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87)화 (87/143)

87화.

짧게 맞추고 떨어지는 입맞춤에 리아의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왜, 이번엔 왜 한 건데요……!”

전조현상도 없이 시작된 입맞춤에 리아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막, 막 이렇게 예고도 없이 들어오면 안 된다고요.”

리아가 더듬거리며 딜리언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도대체 뭐에 버튼이 눌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주변을 태울 것처럼 뜨거운 눈빛에 리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전부 리아 씨 잘못이에요.”

“제가, 잘못했다고요?”

“그러게 누가 이렇게 사람 설레게 하래요?”

“네……?”

딜리언은 달싹이는 아랫입술을 엄지로 꾹 눌렀다.

놀란 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식도 올리기 전에, 심장 터져버리면 리아 씨가 책임질 거예요?”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황당한 논리에 리아가 눈을 일그러트렸다.

“터질 것 같으면 이런 짓 그만두면 되잖아요!”

“그건 싫은데.”

“그럼 그냥 확 터져버리시든지!”

“그럴까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딜리언이 성큼 다가왔다.

“그러긴 뭘 그래요!”

리아는 훌쩍 다가오는 딜리언에게 또 입술을 빼앗길까 봐 재빨리 제 입을 틀어막았다.

‘또 당할 줄 알고?’

철통방어에 기세등등하게 웃던 리아는 귓가에 느껴지는 숨결에 눈가를 움찔거렸다.

제자리에서 상체만 숙인 딜리언이 느긋하게 속삭였다.

“얼굴, 빨개졌다.”

“아, 진짜!”

리아는 팔을 마구 휘두르며 딜리언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간지러운 귀를 벅벅 문질렀다.

‘입술 닿은 것 같다고……!’

목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리아가 딜리언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이런 파렴치한!”

“파렴치한이라니요. 약혼자를 그렇게 부르는 건 옳지 않아요.”

딜리언의 헛소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입맞춤은 일종의 치료였습니다.”

귀가 맛이 갔나? 아니면 저 인간 정신머리가 맛이 간 건가?

리아가 눈을 찡그리고 물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치료는 무슨 치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젓던 리아의 말이 흐려졌다.

리아는 딜리언의 목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전보다 크기가 줄어든 저주가 확연히 눈에 띄었다.

“진짜네…….”

“정말입니까?”

당연히 개수작을 부리고 있던 딜리언은 정말로 치료가 됐다는 말에 눈을 키웠다.

아차, 싶어 재빨리 표정을 정돈했지만, 이미 리아가 본 후였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어쨌든 치료가 됐다는 말이네요. 그럼 한 번 더 할까요? 슬슬 저주를 가라앉힐 때가 됐잖아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 또한 능력. 딜리언은 저를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내였다.

“역시 저주를 푸는 방법은 키스가 분명합니다.”

그렇게 쉬운 거였으면 얼마나 좋았게.

한숨을 내쉰 리아는 딜리언의 목을 주시했다.

확실히. 딜리언의 말처럼 손으로 접촉하는 방법보단, 입술이 닿는 방법이 더 효과가 좋았다.

‘아마 호흡으로 전해진 게 아닐까?’

평소보다 빠르게 가라앉은 저주에 리아가 진지한 눈으로 딜리언의 몸 상태를 살폈다.

묘한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딜리언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났다.

“선물은 정말 고맙습니다. 매일 하고 다녀야겠어요.”

“마음에 들어요?”

“물론이죠. 지금 당장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다행이다. 리아는 불안으로 차 있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어제 낮에 보석상에 방문한 건 딜리언 씨 선물을 사러 간 거였어요.”

다 끝난 이야기를 왜 아직도 하나 싶겠지만, 리아는 아주 작은 오해라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몰랐죠?”

“네, 몰랐습니다.”

“깜짝 선물로 주고 싶어서 꼭꼭 숨긴 건데, 성공해서 다행이네요.”

실망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예상보다 더 좋아해서 다행이다.

흠이라도 날까, 커프스 버튼을 매만지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리아가 배시시 웃었다.

이 맛에 딜리언이 자꾸 선물을 주는 걸까?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알 수 없는 충족감이 몰려왔다.

“저도 리아 씨 생일은 누구보다 성대하게 치러드리겠습니다.”

이런 멋진 선물을 받았는데 조용히 넘어갈 수는 없지.

리아가 원한다면 황제의 탄신일보다 더욱 크고,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러줄 생각이었다.

“축제를 여는 것도 괜찮겠군요.”

한 달 내내 리아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제를 여는 거다.

그리고 리아가 누구의 사람인지 확실히 각인시키는 거지.

“진정해요. 제 생일은 지났어요.”

“알고 있습니다. 2월 3일이잖습니까.”

“……뒷조사했어요?”

“뒷조사라니요. 사랑하는 마음으로 리아 씨에 대한 모든 걸 알아낸 것뿐입니다.”

매끄럽게 올라간 그의 미소가 어딘지 음흉했다.

‘아니, 뒷조사 맞는 것 같은데……?’

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딜리언과 함께 온실을 벗어났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지, 새벽 1시를 알리는 시계 종 소리가 저택에 울렸다.

“그런데 이러니까 딜리언 씨에게 선물을 준 게 아니라 교환을 한 것 같네요.”

그의 생일에 도리어 선물을 받게 된 리아는 뺨을 긁적였다.

제가 준 것보다 몇 배는 더 비싸고 귀한 반지에 주눅이 들었다.

“다음엔 딜리언 씨가 깜짝 놀랄 만큼 좋은 걸 줄게요.”

무의식중에 드러난 진심에 놀란 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나 지금, 다음까지 생각한 거야?’

