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조금만 참아요. 아직 할 얘기가 남았어요.”
지금 분위기에 할 말은 아니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였다.
“3황자와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다음에 또 다가오면 그땐 뺨을 쳐서라도 쫓아낼 테니까.”
아깐 놀라서 바보처럼 허둥지둥했지만, 한 번만 더 허락 없이 내 몸에 손을 대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그보다 문제는 렉스터예요. 제 발로 찾아오다니 무슨 생각일까요?”
테르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지저분한 수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딜리언 씨도 렉스터가 찾아올 줄은 몰랐던 거죠?”
렉스터의 등장에 싸늘하게 굳었던 얼굴을 떠올리며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 아침까지는 분명 아레스트 영지에 있었습니다.”
딜리언은 매일 카나에에게 보고를 받고 렉스터의 동선을 확인했다.
늘 그렇듯, 오늘도 카나에의 보고를 받았고 렉스터가 아레스트 영지에 있다는 걸 확인했지만, 순식간에 공작성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말을 타고 이틀이 걸리는 거리를 말이다.
샤텐 기사단의 눈을 피했다는 것부터 보통 실력이 아닌데 그 짧은 시간에 장소를 이동했다?
‘건국제 때 봤던 이동 수단인 걸까?’
그림자를 이용한 순간이동일지도 몰랐다.
“예전이었다면 제 일을 방해하러 왔다고 여겼겠지만, 이번엔 아닌 것 같군요.”
딜리언이 제 눈을 가린 내 손을 잡고 아래로 끌어 내렸다.
마침내 마주친 눈동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렉스터는 몰라도 3황자가 원하는 건 리아 씨입니다.”
손바닥에 뜨거운 숨결이 닿고, 입술이 닿았다. 내 손바닥에 입술을 묻은 그가 속삭였다.
“그러니 제 옆에서 떨어지지 마세요.”
“가긴 어딜 가요. 딜리언 씨가 절 지켜준다고 했잖아요.”
스르륵 몸을 미끄러트린 나는 몸을 모로 돌려, 딜리언을 바라보았다.
“딜리언 씨는 저를 지켜주고, 저는 딜리언 씨를 지켜주고. 그렇죠?”
나는 반지 낀 손을 품에 안으며 옅게 웃었다.
“이건 그런 의미잖아요.”
“맞습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커다랗고 단단한 팔이 빈틈없이 나를 끌어안았다. 머리 위에서 좋으면서도 난처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러다 잡아먹을까 봐 겁나.”
그 말을 증명하듯 딜리언은 나를 힘껏 안았다가, 이내 스르르 놓으며 연신 움찔거렸다.
들끓는 욕구를 억지로 참아내듯.
단순히 성적인 욕망은 아닌 듯했다.
보다 복잡하고, 질척한 감정이었다.
“좀 망가지면 어때요. 난 대신관도 성녀도 능가하는 신성력을 가졌는걸요.”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일갈한 나는 그의 머리를 껴안았다.
“망가트려도 돼요. 부서지고 망가져도 다시 고치면 되잖아요.”
다치면 스스로 치료하면 그만이고, 저주가 허기를 느낀다면 원하는 만큼 배불리 먹여주면 된다.
“말했잖아요. 난 좀 대단한 사람이라니까.”
어깨를 으쓱이자, 딜리언이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 못 당하겠네.”
“아내를 이기려고 들면 곤란해요. 평생 져요. 알겠죠?”
“누구 말씀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그의 불안을 단번에 잠재운 나는 보란 듯이 그를 힘껏 껴안고,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그러자 피로가 쏟아진 걸까, 먼저 잠에 든 건 딜리언이었다.
나는 명주실처럼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문득 생각했다.
‘기억은 언제쯤 찾으려나.’
다시 찾으면 그때 뒤통수 깨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지.
그를 향한 미안함을 품은 나는 눈을 감았다.
딜리언이 나를 어떻게 속였는지도 모른 채, 순진하게도 말이다.
* * *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
선선한 밤바람이 창을 타고 들어와 촛불을 흔들었다.
그 흔들거림이 거슬리지도 않는지, 마누스는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 자수정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눈동자, 피를 머금은 듯 붉은 입술, 날카로운 턱선.
제국의 황자답게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얼굴은 다소 차가웠다.
하지만, 그가 미소를 지은 순간, 싸늘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올라간 입꼬리와 동시에 깊게 팬 볼 보조개가 그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이건 똑같은데.”
턱을 매만지던 마누스가 상체를 돌려가며 제 얼굴과 몸을 살폈다.
그가 움찔거릴 때마다 푸른색 귀걸이가 바삐 흔들렸다.
“아직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마누스의 손이 얼굴을 더듬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스친 피부 위로 가느다란 실선이 그였다.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지는 피를 무심히 바라보며 얼굴을 매만지던 그는 이내 손을 제 눈동자로 가져갔다.
“역시, 눈이 문제였던 거야.”
다가간 손이 보랏빛 눈동자를 파낼 듯이 꿈틀거렸다.
“이것만 아니었어도!”
꽈악, 힘껏 쥔 주먹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거울을 후려쳤다.
와장창-! 챙그랑-!
