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정확히 우리를 노려보는 붉은 눈이 번뜩였다.
장담하는데, 테르제와 나는 곰의 먹이로 찍힌 게 분명했다.
그리고 잡히는 즉시, 갈기갈기 찢기겠지.
“테르제 님, 무기는요?”
“부서졌다.”
“단검도……?”
“정정당당하게 싸우는데 단검을 가져오면 안 되지.”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네요.”
끄응. 침음을 삼킨 나는 뒷걸음질 치며 테르제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가 맨몸으로 곰에게 달려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테르제 님, 일단 도망가죠. 딜리언 씨랑 합류하는 게 좋겠어요.”
“거기까지 잡히지 않고 뛰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안다. 인간의 속도로는 절대 곰을 따돌릴 수 없다는 걸.
“하지만…….”
“그리고 시나이즈는 절대 걸려온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그거 짐승도 포함되는 거였느냐고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자, 공격 의사로 받아들인 곰이 이를 드러내며 포효했다.
“크와아악!”
귀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거친 소리에 흠칫 놀란 나는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에 겁을 먹었다 여긴 테르제가 답지 않게 부드러운 손길로 내 등을 토닥였다.
“걱정 마라. 내가 소싯적에 맨몸으로 호랑이도 잡은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말년이잖아!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테르제 님, 너무 위험해요.”
“내가 막고 있을 테니 너라도 가서 딜리언을 불러오너라.”
말을 마치기 무섭게 곰이 달려들었다. 동시에 테르제도 앞으로 뛰쳐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를 막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 가라는 거야. 내가 가면 죽을 것 같단 말이야!’
무기가 있으면 몰라, 맨몸으로 어떻게 곰을 잡겠다는 건지.
‘시나이즈 가문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에 하나씩 미쳐야 살 수 있는 거야?’
특히나, 꺼질 줄 모르는 승부욕은 시나이즈 가문의 특성이라 믿어도 될 정도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제가 급소를 노릴게요!”
호기롭게 외쳤지만, 급소를 노리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탁.
이번에도 튕겨 나온 화살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부가 얼마나 두꺼운 거야!’
애초에 소동물을 잡는 용도로 만들어진 화살이다.
가늘고, 끝이 무딘 탓에 두꺼운 곰의 피부를 뚫기란 쉽지 않았다. 간신히 박힌다고 하더라도, 치명상을 입히기엔 무리가 있었다.
‘……화살이 부족해.’
남은 화살은 두 대.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
“크윽!”
“테르제 님!”
그러니까 내가 위험하다고 했잖아!
날카로운 발톱에 스친 어깨가 너덜거렸다.
보는 내가 기절할 것 같은 장면이었으나, 테르제는 포기하지 않았다.
언제 주운 것인지, 나뭇가지를 움켜쥔 테르제가 최후의 일격으로 곰의 눈을 찔렀다.
“크아아악!”
곰이 고통에 차 몸부림쳤다. 나는 그 틈을 타 테르제에게 달려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짓이냐! 얼른 도망가지 않고!”
“제가 여기서 도망가면 테르제 님은 죽어요.”
호통을 치는 모습을 보니, 살 만한가 보다. 그에 안심한 나는 들고 있던 활을 던졌다.
“활은 왜 버려!”
“이걸로는 못 잡아요.”
“크으, 크으으.”
곰이 머리를 흔들며 이를 드러냈다.
잔뜩 분노한 그 모습에 심장이 매섭게 뛰었지만, 그럴수록 머리는 차분해졌다.
“테르제 님, 기억나세요? 제가 곰을 잡으면 결혼 허락해주겠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팔찌를 눌러 새로운 활과 화살을 구현했다.
‘저런 가느다란 화살로는 곰을 죽일 수 없어.’
나는 신성력을 증폭시켜 굵고, 날카로운 화살을 만들어냈다.
나는 달려드는 곰을 똑바로 바라본 채,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크와, 쿠와아아악!”
노리는 곳은 급소, 목이다.
타앙-!
힘차게 튕겨 나간 화살이 정확히 곰의 목을 노렸다.
쿠웅, 소리와 함께 커다란 몸이 땅으로 허물어졌다.
천천히 활을 내린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숨이 끊긴 곰을 바라보았다.
끝났다. 내가 이겼어.
나는 테르제를 보며 활짝 웃었다.
“약속 지키셔야 해요.”
그건, 내 승리를 알리는 말이었다.
* * *
“자, 이제 다됐어요.”
테르제의 치료를 마친 나는 어깨를 꾹 눌렀다.
“더 아픈 곳 있으세요?”
“……신성력을 쓸 줄 아는구나.”
“이래 보여도 꽤 실력이 좋답니다.”
“그건 말 안 해도 알겠다.”
믿기지 않는지, 테르제가 연신 제 어깨를 매만졌다.
“너는 알고 있느냐. 딜리언이 신성력 저항이 심하다는 걸.”
“네. 알고 있어요.”
“너희는 상극일 텐데, 아프지 않으냐?”
“하나도 안 아파요.”
아프긴 무슨, 딜리언은 내 신성력에서 안식을 찾았다.
나는 남들과 다르고, 유일하게 그의 저주를 누를 수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테르제가 엉뚱한 곳을 짚었다.
“그 정도로 서로를 사랑하다니…….”
이러다 세기의 사랑으로 포장되게 생겼네. 나는 어물쩍거리며 말을 돌렸다.
“저 곰은 생신 선물로 드릴게요.”
“……그거 참, 고맙구나.”
