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100)화 (100/143)

100화.

“저는 더 강합니다.”

“설욕전이라고 이를 단단히 갈고 계시던데…….”

“이런, 저는 기억도 못 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을 줄이야. 안타깝지만 이번에도 제게 지겠군요.”

“그거 비앙카 님 앞에서 하지 말아요.”

나는 씩 웃는 딜리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얄미워서 하극상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하긴, 딜리언 씨가 질 리가 없죠.”

“당연하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의기양양하게 웃던 딜리언이 별안간 낯빛을 바꾸었다.

“하지만 쉬운 상대는 아닌 듯하니, 동기 부여가 있으면 좋을 것 같군요. 예를 들어.”

“예를 들어……?”

“이기고 돌아오면 승리의 키스를 해준다거나?”

예상했던 그 말 그대로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말 한결같은 사람이라니까.

“아니면 온종일 손을 잡고 다닌다거나.”

“또?”

더 해보라며 판을 깔아주자 딜리언은 이때다 싶어 하고 싶었던 일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손해 볼 건 없는데?’

오히려 좋은 기회 아닌가?

딜리언이 어떤 소원을 빌든, 그럴듯한 분위기가 형성될 거다.

그럼 나는 그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제법 그럴싸한 고백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이기면 들어줄게요.”

그러니까 무조건 이겨서 돌아오라고.

* * *

딜리언과 비앙카의 대련 소식은 바람처럼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 소식에 가장 열광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기사들이었다.

시나이즈의 주인인 딜리언과 시나이즈의 검이라 불리는 비앙카의 대련은 기사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 충분했다.

그뿐이랴, 길을 가던 사용인들도 연무장을 흘끔거렸다.

인파 속에서 제일 좋은 자리에 앉은 나는 가볍게 몸을 푸는 딜리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런 일은 절대 안 할 것 같은 놈이 나선 게 신기하구나.”

세라와 나 사이에 몸을 숨긴 나단이 내게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 대신에 대련하는 거야.”

“저 여우 같은 녀석이 그냥 수락했을 리는 없고, 뭔가를 걸었지?”

“이기면 소원 들어달래.”

“그럴 줄 알았다. 딜리언 저놈이 손해 보는 일을 할 리가 없지.”

딜리언을 보며 쯧쯧, 혀를 차던 나단은 이내 세라가 챙겨온 삶은 옥수수에 신경을 쏟아부었다.

카앙, 캉-!

날카로운 파열음이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빠르게 합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대련에 나는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홀린 듯, 두 사람의 대련에 빠진 내가 그것을 본 건 우연이었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모자를 푹 눌러쓴 작은 인영이 토끼처럼 총총거리며 빠르게 움직였다.

대련에 넋이 나간 사람들은 손님이 온 줄도 모른 채 환호하고 있었다.

‘저걸 위장이라고 한 건가?’

나단을 세라에게 맡긴 후, 새로운 손님에게 다가간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작은 어깨를 두드렸다.

“여기서 뭐 해요?”

“헉!”

깜짝 놀란 단테가 펄쩍 뛰어올랐다.

“리, 리아 님?”

“도련님, 잘 지냈……?”

“쉿, 쉬잇!”

단테가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소곤소곤했다.

“이쪽으로 가요.”

단테가 이끄는 대로 풀숲에 몸을 숨긴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꼭 숨어야 해요?”

“네, 엄마 몰래 나왔거든요.”

“도련님도 전하와 그레타 백작님의 대련을 구경하러 왔어요?”

“네!”

단테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꾹꾹 눌러 담은 기대감과 흥분이 펑 하고 터져 나왔다.

“조금 전에 봤는데 너무 멋있어요!”

“저기 앞에 가서 봐요.”

“아니에요. 여기면 충분해요.”

지젤에게 들킬까 봐 걱정인지, 단테는 나무에 몸을 딱 붙여 타조처럼 목만 내밀었다.

그 옆에 자리를 잡은 나는 앞으로 흘러내리는 아이의 모자를 잡아주었다.

“도련님,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덕분에요. 참새도 기운을 차리고 가족 곁에 돌아갔어요.”

단테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리아 님은 잘 지내셨어요?”

며칠 전에 봤을 때보다 더 핼쑥해진 얼굴이 말갛게 나를 보며 웃었다.

척 봐도 고생한 얼굴이었다.

“도련님은 거짓말쟁이네요.”

“거짓말 아니에요. 첫날엔 조금 아팠지만 이젠 괜찮아요.”

얼마나 튼튼한지 보라면서 단테가 팔에 힘을 주며 내밀었다.

근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랑말랑한 살이었지만 나는 박수를 치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와, 멋진 근육이네요.”

“치, 하나도 안 멋진 거 알아요. 정말 멋있어지려면 할아버지처럼 되어야 한단 말이에요.”

테르제처럼은 너무 과하지 않나?

단테의 귀여운 얼굴에 테르제의 흉포한 몸을 떠올린 나는 진저리쳤다.

“도련님, 몸은 어디가 안 좋아요?”

“정확히는 몰라요. 머리가 아플 때도 있고, 가슴이 답답할 때도 있고, 몸에 열이 날 때도 있고, 그때그때 달라서…….”

“정해진 증상은 없어요?”