그는 닥치는 대로 가구를 부수기 시작했다.
부서진 거울과 바닥에 흩어진 잔해, 피가 번져 엉망이 된 바닥.
고급스럽던 방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가슴을 들썩이던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황자님, 들어가겠습니다.”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문을 연 렉스터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찡그렸다.
‘또 시작이군.’
점잖은 모습으로 있으랬더니. 미친 새X처럼 피 칠갑을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냐.
혼자면 모를까, 지금 그의 곁에는 지젤이 함께였다.
예상대로 지젤은 난장판인 방과 피범벅이 된 마누스의 얼굴을 보고 숨을 삼켰다.
‘……황자님께 단테를 맡기는 건 너무 위험해.’
렉스터가 이분이라면 단테를 치료해줄 수 있다 호언장담해서 믿었건만.
첫 만남부터 뺨을 타고 줄줄 흐르는 피와 유리 조각이 박힌 주먹을 보여주다니, 아무리 잘 봐줘도 미친X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미친 모습은 곧 기회로 다가왔다.
“아들의 병이 심각하다지.”
다가오는 마누스의 얼굴에 깜짝 놀란 지젤이 눈을 키웠다.
엉망으로 긁힌 얼굴에 새살이 돋으며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귀걸이 속에 담긴 하얀 빛이 일렁거렸다.
“내가 봐줄까?”
상처 치료가 끝난 매끈한 얼굴에 남은 흔적은 핏자국뿐.
“단테의 약을 만들어 주신 분이 황자님이다.”
렉스터가 한마디 거들자, 가볍게 핏자국을 닦아낸 마누스가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지.”
단테를 진정시키던 약이 황자의 손에서 나온 거라니. 지젤이 마른 입술을 축였다.
‘어쩌면, 이분이라면…….’
순식간에 마음을 바꾼 지젤이 무릎을 꿇었다.
곳곳에 유리 파편이 흩어진 바닥이라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황자님, 부탁드립니다. 부디 제 아들을 살려주세요……!”
“그래. 더는 아프지 않게, 편안하게 해주마.”
흔쾌히 떨어지는 허락에 환희하던 것도 잠시.
“대신.”
곧이어 들려온 나지막한 목소리에 어깨를 굳혔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본 마누스가 걱정하지 말라며 부드럽게 웃었다.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줬으면 좋겠군.”
“말씀만 하세요. 단테만 치료할 수 있다면 제 목숨도 바칠 수 있습니다.”
결연한 의지에 마누스가 단호히 손을 저었다.
“그대의 목숨은 필요 없어. 내가 갖고 싶은 건 더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거든.”
그 순간, 마누스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제게 잡혀 바르작거리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 혼란에 물들어 흔들리던 푸른 눈동자. 아직도 그녀의 향기가 코끝에 맴도는 듯했다.
“그대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나도 반드시 아이를 살려주지.”
머리를 조아리는 지젤을 뒤로한 마누스는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자신의 방과 마주 보는 성, 그곳에 있을 그녀를 향해.
마누스의 눈동자가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 * *
마누스가 내게 흑심이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한 딜리언은 단 한 순간도 나를 혼자 두지 않았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쭉.
‘과보호인지 분리불안인지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네.’
하지만 한 가문의 수장인 딜리언이 온종일 내 옆에 붙어있기란 불가능했다.
“리아 씨가 제 손바닥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주머니에 넣고 다녔을 텐데.”
진심인지 그가 자꾸만 나를 힐끔거리며 재킷 앞주머니를 매만졌다.
말도 안 되지만, 진짜로 나를 엄지공주처럼 작게 만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마법으로 어떻게든…….”
“안 돼요. 손바닥만큼 작아지면 일상생활은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밥은 어떻게 먹고, 이 넓은 집에서 이동은 어떻게 하며, 옷은 또 어떻게 입으라는 거야.
의식주를 들먹이며 그를 설득하자, 딜리언이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며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렇죠?”
“한 침대에서 잘 수가 없네요.”
그게 문제였냐. 차게 식은 내 표정에도 딜리언은 턱을 문지르며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키스도 못 하겠군요.”
“머리에 그런 생각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생각이라뇨. 연인과 닿고 싶어 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욕구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던 얼굴이 연인이라는 말에 달아올랐다.
“……빠, 빨리 일이나 하러 가요!”
“말 나온 김에 할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휘감아 당겼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얼굴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축이려 핥자, 그의 시선이 내 입술에 꽂혔다.
핥아 내리듯, 진득하게 달라붙은 시선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자 딜리언의 눈에서 새빨간 불꽃이 튀었다.
“자꾸 유혹할래요?”
잠에서 깨어난 듯,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간지럽게 파고들었다.
“내가 언제…….”
묘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슬그머니 눈을 감은 그때였다.
“그게 문제라면 내가 봐주마.”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딜리언의 어깨를 밀쳤다.
순식간에 멀어진 거리에 딜리언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문에 기댄 채 우리를 바라보는 테르제에 말을 더듬거렸다.
“할아버님. 어, 언제부터…….”
“주머니 어쩌고 할 때부터 있었다.”
아악!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물론, 테르제는 이런 나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딜리언. 빨리 모시러 가거라. 늦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