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 *
흔히들 말한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세상이 뒤집히는 기분이라고.
하지만 내 세상은 여전했다.
딜리언을 좋아한다고 해서 천지개벽이 일어나지도, 세상이 핑크빛으로 물들지도, 귓가에 상투스가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아주 조금 다르게 보일 뿐이었다.
달빛에 비친 딜리언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이고,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이 유난히 다정하게 느껴지고, 맞닿은 온기가 평소보다 더 뜨겁게 느껴진다. 그뿐이었다.
“훈련할 때 뺐다고 들었는데, 안 잊고 다시 했네요.”
딜리언이 내 약지를 만지며 뿌듯하게 웃었다.
그 순간, 지금껏 위장용으로 여기던 반지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가 무슨 마음으로 내게 이 반지를 줬는지, 그리고 반지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한 번에 와닿았다.
“……누가 준 건데요. 당연히 해야죠.”
“열심히 노력한 보람이 있네요. 리아 씨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정말로 기쁜지, 딜리언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 미소를 보며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보다 더한 말도 해줄 수 있다.
너를 좋아한다고, 좋아하게 됐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깐,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꾀죄죄한 모습으로 해도 되나?’
머리도 산발이고, 옷도 대충 입었는데?
갑자기 닥쳐온 문제에 놀라 주섬주섬 머리카락을 정돈하던 그때였다.
“그런데 누구랑 같이 있었습니까?”
내 맞은편 자리가 미묘하게 흐트러진 걸 알아차린 딜리언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마치,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는 남편처럼.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을지 두려웠던 나는 냉큼 사실대로 말했다.
“테르제 님이랑 담소를 나눴어요.”
“이상한 소리 안 하던가요.”
“당연히 했죠. 딜리언 씨랑 헤어지라고 하시던걸요?”
숨겨서 뭐 하나. 신탁에 관한 이야기를 제외한 대화를 상세하게 읊어주자 딜리언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무시하세요. 들을 가치도 없는 말입니다.”
“무시 안 할 거예요.”
“그럼, 조부가 원하는 대로 저랑 헤어지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일순간, 딜리언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만약 그렇다고 답하면 펑 터질 것 같았다.
깍지를 낀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가자, 나는 타이르듯 그의 손등을 때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당당하게 테르제 님께 인정받아야죠.”
“인정이요?”
설마 내가 정면승부를 선택할 줄은 몰랐는지, 딜리언이 낯선 사람을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테르제 님과 마주칠 때마다 눈치를 보면서 살라고요? 저 그럼 말라 죽어요.”
무시하고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이번 일만큼은 당당하게 부딪쳐서 이겨내야만 했다.
나단의 말처럼 시할아버지가 될 테르제를 이겨서 당당히 딜리언을 쟁취할 차례다.
문제는 어떻게 하냐는 건데…….
“딜리언 씨, 테르제 님도 대련을 좋아하실까요?”
“그 근육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나요?”
그렇지. 테르제의 셔츠 고문을 떠올린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혹시 승부욕도 강하세요?”
“척 봐도 그래 보이지 않습니까? 시나이즈 가문 사람들은 다 똑같습니다.”
“만약, 그런 테르제 님을 제가 이긴다면……?”
“승부욕에 불타면서 대등한 존재로 보겠죠.”
좋았어. 정했다.
내가 가장 잘하는 걸로 테르제에게 인정받겠어.
운명의 아이니, 신탁의 아이니 그런 이유는 필요 없다.
나라는 존재를, 리아 델리스를 인정하게 만들겠어.
의지에 불타오르던 나는 딜리언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딜리언 씨도 테르제 님이 와서 헤어지라고 하면 절대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아요. 알겠죠?”
나는 곧 돌아올 딜리언의 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대답을 안 해요?”
“……조금 놀라서 그럽니다. 리아 씨가 절 이렇게 좋아하는지 몰랐거든요.”
“다, 당연히 좋아하죠!”
은근슬쩍 진심을 내비치자 딜리언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득달같이 달려들 줄 알았던 그는 큰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귀를 붉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나까지 얼굴에 열이 올랐다.
큼, 목을 가다듬은 나는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20분이나 더 늦었다. 딜리언답지 않은 지각이었다.
“샤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마침 이 얘기를 할 생각이었는지 딜리언이 주머니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내밀었다.
“리아 씨도 알아야 할 이야기입니다.”
딜리언이 구슬을 누르자, 삑- 소리와 함께 녹음된 음성이 재생됐다.
<렉스터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3황자와 접촉했습니다.>
<남쪽으로 향합니다.>
<시나이즈 영지를 거쳐 아레스트 영지로 향하는 걸로 예측됩니다.>
카나에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구슬 안에서 흘러나왔다.
“렉스터와 어둠은 따로 움직이고, 아레스트 영지에서 접선할 예정인가 봅니다.”
“그럼 어둠이 거기서 렉스터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요?”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해리스도 아레스트 영지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다 잡으면 되겠네요.”
신전과 시나이즈의 병력이 힘을 합하면 분명 일망타진할 수 있을 거다.
