날 회유하는 거지? 딜리언이랑 헤어지지 말라고.

헤어지라고 할 때가 엊그제였는데, 이렇게 바뀌다니.

그에게 인정받은 것 같아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하지만 여기서 웃는 걸 들키면 크게 혼이 날 게 뻔하니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숨기기 위한 그 행동을 다르게 해석한 테르제가 다급히 물었다.

“설마, 가려는 게냐?”

얼굴엔 초조한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허락 못 한다! 손주 놈 마음을 훔쳐놓고 어딜 간다는 거냐!”

“제가 가긴 어디를 가요. 할아버님께도 드디어 인정받았는데.”

“그래! 내가 인정했는데 가긴 어딜……!”

콧김을 뿜으며 외치던 테르제가 아차 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히죽거리는 내 표정을 보고 뒤늦게 자신이 저지른 짓이 생각난 모양이다.

“……아직 인정 안 했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해봤자다.

“제가 곰을 잡았는데도 인정을 못 받은 거예요?”

“큼.”

“결혼 허락까지 해준다고 약속을 하셨으면서?”

사나이가 한 입으로 두말하면 쓰나. 그것도 시나이즈의 가장 큰 어르신이 말이다.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내 말에 테르제가 끄응, 하며 눈을 피했다.

* * *

연신 헛기침하며 현실을 외면한 테르제가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그런데 딜리언과는 어떻게 만난 거냐.”

“다친 딜리언 씨를 제가 치료해드리면서 인연이 닿았어요.”

리아는 당시 숲에 쓰러진 딜리언을 구한 일을 그에게 전했다. 물론 머리를 깼다는 말은 빼고.

“폭설 때문에 갇히는 바람에 한 달을 함께 머물렀고요.”

“그놈이, 얌전히 있을 녀석이 아닌데…….”

빌헬름의 살인적인 폭설은 테르제도 잘 알고 있다. 딜리언이 빌헬름에 간 그 시기가 눈이 가장 많이 내리는 시기였으니까.

다만, 그가 의심하는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한 달을 같이 머물러? 한 집에서?’

딜리언이 누군가와 살을 부대끼며 살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거기다 리아를 상처 하나 없이 살려둔 것도 의문이었다.

한 달 사이에 호감이 생겨서, 사랑하게 돼서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테르제는 제 손자를 잘 알았다.

딜리언이라면 호감이 생기기도 전에 상대를 제거해버렸을 테니까.

목숨을 구해줘서 고마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단 상대를 적으로 의심하고 죽일 확률이 더 높았다.

‘죽이지 않았다 해도, 고문 정도는 해봤을 텐데……. 고문을 당했다면 이 아이가 딜리언의 곁에 있지 않겠지.’

풀리지 않는 의문에 테르제의 의심이 눈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딜리언 그놈이 얌전히 네 말을 듣더냐? 화를 내지는 않고?”

“화는요. 엄청 잘해주셨어요. 밥도 직접 하셨는걸요.”

“그 녀석이……?”

“네. 설거지나 청소는 정말 못하는데, 밥은 잘해요.”

밥을 했다는 것만 들어도 뒤로 넘어갈 것 같은데 설거지까지 했다고?

그건 딜리언이 아니다. 딜리언의 탈을 뒤집어쓴 마물이지.

‘기억을 잃었다더니 정말이었나?’

헛소문이라 여겼는데, 어쩌면 렉스터의 말이 맞지 않을까?

“얌전히 있을 녀석이 아닌데, 그간 샤텐은 부르지 않더냐.”

“그게, 집에 갇히는 바람에 연락 수단이 없었어요.”

리아는 허를 찌르는 까다로운 질문도 무난하게 잘 피해 넘겼다.

하지만 테르제의 의심은 여전했다. 커지면 커졌지, 절대 줄어들지 않았다.

‘연락 수단이 없어서 못 했다? 그건 말이 안 되지. 그 녀석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연락할 녀석이야.’

순수한 궁금증으로 시작된 질문은 점점 심문처럼 변해갔다.

“고백은 누가 먼저 했지?”

“딜리언 씨요. 수도에 있는 공작저로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어 주셨어요.”

