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갑자기 제가 왜 끌려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전하 말씀이 맞군요. 어른인 제가 솔선수범을 보여야 하는 법이니.”
갑작스러운 딜리언의 공격에 기분 나쁠 법도 하건만 비앙카는 오히려 활짝 웃었다.
“오랜만에 우리 둘이 오붓한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어.”
제 어깨를 감싸는 손길에 지젤이 낭패라며 입술을 씹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테르제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럼 셋이서 하는 건 어떤가. 둘을 따로따로 가르치면 너무 번거로우니, 이 기회에 함께 배우면서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할아버님 같으시면 스무 살 넘게 차이 나는 어른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평민이라고 무시하는데 잘도 친하게 지내겠습니다.”
“큼.”
내 인사를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던 테르제는 괜히 찔리는지, 헛기침했다.
“리아 씨의 예법이 그리도 거슬린다고 하니, 앞으로 식사는 따로 하겠습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강경한 딜리언의 태도에 결국, 테르제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자가 있었으니.
“델리스 양이 말을 못 하는 것도 아닌데 전하께서 너무 과하게 참견하는 게 아닌가 싶군요.”
“틈만 나면 리아 씨를 물어뜯으려는 게 보이는데, 약혼자가 돼서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지. 그리고 유스틴 백작. 지금 날 가르치려 드는 건가?”
“……아닙니다.”
역시 권력 최고다. 나는 조용해진 식탁 아래로 딜리언만 보이게 엄지를 세웠다.
테르제와 지젤을 막아낸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식사까지 따로 할 수 있게 되다니.
‘딜리언 씨, 최고!’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은 딜리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자, 이것도 먹어 봐요.”
약속한 대로 딜리언이 잘 막아준 덕분에 식사시간은 평화로웠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먹으며 저녁을 마무리하던 때였다.
비앙카가 불쑥 물었다.
“델리스 양께서는 원래 무슨 일을 했죠?”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딜리언도 막지 않았고, 나도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약초꾼이었습니다.”
“약초꾼? 그럼 약초에 대해 잘 알겠네?”
비앙카의 얼굴에 관심과 호기심, 그리고 묘한 기대감이 떠올랐다.
‘기대를 왜 하지?’
나는 의문을 느끼면서도 착실히 대답했다.
“자만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새롭게 발견된 약초가 아니라면 전부 알고 있습니다.”
내 자신만만한 대답에 턱을 매만지던 비앙카가 팔꿈치로 지젤을 찔렀다.
“지젤, 네 아들 한번 봐 달라고 해. 병을 치료해 줄지도 모르잖아.”
“팔 치워라. 그리고 어디 근본도 모르는 평민한테 우리 귀한 후계자를 맡긴단 말이냐.”
비앙카가 띄어놓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그래 봤자, 평민이 아니더냐. 그 대단하다던 의사들도 고치지 못한 걸 이자가 무슨 수로……!”
잔뜩 날이 선 눈이 나를 흘겼다.
마치 내가 세균이라도 되는 것 같은 눈초리에 기분이 나빠진 찰나였다.
탁!
식기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음이 지젤의 말꼬리를 잘랐다.
그러자 모든 시선이 딜리언에게 향했다.
“유스틴 백작. 근본도 모른다는 이유로 내 약혼자를 흉보기 전에 그대의 행실을 돌아보는 게 어떤가.”
“무슨……!”
“내가 그대의 아들에게도 똑같은 대우를 해도 상관없겠지.”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잔잔한 듯 보였으나, 그 안에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에 지젤이 찢길 것만 같았다.
“무례합니다. 전하!”
“무례라, 그토록 예의를 중시하는 자가 입을 함부로 놀리면 곤란하지.”
사납게 비틀린 입매가 지젤을 향해 이죽거렸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귀감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백작.”
덜그럭, 덜그럭. 찻잔을 든 지젤의 손이 분노로 떨렸다.
붉게 물들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에 나는 숨을 삼켰다.
‘큰일 났다. 분위기 박살 났어.’
나는 마른 입술을 연신 축이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평민이니, 근본이 없다느니, 천한 출생이라느니 하는 말을 듣게 하고 싶다면 어디 한번 계속 지껄여보든지.”
“그만하거라, 딜리언. 지젤이 너보다 작위가 낮다고는 하나, 인생의 선배다. 그리 면박을 줘서 되겠느냐?”
“선배면, 선배답게 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확실히 알려줘야죠. 입을 함부로 놀리면 어떻게 되는지.”
말을 마친 딜리언이 싱긋 웃었다. 하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나도 아는 사실을 지젤이 모를 리가.
분위기가 풀리기는커녕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전하, 이쯤 하시지요.”
결국 먼저 고개를 숙인 것은 지젤이었다.
“아들 얘기에 내가 잠시 흥분했습니다. 델리스 양,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도 괜찮아야 했다.
피부가 욱신거릴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에 나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딜리언 씨도 그만해요. 저는 괜찮으니까.”
