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가면이 벗겨지고 드러난 얼굴은 지독히도 낯설고, 차가웠다.
“무슨 소리야, 리아.”
순식간에 달라진 분위기에 경계하자, 멈칫한 남자가 다시 입매를 당겨 미소지었다.
익숙한 미소가 나를 향했지만, 그 찰나의 순간 마주친 낯선 얼굴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리아. 네가 태어난 것처럼 나도 다시 태어났어. 너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다시 태어났다고? 그럴 리가 없어. 그 사람은 분명…….
“……말도 안 돼.”
“이해해. 놀랐겠지. 나도 정말 놀랐어. 당신도 그대로거든. 하나도 안 변했어.”
흠칫, 나는 다가오는 남자를 피해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상처받은 눈이 내게 향했다.
“리아,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거야?”
“기억……?”
“약속했잖아.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널 다시 만나러 오겠다고.”
밖을 본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처럼 눈이 오는 날 돌아오겠다 약속했는데 내가 너무 늦었지. 미안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만나러 오겠다, 눈이 내리는 날 오겠다.
그와 한 약속까지 이 남자는 전부 알고 있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정말인가? 진짜로 그 사람일까?
비슷한 외모는 그렇다 쳐도, 그날의 일을 하나도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건 이상했다.
그럼에도 위화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남자가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흠칫 놀랐다. 남자의 손이 생각보다 따뜻해서.
“리아.”
하지만 내 약지를 만지는 손길은 거칠었다. 반지를 부술 듯이 매만지던 남자가 상냥하게 속삭였다.
“이제 이건 버리고, 나와 함께 가자.”
천천히 빠지기 시작하는 반지에 깜짝 놀란 내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가 반지를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전 못 가요. 아니, 안 가요.”
딜리언에겐 내가 필요했다. 그를 지켜줄 사람은 나뿐이라고.
그런 딜리언을 두고 어딜 가겠어.
“하지만, 약속했잖아. 다시 만나면 그때처럼 사랑하기로.”
“죄송하지만, 그건 제가 한 약속이 아니에요.”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왔는데, 너는 부정하는구나.”
상처받은 남자의 눈이 일그러졌다. 그건 꾸며낼 수 있는 종류의 표정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상처받은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가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리아, 우리는 운명이야. 돌고 돌아도 결국 다시 만날 운명.”
그가 운명론을 펼친 순간, 내가 떠올린 사람은 딜리언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거 안 믿어요.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
나는 그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하지만 남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남자가 나를 향해 다시 손을 뻗어진 그때,
엄청난 살기와 함께 남자의 손목이 비틀렸다.
“내 여자 옆에서 떨어져. 당장.”
딜리언의 눈동자가 붉게 일렁이며 무섭게 타올랐다.
* * *
리아를 보호하듯 품에 안은 딜리언의 눈이 심상치 않았다.
당장에라도 상대를 씹어 먹을 듯한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약지에 낀 반지를 보고도 몰랐다고 하진 않겠지. 3황자.”
‘3황자……?’
저 남자가 3황자라고? 늘 아이나를 위협에 빠트리고 카시스를 견제하던 그, 마누스?
저 얼굴이 원작의 악당이었단 말이야? 리아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악당 중 하나가 제 꿈속의 연인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도, 그 얼굴이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일그러졌다는 사실도.
별안간 시야가 차단됐다. 딜리언의 널찍한 등이 그녀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3황자. 내 약혼녀에게서 눈을 치우는 게 좋을 겁니다. 황족의 상징인 자안을 잃고 싶은 게 아니라면.”
황족 특유의 자색 눈동자를 썩 좋아하진 않지만, 오늘처럼 꼴 보기 싫은 날이 없었다.
마누스의 눈이 의미하는 바를 너무나도 잘 알아서.
모를 수가 없었다. 마누스는 자신과 같은 눈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 마누스에게 리아가 잠깐이라도 시선을 주는 게 참을 수 없이 싫었다.
딜리언은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까딱하다간, 마누스를 죽여버릴지도 몰랐다.
“딜리언 씨, 저 괜찮아요.”
딜리언이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치지 않은 건, 등에 닿는 리아의 온기 덕분이었다.
“황자의 몸에 이리 함부로 손을 대도 된다고 생각하나?”
“더한 것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으십니까?”
날을 세운 두 사람의 대화에 리아는 침을 삼켰다.
‘어떡하지? 막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잘못 끼어들었다간, 살기에 목이 짓눌릴 것 같다는 원초적인 공포가 발을 붙들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그때, 팽팽한 공기를 갈라낸 자가 있었으니.
“그만두거라. 딜리언!”
“할아버님!”
리아는 구세주를 만난 사람처럼 테르제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어떻게든 말려주세요……!”