“탄신 연회가 끝나는 즉시, 아레스트 영지에 다녀올 테니 리아 씨는 여기서-.”
“네? 무슨 소리예요. 당연히 저도 가야죠!”
어둠을 제거하는 게 내 사명인데, 나를 빼고 가겠다니!
“위험합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제가 가야죠. 딜리언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딜리언과 마주치면 분명 힘을 빼앗으려 들 텐데.
“무조건 같이 가야 해요. 알겠어요?”
“……못 이기겠군요.”
강경한 내 태도에 결국 딜리언이 백기를 들었다.
그에 의기양양하게 웃던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에 딜리언에게 물었다.
“그런데 연회가 끝나고 출발하면 늦지 않을까요?”
“우린 여기서 포털을 이용할 겁니다. 하루, 이틀 차이가 날 수는 있지만 비슷하게 도착할 겁니다.”
테르제의 탄신 연회까지 앞으로 나흘.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 *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한 내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리아 씨,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딜리언의 말처럼 오늘 내 기분은 최고조였다.
딜리언과 함께 하는 식사가 굉장히 오랜만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비앙카를 막을 수 있어!’
딜리언만 있다면 분명 지옥과도 같은 훈련을 피할 수가 있을 터.
‘내가 신성력 보유자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아침부터 근육통으로 골골거리고 있을 게 뻔했다.
방긋 웃으며 수프를 떠먹던 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스산함에 흠칫 떨었다.
“리아 양, 그걸로 배가 차겠어요?”
“쿨럭!”
사레가 들려 따끔거리는 목에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연신 기침을 터트리자, 상대는 등까지 두드려주는 친절함을 발휘했다.
“조심해야지. 그러다 큰일 나요.”
간신히 속을 진정시킨 나는 싱글 웃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 비앙카 님?”
“자, 이것도 더 먹어요. 그래야 오늘도 힘내서 달리지.”
흡사 저승사자와 같은 모습을 한 비앙카가 손수 스테이크를 썰어 내 입에 밀어 넣었다.
“자, 이번엔 꼭꼭 씹어 먹어요.”
“네, 네에…….”
나는 최고급 스테이크를 고무 타이어 씹듯, 질겅질겅 씹었다.
“목 막혀요? 마실 거 줄까?”
내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잔에 물을 따르더니 손을 뻗기 좋은 위치에 내밀었다.
갑작스레 시작된 극진한 수발에 어색하게 웃은 나는 딜리언에게 눈빛을 쏘아댔다.
‘보고만 있지 말고 도와줘요!’
다행히 내가 보낸 SOS 신호를 제대로 받아낸 딜리언이 나이프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비앙카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레타 백작, 식사 시간에 이게 무슨 짓이지?”
“이런, 제가 리아 양과 함께할 생각에 무례를 저질렀군요. 죄송합니다.”
비앙카는 예상과 달리 순순히 사과했다.
“알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그래.”
“리아 양이 식사를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아 제가 도우려 합니다.”
“백작이 직접?”
“가신이 윗사람을 돕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비앙카와 딜리언이 기 싸움을 하는 와중에도 내 접시엔 음식이 산처럼 쌓이고 있었다.
“리아 양도 저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으시죠?”
나는 뺨에 닿아오는 뜨거운 눈빛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딜리언에게 눈빛을 쏘아댔다.
‘제발, 살려줘!’
즐거운 시간이 아니라 지옥의 시간이 될 게 뻔했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런, 벌써부터 의처증 증세를 보이시면 곤란합니다.”
비앙카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단단한 팔 근육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아니면, 전하께서 제 무료함을 달래주실 건지요.”
“그래.”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 리아 양을…… 네?!”
내 어깨를 토닥거리던 비앙카가 우레와 같은 비명을 지르며 내 고막을 찢었다.
“해주겠다고.”
“……정말입니까?”
“싫나?”
“싫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리아 씨 식사하게 떨어져.”
“당연히 그래야지요. 얼마 만의 대련인데.”
비앙카가 빠른 속도로 내 곁에서 떨어졌다.
얼굴은 열기로 가득했고, 흘러나온 목소리에선 미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리아 양, 우리의 즐거운 훈련은 다음으로 미뤄야겠어요. 무려, 10년 만에 하는 재대결인데 질 수는 없거든요.”
“네, 네! 그럼요. 미뤄야지요.”
“리아 양은 마음도 넓고 착하네요.”
마지막까지 내 칭찬을 아끼지 않은 비앙카가 딜리언을 향해 외쳤다.
“10년 전의 치욕! 이번엔 반드시 갚아주겠습니다!”
딜리언에게 진 전적이 있는지 비앙카의 눈이 호승심으로 활활 타올랐다.
‘그렇게 좋을까.’
대련 준비를 하겠다며 식당 밖으로 달려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저 때문에 안 해도 될 대련을 하게 됐잖아요.”
“오랜만에 몸 푼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안 그래도 몸이 근질거렸다며 딜리언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비앙카 님 강하시던데…….”
그녀를 두둔하는 내 말에 딜리언의 얼굴에 딜리언의 입매가 비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