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살다 살다 셔츠 고문을 다 보네…….’
얼이 빠진 얼굴로 테르제를 보던 나는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테르제 님. 리아 델리스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그러자 딜리언을 쏘아보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딜리언과 똑 닮은 붉은 눈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약혼했다지.”
“네, 그렇습니다.”
딜리언이 내 손을 잡으며 대답하자, 테르제의 눈빛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떼잉, 나는 너 같은 걸 손주며느리로 인정할 수 없어!’ 이런 눈빛이었다.
저기요, 저는 할아버지의 손주며느리가 될 생각이 없는데요? 이건 엄연히 계약이라고요.
차마 하지 못할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쯧.”
혀를 차는 모습도 박력이 넘쳤다.
어깨를 짓누르는 위압감이 엄청났다. 빌헬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나도 몸이 움츠러들 정도였다.
“이 할애비가 다 죽어가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여자를 데려와? 그것도 네놈 멋대로 약혼을 해?”
천하를 호령할 묵직한 소리가 어깨를 짓눌렀다.
“약혼을 했으면 이 할애비한테 제일 먼저 알렸어야지. 못난 놈!”
“지금 말하잖습니까.”
덤덤한 그 대답에 테르제가 뒷목을 잡고, 억! 소리를 냈다.
“이, 이 고얀 놈!”
“소리 지르는 거 보니, 멀쩡하십니다.”
정작 딜리언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 혼자 눈치 보기 급급했다.
‘그래, 얼마나 화가 나시겠어.’
약혼이라는 중대사를 혼자 결정한 것도 모자라, 그 상대가 근본도 모르는 평민이다.
거기다 테르제 시나이즈는 진성 귀족이다. 평민 손주며느리는 상상도 못 해봤겠지.
‘그렇다고 이걸 가짜 약혼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말했다가는 두 배, 아니 열 배로 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테르제와 딜리언의 불꽃 튀는 대치에 눈만 굴렸다.
‘아니, 할아버지 다 죽어가신다면서요? 저보다 더 건강한 것 같은데요……?’
본인 입으로 다 죽어간다고 말한 것치고는 정정했다. 너무 정정해.
당장 전쟁에 뛰어들어 장군의 목을 베어올 만큼 형형한 기세였다.
테르제가 화를 내고 딜리언이 그 화를 더 돋우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싸움에 사람들이 지쳐갈 때였다.
“아버지, 진정하세요. 또 혈압 올라갑니다. 전하도 그만 속 긁으시지요.”
어디선가 나타난 중년의 신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싸움을 중재했다.
묘하게 익숙한 얼굴에 눈가를 좁히자, 다시 불쑥 몸을 당긴 세라가 속삭였다.
“트리시오 후작님이십니다.”
트리시오? 해리스의 아버지? 그러니까 딜리언의 숙부?
눈빛으로 묻자 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도 있었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후작 혼자 왔을 리는 없고, 다 모였겠군.”
“네, 블렌트 백작을 제외한 가신들은 모두 도착했습니다.”
역시나, 렉스터는 오지 않았나 보다.
“다들 날 물어뜯을 생각에 신났겠군.”
비소를 흘리는 딜리언의 곁에서 눈을 굴리던 나는 테르제와 딱, 눈이 마주쳤다.
뒤늦게 이성을 차린 테르제가 헛기침하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편히 쉬다 가게.”
실컷 할 말 다 했으면서 이제 와서 편히 쉬라고요? 못마땅한 눈빛은 그대로면서?
귀족들의 화법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는 떨떠름한 속마음을 숨긴 채 방긋 웃으며 답했다.
“환대에 감사합니다.”
“큼, 크음.”
점잖은 내 반응이 신경 쓰이는지 테르제가 연신 목을 가다듬었다.
“그럼 저녁식사 때 뵙겠습니다.”
내게 고개를 숙인 트리시오 후작이 테르제를 부축하며 자리를 피했다.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것처럼 미소를 짓고 있던 나는 간신히 입꼬리를 내렸다. 욱신거리는 입가를 매만졌다.
“인사 한번 요란하네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 피곤했다.
“조부께서 이리 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제 불찰입니다.”
“괜찮아요.”
좀 피곤해서 그렇지, 테르제 때문에 기분이 상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너무 당연해서 그런가?’
의외로 담담한 내 자신에 놀랐다.
그리고 도리어 내가 딜리언을 달래는 상황이 되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 * *
내 침실은 딜리언의 옆방이었다.
예비부부를 배려한 것인지, 딜리언의 입김이 들어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겐 다행인 일이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겉옷을 벗던 그때,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잡았다.
“불안하면, 한방을 쓸까요?”
언제 온 것인지, 딜리언이 나를 향해 속살거렸다.
“의도가 불순한 것 같은데요.”
“제가요?”
순진무구한 척, 깜박거리는 눈이 가증스러웠다.
당장 어제만 해도 당했는데, 어디서 순수한 척이야.