저러다 진짜로 큰일 날 것 같았다.
리아의 다급한 얼굴에 테르제가 둘 사이로 달려갔다. 그 뒤로 렉스터가 느긋한 걸음으로 따라 올라오는 게 보였다.
“처음 보는군요. 예비 공작부인.”
처음은 개뿔, 내가 쏜 화살에 맞아 팔에 구멍이 난 주제에.
속으로 이죽거린 리아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아쳤다.
“안 오실 줄 알았는데, 놀랍네요.”
나한테 당하고 딜리언이 무서워서 숨은 줄 알았는데, 용기가 가상하네?
그러한 속뜻을 눈치챈 렉스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뿐이다. 제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렉스터에게 리아의 도발은 치와와가 앙앙거리는 정도에 불과했다.
“꼭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렉스터가 마누스에게 다가섰다.
“황자님, 이만 가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래, 이만 가야지.”
이 이상 소란을 피워 쫓겨나서 좋을 거 하나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마누스가 등을 돌렸다.
물론, 마지막까지 딜리언을 향해 이죽거리는 걸 잊지 않고.
“공작. 그대가 아무리 발버둥 치고 막아보려 해도 리아와 내가 운명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끝까지 딜리언의 속을 긁어내는 말에 울컥한 찰나, 테르제가 재빨리 딜리언의 등을 밀어냈다.
이러다가 황족 살인으로 시나이즈가 반란의 중심이 될까 봐 두려웠다.
“리아, 너도 들어가서 쉬거라.”
리아까지 방으로 떠민 테르제는 오지 않으려는 딜리언을 억지로 끌고 집무실 문을 닫았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참았어야지!”
천둥처럼 날아든 호통이 집무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제아무리 시나이즈라 하더라도, 황족 시해는 안 된다.
제국이 혼란에 빠지는 건 물론이고, 황실의 견제를 받게 될 텐데, 그러면 뒷일이 너무 귀찮아진다.
시나이즈가 무너질 일은 없다. 하지만 상대가 황실이라면 이쪽도 잃을 게 만만치 않았다.
“죽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십시오.”
그런데 기껏 한다는 소리가 안 죽인 걸 다행으로 여기라니.
“아이고, 두야.”
건장한 몸이 소파에 쓰러지듯 늘어졌다. 이마를 부여잡은 테르제가 끙끙 앓았다.
“렉스터 이놈은 도대체 어쩔 작정인지.”
상의도 없이 마누스를 내일 있을 연회 참석자로 데려오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분명했다.
‘이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었는데, 역시 백작 작위를 주는 게 아니었어.’
혼외자식이라곤 하나, 시나이즈의 피를 이었기 때문에 작위를 내렸건만. 이리 독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렉스터 혼자서 3황자를 지지하는 거라면 상관없다.
개인마다 지지하는 지도자가 다른 건 어쩔 수 없으니까.
하지만 시나이즈의 가장 큰 어른인 테르제의 탄신 연회에 3황자, 마누스가 참석한다는 건 조금 의미가 달랐다.
자칫 잘못하면, 그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3황자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황태자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정세에 관여하진 않지만, 뒤에서 황태자를 지지하고 있던 테르제로선 몹시 곤란한 상황이었다.
“부탁이다. 연회날 까지만 참거라. 연회만 끝나면 돌아간다고 하니까…….”
“내일 가든 지금 가든 상관없습니다. 한 번만 더 리아 씨에게 접근하면 그땐 그 눈부터 파버릴 겁니다.”
“딜리언.”
“가문을 건드렸으면 모를까, 리아 씨를 건드린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테르제는 차갑게 타오르고 있는 딜리언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웬 놈이 자기 약혼자에게 치근덕거리는데, 기분 나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손주의 인간적인 면모에 흥분을 잠재운 테르제가 말했다.
“3황자에게 사람을 붙여놓으마. 그리고 리아의 방 근처에는 개미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하게 하마.”
지금까지 리아를 밀어내던 테르제였지만, 오늘을 기점으로 마음이 기운 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딜리언과 약혼한 그녀에게, 공작성에서 대놓고 추근거렸다는 사실은 시나이즈를 무시한 행위였다.
속이 뒤집히다 못해, 터져나가는 상황이 아닌가.
“황태자에게 서신을 넣어, 연회에 참석하라 이르십시오.”
마누스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안다면, 카시스도 바람처럼 달려올 터.
“흠, 확실히 황태자까지 온다면 3황자를 지지한다는 헛소리는 사라지겠구나. 그다음엔 어쩔 거냐.”
“황태자를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할 겁니다.”
그것도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그를 황제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야 3황자를 합법적으로 죽일 명분이 생기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