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한때는 저 얼굴이 무서웠던 적이 있다.
이제는 기억나지도 않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엔 테르제의 말이 곧 법이고 나라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백작에게 경고하십시오. 한 번만 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입 밖으로 내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테르제는 그 시절과 비교해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변했다.
더 강해졌다. 제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을 만큼.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의 혀를 잘라내도 누구도 반기를 들지 못할 만큼.
“이런 미친놈!”
“언제는 정상이었습니까.”
“기억을 잃었다더니, 누가 그딴 헛소문을 흘린 게야!”
잃긴 뭘 잃어. 3년 만에 만난 손주는 더 악독해졌으면 악독해졌지, 기억을 잃었다거나 순해졌다거나 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누가 그런답니까. 제가 기억을 잃었다고.”
“그러게 말이다. 아주 멀쩡하구나! 렉스터 이놈은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한 건지.”
쯧쯧, 테르제가 혀를 찼다.
기억을 잃었다기에,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더니 허튼 걱정이었다.
“그놈 말을 믿으십니까.”
“그래, 믿은 내가 바보지. 오기만 하거라, 아주 혼쭐을 내줄 터이니.”
“올 수 있다면 말이죠.”
장담하는데 렉스터는 오지 않을 거다. 오면 목이 날아갈 텐데 목숨 귀한 줄 알면 꼭꼭 숨어 한 방을 노리고 있겠지.
“딜리언 네 녀석도 렉스터가 날뛰게 내버려 두지 말고 깔끔하게 정리를 하란 말이야.”
이제 와서? 렉스터가 날뛰게 내버려 둔 게 누구인데.
제 조부는 참으로 모순적인 사람이다.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니, 방해나 하지 마십시오.”
“지젤에겐 내가 따로 언질을 줄 터이니, 괜히 속 시끄럽게 들쑤시지 말거라.”
“유스틴 백작이 먼저 제 걸 건드리지 않는다면, 저도 먼저 손댈 생각은 없습니다.”
“네 성정을 잘 아는 아이니 건들지 않을 것이다.”
테르제는 확신하는 듯했지만, 글쎄.
과연 지젤이 테르제의 뜻대로 가만히 있을까.
딜리언은 아니라는 데 나단의 눈썹을 걸 수 있었다.
* * *
환하게 뜬 보름달이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이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단잠에 든 사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던 지젤이 손을 뻗었다.
“단테.”
뺨을 쓰다듬는 손길에 단테가 칭얼거렸다.
“으응.”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에 짧게나마 미소가 맺혔다.
“가여운 내 아기. 엄마가 꼭 치료해줄게.”
단테의 지병은 정확한 병명은 없었다.
이유도 없이 열이 들끓고,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제국 최고라고 소문난 의사도, 신관도 아이를 치료해주지 못했다.
“역시, 그날 대신관을 만나러 가야 했어.”
리아는 친구 집에 놀러 가듯 마음껏 대신전에 발을 들이고, 에런을 만났지만 보통은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다.
대신관의 축복을 받는 것도, 치료를 받는 것도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다.
간신히 대신관과 약속을 잡았지만, 단테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수도까지 올라갈 수가 없었다.
이제는 대신관이 순회를 돌며 유스틴 영지까지 오기를 기다리는 방법뿐이었다.
이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았다.
내가 부족해서, 그래서 아이가 아픈 것만 같았다.
“엄마가 미안해.”
잠든 아들의 얼굴을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던 지젤은 소름 끼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창틀에 걸터앉은 커다란 새가 단테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붉은 안광에 스치는 음습한 기운에 지젤이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았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새가 입을 열었다.
[지젤.]
익숙한 목소리에 지젤이 눈을 키웠다.
“……렉스터?”
잡음이 섞여 있긴 하나, 렉스터가 확실했다.
“어디서 뭘 하는 거지? 전하께서 지금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기나 하냔 말이다!”
흥분한 지젤의 어깨가 위아래로 들썩였다.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우리 단테에게…….”
일그러지는 얼굴이 이내 울 것처럼 변했다.
“약은, 약은 구했어?”
그러자 새의 입에서 약병이 뚝 떨어졌다.
지젤은 다급히 바닥에 주저앉아 약병을 품에 안았다.
[전이랑 똑같이 복용해. 이번엔 확실하게 나을 거다.]
“……저, 정말로? 우리 단테, 완치할 수 있는 거야?”
[그래, 아직 몇 번 더 복용해야겠지만, 이제 곧 끝날 거다.]
그제야 지젤의 얼굴이 안도로 물들었다.
지금까지 단테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전부 렉스터가 전해준 약 덕분이었다.
처음엔 의심했지만, 약을 복용한 후 단테의 건강은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 약만 있으면, 단테도 분명 나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지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약병을 생명줄처럼 힘껏 쥐었다.
* * *
이튿날.
