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 *
덜컹.
나는 닫힌 문에 기댄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꿈을 꾼 것처럼 머리가 몽롱했다. 그런 내가 이상했던 걸까.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던 나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아?”
“나단…….”
넋이 나간 사람처럼 나단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침대 위로 엎어졌다.
“……나단, 너는 전생을 믿어? 환생은? 운명은?”
“갑자기?”
우다다 쏟아지는 질문에 나단이 눈을 깜박거렸다.
“응!”
“믿는다. 전생도, 환생도, 운명도 존재하기 때문에 너와 내가 다시 만난 것이지.”
이,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럼 3황자도 환생했다는 소리가 되잖아!
“그럼, 내가 널 다시 만난 것처럼 전생의 내 연인도 다시 태어났을까?”
“네 생각엔 어떨 것 같으냐?”
“……못 태어났겠지. 그 사람의 영혼은 깊은 곳에 갇혀있잖아.”
나를 지키고, 세상을 지키기 위한 희생이었다 하더라도 저주를 받아들임으로써, 버림받은 아이가 되어 버렸으니까.
과연, 신은 저주받은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을까? 자비를 베풀었을까?
신은 다정하고 상냥했지만, 동시에 매정하고 냉혹했다.
내 부탁대로 연인의 영혼을 소멸시키진 않았지만, 시험이라는 조건을 걸어 천 년 동안 다시 태어나지도 못하도록 족쇄를 채웠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타났어. 이게 가능해?”
“뭐?”
나는 망연자실하며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웃는 얼굴이 너무 닮았어. 거기다 약속까지 알고 있다고.”
나를 애절하게 바라보던 보랏빛 눈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닮았으나, 닮지 않은. 이질적인 눈동자.
“그 사람이 3황자래…….”
“걘 누구냐……?”
나만큼이나 나단도 혼란스러워 보였다.
‘정말로 3황자가 그 사람인 걸까?’
모든 증거가 3황자를 가리켰지만, 나는 계속해서 부정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환생? 할 수 있지. 그의 말처럼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기어 올라온다던 사람인데, 못 할 게 뭐야. 하고도 남지.
‘그런데 3황자라니, 말도 안 돼.’
만약 그 사람도 나처럼 다시 태어났다면, 그 사람은 딜리언이어야 하잖아.
“다 엉망이야…….”
그 사람과 내가 한 약속까지 다 알고 있으니 더는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한숨을 푹 내쉬자, 나단이 내 머리에 날개를 올렸다.
“리아, 전에도 말했지? 이건 일종의 시험이라고.”
“응.”
“오로지 너 혼자만의 힘으로 이겨내야 하는 것이니,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단다.”
내 머리를 쓰다듬은 나단이 다정하게 웃었다.
“너를 믿거라. 주변 상황에 흔들릴 필요 없어. 네가 가는 길이 정답이니까.”
* * *
내가 가는 길이 정답이라…….
정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복잡한 머리가 서서히 정리되는 중이었다.
“시원하다.”
선선히 불어오는 밤바람이 열이 오른 머리를 식혀주었다.
며칠 전, 딜리언과 장난을 치며 놀았던 연못을 찾은 나는 그와 함께 앉았던 자리에 홀로 앉았다.
“결국, 얼굴 못 봤네.”
딜리언이 중간에 찾아왔으나, 나는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잖아. 아직, 딜리언을 볼 자신이 없는걸.
3황자와 무슨 사이냐고 추궁할 텐데, 할 말이 없었다.
정말로 아무 사이가 아니니까.
하지만 딜리언이 그 말을 믿어줄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변할지 두려웠다.
“나중에 엄청 혼나겠네.”
“알면 피하질 말았어야죠.”
“헉.”
불시에 끼어든 목소리에 나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몸을 파드득, 떨었다.
헛디딘 손이 삐끗했다. 무너진 무게중심에 몸이 옆으로 넘어갔다.
‘큰일 났다. 머리 박겠어……!’
곧 전해질 충격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느껴지는 건 어깨를 감싼 커다란 손과 뜨거운 온기였다.
눈을 뜨니, 루비처럼 붉은 눈이 나를 말없이 주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 흔들리는 머리카락, 귓가에 들려오는 조용한 물소리.
이 모든 게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분위기에 홀려버린 걸까, 아니면 홀렸다는 핑계를 대고 싶었던 걸까.
나는 굳게 닫힌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저는 초대 성녀의 환생이에요.”
“그렇군요.”
“안 웃겨요?”
당연히 웃을 줄 알았던 딜리언은 차분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전혀요. 성녀와 대신관을 압도하는 신성력을 가졌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맞아요. 이유가 있었죠. 다시 태어난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아요?”
“절 만나기 위해서겠죠.”
이 순간까지도, 멈추지 않는 그의 당당하면서도, 능글맞은 유혹에 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것도 맞아요.”
“……정말입니까?”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칠 줄은 몰랐는지, 딜리언이 놀란 표정으로 몇 번이나 되물었다.
“딜리언 씨는 모르겠지만, 시나이즈에 내려온 신탁이 하나 있어요. 딜리언 씨가 태어난 날에 내려온 신탁이죠.”