지옥의 주둥아리가 다시 지젤을 공격하려 시동을 거는 모습에 나는 재빨리 그의 손을 붙잡았다.
“델리스 양의 말이 맞아요. 좋은 자리에서 왜 싸우고 그럽니까.”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 비앙카가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약초꾼이었으면, 꽃이나 나무, 이런 것도 잘 보겠군요?”
나는 이때다 싶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온실이나 정원을 가꾸는 것도 좋아해요.”
“리아 씨가 제일 잘하는 거죠.”
싸늘하던 딜리언이 다시 봄바람처럼 하늘거리자 다들 떨떠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내게 관심을 준 사람이 있었으니,
“정원을?”
처음으로 테르제가 흥미를 보이자 나는 허리를 세우고 당당하게 답했다.
“네,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실력이라고 자부할 수 있어요.”
겸손? 그게 뭔데. 나는 제국에서, 아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온실을 가진 에런에게 특별 과외까지 받았다고.
자신 가득한 내 말에 테르제가 턱을 문질렀다. 근육으로 꽉 찬 팔에 잠시 시선을 던졌던 나는 재빨리 그와 시선을 맞췄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는 몸이었다.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니, 궁금하군. 내일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하는데 어떠한가.”
처음으로 내게 호의를 보이는 테르제에 놀라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그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딜리언이 선수를 쳤다.
“그건 제가 하죠. 리아 씨, 제가 구경시켜드릴게요.”
“저놈이…….”
“설마, 시집살이를 시키고 그럴 생각은 아니겠지요.”
“이놈이 나를 뭐로 보고……!”
테르제와 딜리언의 사이에 끼인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 * *
“리아, 식사는 어땠어? 너를 못살게 괴롭히는 놈이 있더냐?”
기가 빨린 채로 침실에 돌아온 나는 내 주변을 빙빙 도는 나단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말도 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나는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나단과 세라에게 생생하게 전달했다.
“아마, 단테 도련님 때문일 거예요.”
“단테?”
“지젤 님께 아들이 한 분 계신데, 그분이 단테 유스틴 도련님이세요.”
“그렇구나.”
지젤이 화를 낼 만했다. 아들 욕을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엄마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세라는 논란의 중심에 있던 아이의 존재를 잘 아는지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렸다.
“그것도 그거지만 단테 도련님 상황이 썩 좋지 않거든요. 어릴 때부터 앓고 있는 지병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신다고 들었어요. 아직 이렇다 할 치료제도 못 찾았다고 하고요. 그 때문에 지젤 님께서 많이 예민하실 거예요.”
“그래서…….”
의사도 아니고, 고작 약초꾼에게 한번 보여주라고 가볍게 이야기했으니 지젤 입장에선 놀린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딜리언이 근본 없다고 받아친 걸 보면, 애 아빠가 평민인가?’
어떤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엄마인 지젤은 눈이 돌아버릴 상황이었다.
그것도 아픈 아들을 맹공격해버렸으니 말이다.
‘그런데 먼저 공격한 건 그쪽이잖아.’
지젤은 처음부터 나를 탐탁지 않아 했다.
만약 내가 귀족이었다면, 내 얼굴에 대고 그런 말을 했을까?
절대 아니겠지. 뒤에 가서 저들끼리 수군거리면 몰라도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을 거다.
‘딜리언이 내 편을 들어준 건 잘한 일이야.’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신분에 눌려 찍 소리도 못 하고 있었을 테니까.
“아무래도 지젤 님과는 부딪치지 않은 편이 좋겠어요.”
“내 생각도 그렇구나. 딜리언 앞에선 입을 다물고 있겠지만 뒤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당장 지젤 님의 일정을 알아 오겠습니다. 최대한 피하는 쪽으로 동선을 짜볼게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지젤과 부딪혀 귀찮은 일이 생길 바에야 피하는 게 나았다.
‘이제 겨우 첫날인데, 벌써부터 이렇게 피곤할 줄이야.’
아무래도 공작성에서의 일주일, 쉽지 않을 것 같았다.
* * *
리아가 나단과 세라에게 지젤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던 그때,
딜리언은 테르제에게 붙잡혀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지젤에게 그리 무안을 주면 어떡하느냐.”
“할아버님 눈에는 무안을 넘어 무시당한 제 약혼녀는 보이지도 않으십니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 않느냐.”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는 테르제의 행동에 딜리언이 비소를 흘렸다.
틀린 말이 아니라니, 올해 들은 최고의 개소리였다.
“편협한 시야를 가지신 분이 혼전임신을 한 유스틴 백작에겐 그리도 유하십니까.”
“너…….”
“애 아버지가 평민이라 했지요.”
“딜리언!”
“그리 꼭꼭 숨기고, 작위가 있는 귀족과 혼인시킨들, 유스틴 백작의 비밀이 숨겨진답니까.”
“그만하거라!”
테르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과거, 천하를 호령하던 거대한 몸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흥분으로 부푼 상체에 셔츠가 터질 것 같았다.
딜리언은 붉어진 테르제의 얼굴을 보며 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