당연히 내년을 기약하는 말에 리아가 당황한 그 순간, 기민하게 그녀의 속마음을 눈치챈 딜리언이 퇴로를 차단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미 내년 선물을 받은 것처럼 좋아하는 딜리언을 보자 아무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년엔 더 좋은 선물로 딜리언을 놀라게 해주는 거야.’

제가 놀란 것만큼이나 말이다.

침실까지 데려다준 딜리언을 향해 인사를 건네려던 그때였다.

“내일, 시나이즈 영지에 내려갈 겁니다.”

“갑자기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그가 자리를 비운 적은 없었는데, 큰일이라도 생긴 걸까?

걱정하는 리아의 얼굴에 딜리언이 고개를 저었다.

“곧 조부의 생신이라, 한번 들러야 합니다.”

“조부요? 할아버지가 계세요?”

“네, 최근에 건강이 나빠졌다고 들었습니다만, 여전히 정정하게 살아계십니다.”

“……왜 말 안 했어요?”

처음 듣는 소식에 리아가 경악했다.

가족이라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조부가 살아있었어?

“조부와는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본 게 3년 전이라고 하니, 말 다했죠.”

서로 없는 사람 취급하며 지낸 지도 오래다.

“그런데 약혼 소식을 듣고는 영지로 내려오라고 성화라.”

약혼 소식 때문이라면 약혼자와 함께 오라는 뜻이 아닌가.

“설마, 저도 함께……?”

“네. 이번 기회에 한 번에 다 처리하죠.”

무슨, 게임 미션을 끝내는 것처럼 가볍게 말하는 딜리언에 리아가 입을 벌렸다.

“부담 가질 필요 없으세요. 신혼여행 답사 다녀온다고 생각하고 가볍게 가면 됩니다.”

“전혀 가볍지 않다고요…….”

갑자기 생긴 시댁인데 가벼울 리가 없잖아.

9장. 공작성에서 생긴 일

나는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아침부터 시끌시끌하구나.”

“3년 만에 가는 영지니까, 준비할 게 많겠지.”

기어코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시나이즈의 영지로 가는 날이.

“여행을 가기 좋은 날씨긴 하다만, 조금 뜨겁구나.”

“그러게.”

어떻게 되어먹은 날씨인지, 4월 중순인데도 햇살이 너무 강했다.

내리쬐는 태양에 눈이 부셨다.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실까?’

딜리언처럼 차가운 분일까? 아니면 엄청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사람일까?

잘은 모르지만 딜리언과 비슷한 느낌일 것 같았다.

“괜찮을까…….”

“뭐가요?”

눈앞에 그늘이 졌다. 고개를 들자 손 그늘을 만든 딜리언이 소리 없이 웃었다.

고개를 들자, 새하얀 소매 끝에 달린 커프스 버튼이 보였다.

“바로 했네요?”

“누가 준 건데요. 당연히 해야죠.”

나는 딜리언의 손을 끌어와 소매를 바라보았다.

밝은 곳에서 보자 더 영롱하게 빛나는 루비가 딜리언과 잘 어울렸다.

“예쁘네요. 잘 어울려요.”

“매일 하고 다닐 겁니다.”

내가 준 선물을 자랑하고 싶은지 늘 차려입던 재킷도 벗어 던진 딜리언은 아이처럼 들떠 보였다.

‘전 재산을 쓴 보람이 있네.’

뿌듯함도 잠시, 마차에 올라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먼 길이라 벌써 걱정이네요.”

“전처럼 포털을 이용할 테니 금방입니다. 영지에 도착해서는 마차를 타고 한 시간이면 가니, 그리 힘들지 않을 겁니다.”

딜리언의 말대로였다.

포털을 이용해 순식간에 시나이즈 영지로 진입한 우리는 다시 마차를 갈아타고, 공작성을 향해 이동했다.

“경치가 참으로 좋은 곳이구나.”

수도와는 다른 고즈넉한 풍경에 나단이 감탄을 터트렸다.

“이런 곳에서 살면 살 맛 나겠어.”

역시 크고 높은 건물보단 자연 친화적인 곳이 좋다며 나단이 입맛을 다셨다.

“리아, 다음에 여기서 살까?”

“시나이즈 성에서 신혼을 즐기는 것도 괜찮습니다.”

“아니다. 리아, 여기 별로구나. 서쪽으로 가자.”

“그럼 테리움 지방에 있는 별장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바다 앞이라 시원한 여름을 보내기 적당합니다.”

“네놈은 왜 자꾸 초를 치는 것이냐!”

“너야말로 방해하지 말고 입이나 다물어라.”

오늘도 티격태격하는 둘을 뒤로한 나는 저 멀리 보이는 공작성에 마른 입술을 축였다.

성 앞에서 마차가 멈춰선 순간, 내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리아 씨, 긴장했어요?”

“당연하죠.”

딜리언의 가족을 보는 날이다. 그것도 큰 어른!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 탓에 딜리언과 나를 반기는 사람들도, 성대한 인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이 등장했다.

“이제 왔느냐, 딜리언.”

우리의 앞에 나타난 거대한 인영에 내 머릿속은 표백제를 들이부은 듯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옆에서 세라가 조용히 속삭였다.

“테르제 시나이즈 님이십니다.”

“저분이……?”

내가 생각한 테르제 시나이즈의 이미지는 깐깐한 노신사였다. 꼬장꼬장한 어르신을 생각했다고…….

‘저 근육 뭔데. 뭐냐고…….’

자기주장이 확실한 근육이 테르제가 움직일 때마다 움찔거렸다.

빵빵한 근육에 셔츠가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저기서 조금만 더 힘을 줬다간 셔츠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