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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106)화 (106/143)

106화.

***

“에취!”

여름도 아닌데, 때 이른 물놀이에 코끝이 간질거렸다.

물에 너무 오래 있던 탓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얼른 씻는 게 좋겠습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복도를 거닐자, 그 모습을 본 사용인들이 깜짝 놀라 허둥지둥했다.

그 사이, 눈치 빠른 사용인이 수건을 가져와 우리 몸에 덮어주었다.

“당장 뜨거운 물을 올리겠습니다.”

오밤중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자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리아 씨, 얼른 올라갑시다.”

나는 어깨 위에 덮인 수건을 끌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땅 속에 머리만 처박는 타조도 아니고…….

굉장히 1차원적인 생각이었지만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수치심에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런 내 생각을 읽은 걸까, 딜리언이 제 수건을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졸지에 수건으로 칭칭 감긴 나는 쫓기는 사람처럼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세라의 마사지를 받던 나단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 뭐냐! 이 수건 뭉치는!”

“나단. 나야.”

나는 얼굴을 가리던 수건을 집어 던졌다.

그러자 안심하던 나단이 다시 한번 펄쩍 뛰어올랐다.

“리아, 너 입술이!”

헉, 맞다! 뒤늦게 딜리언과 한 입맞춤이 떠오른 나는 황급히 입술을 가렸다.

나쁜 짓을 하고 들킨 사람처럼 심장이 콩닥거렸다.

“물놀이라도 한 모양인데, 거머리라도 달라붙은 거냐?”

“으, 응!”

모르는구나.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린 그때였다.

“……라고 할 줄 알았냐, 딜리언, 이 파렴치한 자식아!”

힘차게 날아오른 나단이 딜리언의 머리를 마구 쪼았다.

부엉이인지, 딱따구리인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저러다 땜빵이라도 생기면 큰일인데.

“나단, 그러다 머리에 구멍 뚫리겠어.”

“너, 너! 지금 딜리언 편을 드는 거야? 내가 아니라?”

곱게 키운 내 새끼가……! 나단이 이럴 수는 없다며 비틀거렸다.

다행히 툭, 쓰러지는 나단의 몸을 세라가 안전하게 받아주었다.

“세라…….”

“네, 나단 님. 저 여기에 있습니다.”

“리아가, 우리 리아가……!”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 죽은 것처럼 부르지 마.”

“리아……!”

내가 딜리언의 편을 들어준 게 어지간히도 충격인지, 나단이 서럽게 내 이름을 불러댔다.

한창 귀여울 나이 천 살. 떼쟁이 나단이 칭얼거렸다.

저러다 울겠다 싶어, 나단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딜리언이 내 앞을 막아섰다.

“왜요……?”

“나단이 기운을 차리게 할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요?”

“이렇게요.”

성큼 다가온 얼굴이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쪽, 하고 울리는 소리에 시들거리던 나단이 벌떡 일어났다.

이것 보라는 듯 딜리언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눈을 찡긋거렸다.

“봤죠?”

“딜리언, 네 이노오오옴!”

나단의 입에서 엄청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불을 뿜어도 이상하지 않을 기세였다.

물론, 딜리언은 가볍게 무시했지만.

“리아 씨, 자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요.”

“네? 왜요?”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니까요. 날이 밝을 때까지 함께해야죠.”

의미심장한 그 말에 내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왜 붉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냐고?

지금 부끄러운 게 문제가 아니었다. 등 뒤에서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는 나단이 문제였다.

“금방 올게요.”

그리고 폭탄을 터트린 장본인은 유유히 방을 벗어났다.

‘아니, 나 혼자 뒷감당은 어떻게 하라고!’

결국, 아무런 보호구도 없이 시한폭탄과 마주하게 된 나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필사적으로 나단의 눈을 피했다. 누가 보면 그가 메두사라도 되는 줄 알 정도로.

“리아, 역시 저놈이 억지로 널……!”

“……내가 먼저 했어.”

“커헉!”

“나단!”

내 폭탄선언에 나단은 목이 졸린 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졌다.

* * *

젖은 몸을 따뜻한 물에 녹이고, 보송보송하게 말리기 무섭게 나단이 침대에 발을 두드렸다.

“리아, 당장 여기 와서 앉거라.”

“……응.”

마치, 사고 친 딸을 꾸짖는 듯한 분위기와 눈빛에 나는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작은 부엉이와 그 앞에 무릎을 꿇은 다 큰 성인의 조합은 여간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 증거로 고개를 돌리고 입가를 씰룩이는 세라의 얼굴이 시야 끝에 걸렸다.

“후, 리아. 내가 네 사생활까지 참견하고 싶진 않지만, 이건 아니다. 식을 올리기는커녕, 연인 사이도 아닌데 역사적인 밤이라니!”

“나단, 우리 오늘부터 사귀어.”

“……사귄다고 해도,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아직 일러!”

사랑을 나누는 행위……?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

“너,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딜리언 그놈이 너를 홀라당 잡아먹을까 봐 그런다!”

“자, 잡아먹힌다니! 내가 그렇게 허술해 보여?”

“당연하지!”

괜히 대들었다가 잔소리만 늘었다. 나는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원색적인 표현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22살에 듣게 된 성교육이란…….

참 미묘하고 복잡한 기분이다.

동시에 그만큼 사랑받고 있는 게 느껴져, 행복했다.

“절대, 절대 그건 안 된다. 알겠지?”

“응, 알았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자…….”