“늘 코피가 나요. 아니면 피를 토하거나.”

익숙해진 일이라서 그런 걸까. 단테의 목소리는 무섭도록 차분했다.

“그렇게 며칠을 앓으면 다시 한동안은 안 아파요.”

그 말인즉, 단테를 만나지 못한 날 동안 내내 앓아누웠다는 소리였다.

‘지젤을 밀쳐서라도 억지로 들어갔어야 했나.’

뒤늦은 후회를 하며 단테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련님, 제가 한번 봐도 될까요?”

혹시나 아이가 기분 나빠할까 봐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단테가 눈을 반짝이며 내 옆에 찰싹 붙었다.

“그날 참새처럼 저도 치료해주시는 거예요?”

“네, 맞아요.”

“하지만 의원님도 신관님도 못 고쳤는데…….”

희망보다 체념을 먼저 배운 아이의 얼굴이 어두운 색으로 물들었다.

“리아 님은 정말 대단하시지만, 참새랑 다르게 저는 힘들 거예요.”

내 능력을 높이 사면서도 단테는 자신의 병은 치료하지 못하리라 내심 단념하고 있었다.

‘병이 발병한 지 3년이라 했던가.’

희망이 사라질 시기긴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밝게 지내는 모습이 대견했다.

나는 비밀을 이야기하듯 단테의 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도련님, 그거 아세요? 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답니다.”

“정말로?”

“이따 전하 오시면 물어보세요. 제가 몇 번이나 전하 목숨을 구해줬는지 말해줄 거예요.”

“정말 리아 님이 전하를 구해주셨어요?”

딜리언보다 작고 약해 보이는 내가 그를 구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단테의 눈이 굴러떨어질 것처럼 커졌다.

“당연하죠. 그렇게 인연이 닿아서 약혼까지 했는걸요?”

첫 만남이 좀 많이 이상하긴 했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어린아이인 단테에게 그런 어른의 사정은 알려줄 필요가 없잖아?

자극적인 내용은 전부 털어버리고 순한 맛으로 꾸며낸 이야기에 감동받은 단테가 기립박수를 쳤다.

“너무 멋져요!”

“그럼 이제 믿으시겠어요?”

“네!”

단테가 상기된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합니다.”

귀여운 인사와 함께 작고 말랑한 손이 내 손에 폭 안겼다.

손이 맞닿은 그 순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해. 왜 이렇게 꽉 막힌 기분이 드는 거지?’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응당, 느껴지는 기가 있다. 형태는 다를지언정 힘차게 뛰는 기운은 같다.

하지만 단테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누가 인위적으로 막아둔 것 같아.’

처음 보는 현상에 좀 더 깊숙이 들어가려던 그때였다. 걸걸한 목소리가 내 집중력을 깨트렸다.

“그런다고 뭘 알겠느냐.”

“할아버지!”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테르제가 팔짱을 낀 채,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내게서 벗어난 단테가 바람처럼 달려가 그에게 안겼다.

“테르제 님, 오셨어요.”

“그래, 너흰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느냐, 지젤이 알면 난리를 칠 텐데.”

“쉿, 쉿. 모른 척해주세요.”

테르제의 허리에 매달린 단테가 커다란 눈망울을 깜박거렸다. 어찌나 애절한지 들어줄 수밖에 없는 눈이었다.

“그래, 그래. 내 똥강아지가 해달라는데 해줘야지.”

역시나 그 눈빛에 껌뻑 넘어간 테르제가 단테를 안아 들었다. 엉덩이를 받치는 손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네?’

자주 있는 일인지, 단테도 익숙해 보였다. 테르제의 목에 팔을 휘감는 모습이 몹시도 자연스러웠다.

“오늘 몸은 좀 어떠냐.”

“오늘은 하나도 안 아파요!”

“그것참 다행이구나.”

나는 매끄럽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고 눈을 깜박였다.

‘입꼬리가 닮았네.’

항상 딱딱한 무표정이라 잘 몰랐는데, 웃는 얼굴이 딜리언과 퍽 닮아있었다.

“가서 편히 보거라, 지젤은 이 할아비가 막아주마.”

“정말요?”

“그래.”

가문의 최고 어른인 테르제가 막아준다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잔뜩 신이 난 단테가 군중을 향해 달려갔다.

단테가 떠나고 테르제와 단둘이 남자, 그날 느낀 어색함과 묘한 긴장이 맴돌았다.

“그래서 마음은 정했느냐?”

“네.”

테르제의 앞으로 다가간 나는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당당하게 외쳤다.

“저는 딜리언 씨와 헤어질 생각 없습니다.”

“미련한 선택을 하는구나.”

지금은 그렇게 보이겠지.

아무 힘도 없는 평민이 무슨 수로 제국 최고의 가문을 상대할 수 있겠어.

아마, 내가 객기를 부리는 것처럼 보일 거다.

“테르제 님께서 반대하셔도, 저는 딜리언 씨 곁을 떠나지 않아요. 그 사람과 약속한 게 있거든요.”

그의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저주를 풀 때까지, 떠나지 않기로 분명 약속했다.

“그러니 테르제 님께서 먼저 절 받아들이는 건 어떠세요?”

“내가, 널 받아들여라?”

내 제안이 우스운지 테르제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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