테르제의 압박 심문에도 덤덤히 대답한 리아는 함께 가자며 저를 꼬시던 딜리언을 떠올렸다.

‘그런 적이 있었지.’

두 달 전인데 엄청 오래된 일처럼 느껴졌다.

‘그땐 딜리언과 이런 관계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상황도 잊고 과거의 추억에 취할 뻔했지만, 테르제가 그렇게 두지 않았다.

“첫사랑이 무섭다더니 빌헬름에서 한 달간 뜨겁게 타올랐나 보군. 바로 약혼을 할 정도로 말이야.”

“……네. 평생 잊지 못할 한 달이었어요.”

뜨겁긴 뜨거웠지. 몇 번이나 습격당하고, 폭주하고, 이상한 착각까지 하고.

절대 잊을 수 없는 한 달이었다.

“저도 딜리언 씨 없이는 도무지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함께 왔어요.”

그 말에 나단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그래, 필요해서 따라오긴 했지. 어둠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가야 했으니까.

하지만 말만 들어보면 세기의 사랑이었다.

폭설 속에서 피어난 한 떨기의 꽃 같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닌가.

하지만 테르제의 짐승 같은 감이 말했다.

리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모든 게 거짓은 아닐 거다. 진실을 말하며, 교묘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모종의 이유로 기억을 잃은 게 확실하군.’

리아는 딜리언을 보호하기 위해 그 사실을 숨기려는 것이고.

이제야 맞춰진 퍼즐에 테르제가 한숨을 터트렸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사실이었군.”

“할아버님도 그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들으셨나 보네요.”

언뜻 보기에 리아는 여유로워 보였다.

“기억상실증이라니. 완전 헛소문이잖아요. 기억을 잃었으면 딜리언 씨가 지금처럼 잘 지내겠어요?”

하지만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잃었다가 찾은 게지.”

“……네?”

당황한 리아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장담하마. 딜리언 그놈은 기억을 잃었고, 다시 찾은 거다.”

“그럴 리가요. 그런 낌새는 없었는걸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딜리언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말았다.

“이상하지 않더냐? 기억을 잃었더라도 너무 완벽했을 텐데.”

테르제의 말에 리아의 눈이 움찔거렸다.

의심을 안 해본 건 아니다. 그는 모든 걸 알고, 익숙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물어볼 때면 그는 매번 아직 기억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과거의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래서 더 믿을 수밖에 없었는데…….

“딜리언 씨가 연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정말로 기억이 돌아왔다고요?”

“연기는 지금 너한테 하고 있겠지.”

테르제의 단호한 말에 리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에 테르제가 이마를 짚었다.

‘이 아이가 딜리언에게 먼저 접근한 줄 알았더니 반대였을 줄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시골 아가씨를 꼬여내 지금까지 손바닥에서 굴린 건 다름 아닌 딜리언이었다.

“……그 녀석이 기억을 잃었으면, 단테의 친아버지가 평민이라는 걸 알았을까. 이 사실은 그날 식사 자리에 모였던 가신들만 아는 일이란다.”

지젤의 남편은 귀족이지만, 그는 단테의 친아버지가 아니다. 단테는 지젤이 혼전 임신으로 가진 아이였으니까.

혼전임신에 그 아이의 아버지가 평민이다. 이 사실은 당시 계승 시험을 치르고 있던 지젤에게 큰 약점이 되었다.

그래서 그 약점을 숨기기 위해 빠르게 혼인을 올린 상대가 지금의 남편.

서로 이익을 위해 부부가 된, 허울뿐인 관계라고 보면 된다.

“가까운 부관들도 잘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네게 말은 해주지 못하지만 깊은 속사정까지 알고 있단다.”

딜리언은 지젤이 평민의 자식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건,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절대 알 수 없는 정보였다. 찾아낸다고 나올 수 있는 정보가 아니란 말이다.

“아가. 무엇보다 눈만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그 녀석 눈도 못 알아볼까 봐.”

이보다 확실한 건 없다. 피붙이가 알아보는데 그게 거짓일 리가.

“그 싹수없는 놈은 내 손주가 맞아.”

땅땅땅! 테르제의 목소리가 마치 사형선고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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