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내 손주와 헤어져라, 안 된다. 못 한다, 이유가 뭐냐. 이걸로 싸웠는데 전부 의미 없는 짓이 돼버렸다.
“딜리언은 이 신탁에 대해서 모르니, 가서 말할 생각은 말거라.”
“왜, 숨기셨어요?”
“알면 그놈이 가만히 있겠느냐. 어디서 신전의 말 따위를 믿냐고 노발대발할 것인데.”
“그렇죠……. 그래야죠…….”
과거의 딜리언이라면 분명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의 딜리언이 이 신탁을 알게 된다면?
신전과 관련된 일이라면 질색하는 딜리언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거다.
분명 좋아 죽겠지. 합법적으로 자신을 붙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당장 식을 올리고도 남는다.
그래서 에런에게 신탁을 들었을 때도 입 한 번 뻥긋거리지 않았다.
신이 정한 운명이라든가, 신의 의지라든가 하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오로지 내 의지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신탁 때문이라고 오해하는 상황은 바라지 않았다.
“딜리언 씨에겐 언제 말할 생각이세요?”
“그럴 생각 없다. 이건 내 평생 가슴에 묻고 갈 이야기란다.”
생각보다 온순한 리아의 반응에 테르제는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얘야, 딜리언과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한다. 네가 생각해도 우리 손주 놈이 대단하겠지. 잘생겼지, 키도 크지, 돈도 많지, 능력도 좋지. 일등 신랑감 아니겠느냐?”
딜리언의 자랑을 늘어놓던 테르제의 목소리가 다시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건 그 녀석의 생사가 달린 아주 중요한 문제야.”
리아가 그 운명의 아이라는 걸 꿈에도 모르는 테르제는 세뇌를 하듯, 리아에게 끊임없이 헤어지라는 말을 반복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주마. 그 안에 정리하거라.”
10장. 파도처럼 밀려오는
테르제가 떠난 후, 정자에 홀로 남은 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운명의 아이…….”
하하,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이유로 나를 밀어낸 거였다니.
못 배워서도 아니고, 평민이라서도 아니고, 신탁의 주인이 아니어서라니.
“대단한 명문가의 아가씨가 왔어도 바로 탈락이었네.”
그리고 그 대단한 아가씨들이 탈락하는 시험에 유일하게 붙을 수 있는 사람이 나였다.
흔히들 상견례 프리패스상이라고 하지 않는가.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줄이야.”
그 자리에서 테르제에게 밝혔다면, 앞으로 공작성 생활이 편해졌을 거다. 전폭적인 지지도 받았겠지.
하지만 딜리언도 모르는 사실을 테르제에게 먼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말한다면, 그건 딜리언이 가장 먼저 들어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입으로 말이다.
“여기에 있었어요?”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성큼 다가온 딜리언이 내 옆에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꽤 깊은 곳까지 들어왔네요. 찾아오는 데 안 힘들었습니까?”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진 입매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딜리언의 등 뒤로 달빛이 은은하게 부서졌다. 요요하게 빛나는 붉은 눈이 나를 담았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나는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내가 이상했던 걸까.
딜리언이 손을 뻗었다. 뺨과 맞닿은 손이 뜨거웠다.
아니면, 내 얼굴이 뜨거운 걸까?
신이 심혈을 기울여 다듬은 조각상처럼, 혹은 영혼을 팔아 그려낸 명화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오로지 나만 바라보고 있다.
그 사실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언제 이렇게 깊이 들어와 버린 건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나가는 길이 있을까요?”
돌아가는 길이 있을까? 이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을까?
애써 무시했던 감정이 해일처럼 나를 덮쳐왔다.
이런 뜬금없는 내 말을 딜리언은 알아들은 걸까?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꼭 나가야 합니까. 저랑 같이 걸읍시다.”
“혼자 걸어야 하는 길이라면요?”
“그럼 제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덜 무섭고, 덜 외롭겠죠.”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딜리언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리아 씨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데요?”
“제가 죽기 전엔 오겠죠. 저는 인내심이 아주 긴 사람이니 잘 기다릴 겁니다.”
인내심이 길긴. 그런 걸 가질 사람이 아니면서. 그리 웃긴 이야기도 아니었는데,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헤매더라도 결국 그 길로 돌아가게 되더군요.”
“어째서요?”
딜리언이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언뜻 보이는 열기와 달리,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이.
“그건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다시 그 길이었습니다.”
나는 기쁘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딜리언 씨 말이 맞아요.”
이 감정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딜리언의 손을 붙잡았다.