테르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킨 그때, 소란을 듣고 찾아온 딜리언이 사색이 된 얼굴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리아 씨, 다친 곳은 없습니까?”
바닥에 널브러진 활과 화살, 늑대의 사체, 그리고 커다란 흑곰의 사체까지.
딜리언이 걱정할 만한 광경이었다.
“네. 저는 멀쩡한데, 할아버님이 다치셨어요.”
생소한 호칭에 테르제가 버벅거렸다.
“할, 할아버님?”
“곧 한 가족이 될 텐데, 좀 더 가까운 호칭이 좋지 않겠어요?”
“허어.”
당황하는 테르제의 입에서 기가 찬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 기쁜 소식을 딜리언에게 전했다.
“딜리언 씨, 기뻐하세요. 제가 저 곰을 잡아 할아버님께 당당히 인정받았답니다.”
“역시 리아 씨입니다. 믿고 있었어요.”
잘했다며 내 뺨을 잡은 딜리언이 이마에 키스했다. 입술이 닿은 곳이 뜨겁게 타올랐다.
“디, 딜리언 씨?”
“이 할애비 앞에서 무슨 짓이냐!”
테르제가 호통을 치든 말든, 나를 품에 안은 딜리언은 그를 향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진작에 허락하면 좋았잖습니까. 이제라도 리아 씨의 진가를 알아서 다행입니다.”
“내가 말을 말지.”
팔불출 같은 그 모습에 테르제가 고개를 저었다.
“곰은 사람을 불러서 가져가라 해야겠구나. 우선은 내려가자.”
* * *
얼른 가서 나단한테 자랑해야지!
마침내 테르제에게 인정받은 나는 잔뜩 신이 나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금의환향을 기대하며 돌아온 나를 기다리는 건, 싸한 분위기였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오늘 낮까지만 해도 활기를 띠던 공작성은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변한 분위기에 당황하던 그때, 로이드가 다가와 테르제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그의 말을 들은 테르제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코빼기도 안 보이던 놈이 이제야 나타나?”
“그뿐만이 아닙니다.”
로이드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소곤소곤, 내게는 들리지 않는 귓속말에 나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나는 그만 가도 되나?’
뭔진 몰라도 심각한 상황 같은데, 나는 여기에 있어봤자 별 도움도 되지 않을 거다.
“저는 먼저 올라가 볼게요.”
“그래, 가서 쉬거라. 그리고 딜리언, 너는 나를 따라오거라.”
“뭡니까.”
당연히 나와 함께 방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던 딜리언이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그 오만방자하고도, 유치한 행동에 부끄러운 건 나였다.
“렉스터가 왔다.”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라 딜리언을 바라보았다.
‘렉스터가 왔다고? 절대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딜리언도 처음 듣는 소식인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테르제를 향해 다시 물었다.
“확실합니까?”
“그래. 다른 손님도 왔다고 하니 시나이즈의 주인으로서 네가 맞이해야지.”
“먼저 가 계십시오. 리아 씨만 데려다주고 가겠습니다.”
“딜리언. 중요한 일이다.”
무겁게 가라앉은 테르제의 눈이 상황의 심각성을 알려주었다.
나는 재빨리 딜리언의 등을 밀었다.
“괜찮아요. 중요한 손님 같은데 일부터 먼저 처리하세요. 저도 곧장 방으로 갈게요.”
내가 걱정되는 마음은 잘 알겠으나, 그는 시나이즈의 주인이며, 제국의 하나뿐인 공작이다.
그렇기에 그 자리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야 했다.
“저는 일 잘하는 사람이 좋아요. 알겠죠?”
“그렇게 말하면 일을 하러 가는 수밖에 없네요.”
“잘하고 와요. 저는 먼저 갈게요!”
나는 응접실로 향하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홀로 계단을 올랐다.
“으스스하네.”
나는 텅 빈 복도를 보며 어깨를 쓸어내렸다.
다 같이 짠 것도 아니고, 전부 어디로 간 거야?
텅 빈 복도도 이상하고, 지금껏 꼭꼭 숨어 다니다가 갑자기 나타난 렉스터도 이상하고, 전부 이상했다.
‘딜리언이 오기 전까지 방에서 꼼짝도 하지 말아야지.’
나는 문고리를 잡았다. 동시에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잡아챘다.
“드디어 만났구나. 리아.”
낯선 손길에 깜짝 놀라 몸을 비튼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
다정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지독히도 익숙했다.
초승달처럼 길게 휘어진 눈꼬리, 웃을 때면 깊게 패는 보조개, 버릇처럼 앞머리를 만지는 손길.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처음 그 꿈을 꾼 그날 이후로, 종종 나타나 애타게 나를 부르는 그 얼굴.
어둠을 봉인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나의 연인.
“그대로여서 놀랐어?”
흰 피부도,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도, 매끄러운 입술도…….
‘아니야. 똑바로 봐. 눈이 달라.’
그 사람은 루비처럼 붉은 눈을 하고 있었어. 이 사람처럼 보랏빛 눈이 아니야.
눈 밑의 점도 생겼고, 몸집도 그 사람보다 왜소했다.
무엇보다 분위기가 달랐다.
순간, 놀라 흐려졌던 시야가 점점 밝아지자, 조금씩 다른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대로가 아니야. 달라.”
웃는 얼굴이 유독 비슷해 닮은 것처럼 보였으나, 분명 다른 사람이다.
혼잣말처럼 단호히 중얼거리자, 남자의 입술 끝에 걸려있던 미소가 연기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