나는 활짝 열린 침실 문을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손만 잡고 잔다. 이런 소리가 제일 신빙성 없는 말인 거 알죠?”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잔뜩 경계하자 딜리언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손만 잡고 잔다는 말 한 적 없는데 말이죠.”
“…….”
“그러니 신빙성 없는 말은 아닙니다. 전 다 할 생각이라.”
“진심이에요?”
“날이 갈수록 리아 씨가 좋아져서, 이젠 손을 잡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거든요.”
내 손등을 덮은 그의 손이 느릿하게 타고 올라왔다.
‘이 인간이 미쳤나? 대낮에 무슨 짓이야?’
허리를 껴안은 딜리언이 내 귓가에 닿을 듯 입술을 붙였다.
“잠시만 이러고 있죠. 보는 눈이 많습니다.”
딜리언의 가슴을 밀어내던 손이 멈칫했다.
“……우리 감시당하고 있어요?”
“우리의 약혼이 진짜인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가짜라는 걸 눈치챘을까요?”
“습관성 의심인 거죠. 제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 약혼했을 거라는 가정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들이니까요.”
나는 딜리언의 어깨에 턱을 괸 상태로 눈을 굴렸다.
활짝 열린 침실 문 밖으로 한 사용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진짜냐고.’
어쩐지, 수도의 저택에 있을 때와는 분위기나 시선이 많이 다르다 했더니, 감시를 했던 거였어?
나는 구겨지는 눈을 숨기기 위해 딜리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파혼이죠.”
“그래요?”
파혼이면, 내가 아쉬울 건 없는데?
그 감정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난 걸까. 별안간 딜리언이 내 목덜미를 물었다.
“윽! 뭐, 뭐 한 거예요!”
깜짝 놀라 그의 어깨를 후려치듯 때리자 딜리언이 고개를 들었다. 삐뚜름한 입매가 그의 기분을 보여주었다.
“너무 좋아하는데,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뭐, 문제가 돼봤자 얼마나 된다고.”
“유서 깊은 시나이즈 가문의 큰 어른을 속인 죄로 지하 감옥에 갇힐 겁니다.”
“……같이 가죠?”
“리아 씨 혼자요.”
이런 미친. 나는 딜리언을 껴안는 척하며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왜, 나만 들어가요……!”
평생 함께하겠다며. 당연히 감옥도 같이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전 공작이잖아요.”
“더러운 신분 사회, 더러운 계급 사회!”
“그러니 안 들키게 잘해봅시다.”
이를 박박 가느라 구겨진 내 얼굴을 보며 웃던 딜리언이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럼 저녁에 봐요.”
서서히 멀어지는 얼굴에 즐거움이 넘실거렸다.
“아가씨, 저도 나가 있을게요. 필요하면 불러주세요.”
묘해진 분위기에 세라가 얼굴을 붉히며 도망쳤다.
“이렇게 당할 줄이야…….”
딜리언에게 물린 목과 입술이 닿은 뺨을 하나씩 가린 채 중얼거리던 그때, 날벼락처럼 호통이 날아들었다.
“리아. 솔직히 말해. 너희, 무슨 일 있었지!”
“뭐, 뭐! 없었어!”
“지금 네 꼴을 보고 말해. 없긴 뭐가 없어.”
눈을 가느다랗게 뜬 나단이 내 주변을 돌았다. 작은 틈이라도 보이면 당장 공격할 기세였다.
재빨리 손을 내린 나는 모른 척 딴청을 부렸다.
“큼, 그보다 나단, 오늘은 조용히 있었네?”
이야기를 돌리자 눈썹을 들썩이던 나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보자마자 테르제라는 노신사가 불을 뿜어대는데 말할 틈이 어디에 있어.”
“그렇긴 해.”
나단이 흥흥, 콧방귀를 뀌었다.
“딜리언을 만나주는 걸 고맙게 여기고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그쪽 입장에선 귀족 며느리가 아니니까 마음에 안 들겠지.”
“그래도 그렇지! 네가 딜리언을 몇 번이나 살렸는데!”
침대 위를 방방 뛰어다니며 화를 내던 나단은 이내 내 어깨를 날개로 두드렸다.
“리아, 모든 로맨스에는 언제나 부모의 반대가 존재했다. 여긴 조부의 반대지만 비슷한 상황이지.”
“그렇긴 하지.”
“리아! 역경을 이겨내는 거다. 그리고 쟁취하는 거야!”
어느새 현 상황에 흠뻑 젖은 로맨스 소설광, 나단이 천장을 향해 날개를 치켜올렸다.
“할아버지를 무찌르고 사랑을, 딜리언을 쟁취하자!”
“할아버지가 악당이야? 무찌르게?”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의 마음을 사로잡자는 의미다!”
“언제는 딜리언 싫다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걱정 마라. 너는 내 조언대로만 움직이면 돼.”
나는 알 수 없는 계획을 짜는 나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장르가 로판인데 시월드도 있고 그러는 거지.
그리고 로판 국룰대로 나는 테르제를 사로잡는 거야.
그렇게 나는 헛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내 앞에 얼마나 많은 장애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