“돌고 돌아도 결국 이 길뿐이네요.”
나는 이미 사랑에 빠져버렸다.
언젠지도 모를, 아주 오래전에.
* * *
바위 위에 올라선 아이나는 해가 저무는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어.’
이제 고지가 코앞이다. 조금만 더 있으면 어둠을 잡을 수 있어.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다.
뒤에서 해리스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해야겠다.”
단장의 말에 부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텐트를 쳤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나는 텅 빈 물주머니를 챙겨 근처의 호수로 향했다.
그 사이, 땅거미가 내려앉은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숲이 밤으로 덮이기 전에 야영지로 돌아가야 한다. 물을 퍼 담는 손이 점점 빨라졌다.
타박, 타박.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자, 밝은 빛이 어른거렸다.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잖아.”
횃불을 든 파비안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 모습에 아이나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내가 애야? 어련히 자기 할 일 잘하고 있겠거니 하고 넘기면 되잖아.”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전처럼 그를 밀어내거나 쫓아내진 않았다.
“낮이었으면 신경도 안 썼어. 밤이잖아. 네가 아니라 단장이 갔어도 따라왔을 거다.”
“해리스 경이 그 말 들었으면 질색했을 거야.”
징그럽다며 파비안의 뒤통수를 때리는 해리스의 모습을 떠올린 아이나가 풉, 웃음을 터트렸다.
“말하지 마. 나 혼날지도 모른다.”
“네가 물주머니 다 들고 가면 생각해볼게.”
그리하여 물주머니는 전부 파비안의 몫이 되어버렸다. 자연스럽게 횃불을 건네받은 아이나가 어서 오라며 그를 재촉했다.
건국제에서 다시 재회한 후, 데면데면한 사이였던 걸 떠올려보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그리고 이 관계 개선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바로 리아였다.
그녀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아이나와 이처럼 다시 가까이 지낼 수 있었을까?
리아가 등을 떠밀어준 덕분에 아이나를 다시 만났고, 그녀와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리아 님은 잘 지내고 계실까.”
“뭐야, 네가 왜 리아 걱정을 해.”
아이나의 까칠한 목소리가 매섭게 날아들었다. 날이 선 그 눈빛에 파비안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건 혹시 질투?
“리아 걱정은 나만 할 수 있으니까 넘보지 마라.”
그럼 그렇지. 기대한 제가 바보였다.
라이벌을 보듯, 날을 세운 아이나가 파비안의 품에서 물을 강탈했다.
‘완전히 관계를 회복하려면 아직 멀었나……. 역시 리아 님께 상담해야겠어.’
리아를 향한 경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파비안에게 리아는 큐피드와 다름이 없었다.
“성녀님, 파비안. 잠시 이리로.”
주변 기사들에게 물을 나누어준 아이나는 해리스의 부름에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둠의 이동 경로를 정리하고 있었는지 해리스의 곁에서 수정구가 반짝거렸다.
느리게 점멸하는 붉은 점을 보며 파비안이 물었다.
“사흘간 같은 위치에 머물고 있군요.”
“그래. 아레스트 영지를 벗어나지 않는 걸 보니 여기가 본거지일 확률이 높다.”
“확실히, 그 녀석이 좋아할 위치긴 합니다.”
“왜? 아레스트 신전이 있으니 피해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 신수, 아레스트가 수호하는 신전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어둠의 입장에선 피해야 하는 곳이 아닐까? 아이나의 물음에 파비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레스트 영지엔 제국 최대 암시장이 있거든.”
인신매매, 지하 경매, 노예상까지 다양한 불법이 아무런 제재 없이 행해지는 곳이 바로 아레스트 영지였다.
“거기다 아레스트 님은 속세와 담을 쌓고 사시니,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신경 쓰지 않을 확률이 높지.”
리아의 소식에 대신전으로 모두 모였던 다른 신수들과 달리 아레스트는 제 삶의 터전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엉덩이 무거운 신수를 떠올린 아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전생에서도 만난 적이 한 번밖에 없구나.’
아레스트는 나단과는 다른 성격의 은둔형 신수였다.
사람을 사랑하는 다른 신수와 달리 아레스트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기가 맞다면, 그 녀석이 위치 하나는 제대로 골랐어.”
신수가 관리하지 않는 땅, 그리고 인신매매가 성행하는 곳이다. 힘을 키우기에 제격이었다.
“이곳에 터를 잡은 게 확실하다면, 신전도 무사하진 못하겠어요.”
아이나의 낮아진 목소리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속도를 높여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