“신탁이요?”
“딜리언 씨가 스물다섯이 되는 해에 저주를 풀어줄 운명의 아이가 나타날 거라는 신탁이에요.”
나는 놀란 딜리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제가 그 신탁의 주인이에요.”
나는 내가 꾼 꿈의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내게 내려온 신탁과 과거 내가 남긴 일기의 내용까지 전부.
“그러니까 어둠을 소멸시키고, 딜리언 씨의 저주를 풀어주는 게 제 사명인 거죠.”
“그래서 리아 씨의 신성력만이 절 구원할 수 있었던 거군요.”
구원이라, 너무 거창하지 않은가 싶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리아 씨가 초대 성녀의 환생이라면, 전 뭡니까.”
“제 추측으로는, 후손이 아닐까 싶어요.”
“그 남자는 지옥에 갇혀있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았죠.”
의미심장한 내 한마디에 다시 정적이 맴돌았다.
“아니라는 말입니까.”
“저처럼 다시 태어났나 봐요.”
“……설마, 그 사람이 3황자입니까?”
눈치 빠른 딜리언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번에 이해했다.
나는 차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말해요. 3황자가 그 남자가 확실합니까?”
싸늘한 추궁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딜리언이 내 턱을 잡아 돌렸다.
거친 기세와 달리, 부드러운 손길에 안도한 것도 잠시.
혼란으로 일렁거리는 붉은 눈을 보자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 확신합니까. 아닐 수도 있잖아요.”
“과거의 저와 한 약속을 알고 있어요. 그날 있던 일을 전부, 알아요.”
나단도 모르는, 오직 그와 나만의 일을.
“하…….”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내뱉어진 무거운 한숨은 이내 허탈한 웃음으로 변했다.
갑작스러운 그 변화에 초조해진 나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가 보일 반응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나는 변명처럼 자꾸만 무언가를 주절거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숨 막혀 죽을 것 같았으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신탁의 주인은 딜리언 씨가 맞는데……. 왜, 진짜가,”
“진짜라고 하지 마십시오.”
서슬 퍼런 목소리에 움찔 어깨가 떨렸다. 처음으로 마주한 선연한 분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 어깨를 짓누르는 침묵에 속이 울렁거리던 그때, 딜리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3황자가 그 사람이라서 고민하고 있었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고개를 들어 마주 본 딜리언은 놀랍게도 웃고 있었다.
“그럼 진작 제게 말하지 그랬습니까. 알아서 해결해줬을 텐데.”
“어떻게……?”
“어려울 거 없습니다. 죽여버리면 그만이니까.”
다정하게 웃고 있는 얼굴과 달리, 그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날카로운 검과 같다.
“헷갈리게 하는 대상이 사라지면 리아 씨 머리도 맑아지겠죠.”
그 순간, 나는 지금껏 딜리언이 조용했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는 몇 번이고 마누스를 죽이고 있던 것이다.
수없이 많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는 다급히 딜리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지 말아요.”
그리고 이 행위가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왜? 당신의 운명이 죽는 게 싫어서?”
“네? 그게 무슨…….”
“비참하게 잃은 연인을 또 잃을까 봐 무섭습니까?”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오해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래, 무서웠다. 딜리언이 마누스를 죽여, 황실과 전쟁이 일어날까 봐.
그래서 딜리언이 잘못될까 봐. 다칠까 봐. 아플까 봐!
점점 일그러지는 내 얼굴에 딜리언의 붉은 눈이 기이하게 일렁거렸다.
분노, 절망, 괴로움, 질투…….
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을 마주한 나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새끼가 그러더군요.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운명을 거스를 수 없을 거라고.”
무언가를 가늠하듯, 허공을 바라보던 딜리언이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순순히 물러날 줄 알았나?”
서늘한 시선이 내게 향했다. 꼼짝도 하지 못하는 내 곁에 무릎을 굽힌 딜리언이 나와 눈을 맞췄다.
반쯤 돌아버린 눈이 달빛에 비쳐 번들거렸다.
내가 좋아하던 영롱한 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당신과 그 새끼가 운명이라 쳐.”
그는 이런 가정을 하는 것조차 싫은지 나를 바라보는 눈이 흉흉하다. 그 눈빛에 나는 입이 틀어막혔다.
“당신이 있을 곳은, 내가 아니라 3황자의 곁일 수도 있지.”
“……그럴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상관없어.”
간신히 부정의 말을 뱉었지만, 딜리언에게 내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멋대로 말을 쏟아내던 딜리언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나를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리아 씨, 저는 그 새끼를 죽여서라도 당신을 제 옆에 둘 생각입니다.”
커다란 손이 내 뺨을 감쌌다. 굳은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끝에서 진득한 소유욕이 느껴졌다.
“그 자리는 처음부터 내 자리였어.”
내 입술을 물어뜯을 듯, 다가온 그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당신이 있을 곳은 내 옆이라고.”
내가 먼저 당신을 만났다. 내가 먼저 찾았다고.
마주친 붉은 눈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강렬하고 뜨겁게, 그리고 아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