앞으로 한 번만 더 반복하면 열 번째였다.

이대로 녹초가 되어 뻗나 싶은 그때, 잠옷 차림의 딜리언이 문을 열고 등장했다.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당장 꺼지거라!”

“썩 꺼질 건, 너다.”

나단의 말을 곧바로 받아친 딜리언이 세라를 지원군으로 소환했다.

“세라, 데려가.”

“네, 전하.”

눈 깜짝할 사이에 나단을 품에 안은 세라가 문고리를 잡았다.

“세, 세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죄송합니다.”

나단은 있는 힘껏 발버둥 쳐봤지만, 전직 암살자의 노련한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큭, 딜리언 이 자식! 세라를 매수하다니!”

“매수가 아니라 원래 내 부하였다.”

철컥, 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끝을 예감한 나단이 다급히 외쳤다.

“리아! 내 말 명심하거라! 식을 올리기 전에 그런 남세스러운 짓은 절대 안 돼! 이 아빠는 절대 허락할 수 없어!”

닫힌 문 너머로 나단의 경고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평소보다 몇 배나 사나운 기세에 딜리언이 턱을 문질렀다.

“리아 씨가 할아버님께 허락받은 것처럼 저도 장인어른께 허락을 받아야겠군요.”

“나단 말하는 거예요?”

“리아 씨 아빠라는데, 장인 대우라도 해 줘야 덜 울겠죠.”

이러나저러나 결국 울릴 거라는 소리잖아.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매끄럽게 입매를 당긴 딜리언이 내 허리를 지분거렸다.

“아니면, 일단 저지르고 허락을 받을까요?”

“아니, 그건. 으앗!”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다. 등에 닿는 침대가 푹신했다.

눈을 껌벅거리며 천장을 바라보던 나는 머리 위로 지는 커다란 그림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이럴 거예요?”

“더한 것도 할 건데.”

나를 제 팔 사이에 가둔 딜리언이 천천히 몸을 숙였다.

가벼운 입맞춤이 이마부터 시작해 코와 뺨을 향해 차례대로 쏟아졌다.

얼굴 주변을 맴돌던 입술은 종착지인 내 입술을 찾아 단번에 덮었다.

겹쳐진 입술에서 달콤하고 습한 숨이 오갔다. 귓가에 울리는 젖은 소리에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어떡해.’

이대로 가다간 정말 일을 칠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하아.”

얼굴 위로 뜨거운 숨이 흩어졌다.

“딜리언 씨, 잠깐, 좀 진정해요.”

“……진정하고 있습니다.”

진정은 무슨. 눈이 반쯤 맛이 갔잖아.

나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일렁거리는 붉은 눈에 마른침을 삼켰다.

허리를 타고 슬금슬금 오르는 손에 기겁한 나는 구르다시피 그의 품에서 벗어나 침대 헤드에 등을 찰싹 붙였다.

“우선 앉아요.”

“리아 씨.”

“안 돼요. 얼른.”

팔짱을 낀 채, 두 번은 없다며 단호하게 말하자 딜리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포기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가 노린 건 내 허벅지였다.

아차, 하는 사이에 딜리언이 내 허벅지를 베었다.

허벅지를 묵직하게 누르는 무게에 움찔 떨자, 그가 악동처럼 웃으며 내 배를 껴안았다.

“무, 무슨!”

“전 너무 피곤해서 꼭 누워야겠습니다. 리아 씨도 불편하면 누우세요.”

절대 안 누워. 누우면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가자미눈을 하고 딜리언을 흘긴 나는 허벅지를 간지럽히는 그의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었다.

장난을 치듯 머리끝을 매만지자 기분 좋은지, 딜리언이 얌전하게 굴었다.

“언제부터 절 좋아했습니까.”

나른하게 물어오는 그 질문에 손이 멈칫했다.

“……몰라요.”

“또 모른다고 그러네. 알 때까지 다시 입을 맞춰볼까요?”

내가 대답을 회피한다 여겼는지 딜리언이 손을 뻗어 내 입술을 쓰다듬었다.

‘확 물어버릴까 보다.’

어쩜 조금도 틈을 놓치지 않는 건지. 나는 딜리언의 손을 입술에서 떼어낸 후 단단하게 깍지를 끼었다.

“피하는 게 아니라 정말 몰라요.”

가랑비에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내가 딱 그 경우였다.

“정신 차리니까 좋아하고 있었어요.”

나는 딜리언의 눈을 올곧게 쳐다보며 천천히 마음을 전했다.

아까처럼 충동적이고 엉망인 고백이 아니라, 정말로 보여주고 싶었던 진심을.

“좋아하는 걸 숨긴 게 아니에요. 엉망인 고백이 아니라, 제대로 구색을 갖추고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데, 그 타이밍은 내게 오지 않았으니까.

“오늘은 말해야지, 내일은 말해야지, 미루고 미루다가…… 네, 오늘 터지고 말았네요.”

나는 멋쩍은 기분에 뺨을 긁적였다. 밝은 불 아래, 멀쩡한 정신으로 말하자니 쑥스러움이 몰려왔다.

“좋아해요. 운명이니 뭐니 그런 게 아니라 당신이라서 좋아하게 됐어요.”

나지막한 내 고백에 딜리언의 눈이 벅차오르듯,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 뜨거운 눈빛이 부끄러워서, 나는 슬그머니 그의 눈 위에 손을 올렸다.

“……리아 씨, 안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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