여독이 풀리지 않았던 나는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눈을 떴다.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한참을 침대 위에서 굴러다니던 나는 세라의 말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전하께서는 영지에 일이 생겨 어르신과 이른 아침 출타하셨습니다.”
“나갔어?”
“네.”
“그럼 나는……?”
나, 지금 적진 한가운데 던져진 거 아니야? 상어들 사이에 버려진 거 아니냐고.
“저녁식사 전에는 돌아오신다고 하십니다.”
“……함께 정원을 보러 가자더니.”
나는 입을 비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그 모습에 세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쉬우세요?”
“뭐?”
“서운해 보이셔서요.”
“……내가?”
대놓고 서운한 티를 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너무 애 같았지?”
“뭐가요?”
“자꾸 딜리언 씨한테 의존하잖아.”
“정확히 어떤…….”
“안 보이면 신경 쓰이고, 자꾸만 눈으로 좇게 되고, 괜히 뭐 하는지 궁금해지고……. 이런 거 말이야.”
낯선 곳에 와서 그런지 점점 더 딜리언에게 의존하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눈을 댕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세라와 나단은 쌍둥이처럼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역시, 너희가 봐도 이러면 안 되는 거겠지?”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별안간 세라가 눈을 빛내며 내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안 되기는요. 그래도 돼요! 사랑하는 사이엔 당연하잖아요!”
“사, 랑?”
“네! 그게 사랑이잖아요!
그러자 나단이 날개를 펼쳐 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되긴 뭐가 돼! 절대 안 돼. 리아 너는 독립성을 기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무슨 소리세요, 나단 님! 멀쩡하게 사랑하는 두 분을 갈라놓을 작정이에요?”
“그래!”
나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싸우는 둘을 보고 홀로 중얼거렸다.
“……사랑?”
거울에 비친 내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무슨 사랑?”
내가? 딜리언을? 그럴 리가.
사랑이란 보다 확실한 거라고!
안 보이면 신경 쓰이고, 보고 싶고, 다른 여자랑 있으면 화나고, 나만 봤으면 좋겠고…….
거기까지 떠올린 나는 고장이 난 로봇처럼 모든 행동을 멈췄다.
지금까지 내가 한 행동이 빠르게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내가 한 행동이랑 다를 게 뭐지……?’
아니야. 아니야! 그때 애정이었다고 정리했잖아!
황녀와 딜리언 사이를 질투했던 그날,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혼란스러운 감정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딜리언을 좋아한다. 다만, 이건 인간적인 호감이고, 애정이라고.
‘그리고 질투는 약혼한 사이에 충분히 할 수 있는 거잖아. 동고동락하는데 아무렇지 않은 게 더 이상하잖아!’
나는 애써 부정했지만,
“정들었다고 뽀뽀하는 사람은 없어요! 아니라고 말해도 마음 한구석에는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거라고요!”
세라의 촌철살인에 그대로 화장대에 이마를 들이박았다.
쾅! 소리에 세라와 나단이 싸움을 멈추고 다급히 내게 다가왔다.
“리, 리아 님?!”
“리아!”
나는 발갛게 물든 이마를 보며 픽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무 피곤해서 그래. 낯선 곳에 갇혀있다시피 하니까, 답답해서 그런 거라고.
“머리를 식혀야겠어. 산책, 산책을 가자!”
* * *
지젤이 연회장을 꾸미는 데 정신이 없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곧장 정원으로 향했다.
봄바람이 따스했다. 한껏 얇아진 옷차림에 몸이 가벼웠다.
“날 정말 좋네요. 여름도 금방이겠어요.”
“그러게, 시간 정말 빠르다.”
딜리언을 처음 만났을 때가 한겨울이었는데 이제 곧 여름을 앞두고 있다니, 기분이 생경했다.
“개인적으로 리아 님은 봄의 신부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내년까지 기다리기는 너무 힘들죠. 그러니까 여름의 신부가 좋은 거 같아요!”
“세라, 혼자서 너무 멀리 간 거 같아.”
“바닷가에서 열리는 아름다운 결혼식……. 너무 낭만적이에요…….”
세라가 꿈을 꾸듯, 황홀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실감 나는 그녀의 설명에 나는 어느새 빠져들었다.
영상이 재생되듯, 머릿속에서 한 장면이 떠올랐다.
푸른 바다와 시원한 바람에 선선히 날리는 머리카락, 꽃으로 장식된 주변과 터져 나오는 함성.
그리고 턱시도를 입은 딜리언…….
“미쳤어!”
나는 재빨리 머리를 털어냈다.
격한 내 반응을 보지 못한 것인지 세라는 눈을 빛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누가 부케를 받는 게 좋을까요? 리아 님 곁에 곧 결혼하실 분 계세요?”
“세라, 제발…….”
나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고. 한번 의식하자 자꾸만 딜리언이 떠올랐다.
입술을 잘근 씹던 나는 문득,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나단, 너 왜 이렇게 조용해?”
누구보다 먼저 소리를 질렀을 나단이 조용하다니,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