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기적의 계산법에 헛웃음이 터졌다.
“얘,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이러면 장사가 되니?”
“응. 나 잘 벌어.”
“그래…….”
잘 벌긴. 왔던 사람도 다 도망가겠다.
‘아니면 내가 호구라서 제대로 당하고 있는 건가.’
이걸 사줘? 말아? 찜찜함에 고민하던 그때였다. 딜리언이 아이에게 6골드를 내밀었다.
“방금 리아 씨가 고른 거 다 계산하지.”
“딜리언 씨?”
갑자기 벌어진 일에 당황하는 사이, 아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가 짚었던 물건을 담기 시작했다.
“반지는 소중한 거니까 지금 끼워주면 되겠다.”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가 내 왼손을 잡더니,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나무로 만든 매끈한 반지가 딱 들어맞았다.
“응? 지금?”
“응. 행운이 깃들 거야.”
행운의 반지, 뭐 그런 건가? 미신은 믿지 않지만, 해맑은 아이의 모습을 보니 차마 뺄 수가 없었다.
“고마워.”
“응, 그런데 형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네.”
아이의 말대로다. 딜리언은 내 손에 자리한 반지를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그래도 잠깐만 참아. 형한테는 다른 거 있잖아. 나중에 전해줘.”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짧은 순간이지만, 딜리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딜리언이 의심이 서린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지?”
“나는 다 보여. 눈이 좋거든.”
두 사람이 묘한 눈빛을 주고받을 동안, 나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에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둘의 대화에 소외감을 느낀 것도 잠시.
나는 가판대 위에 어지럽게 올려진 물건을 구경하다 눈가를 좁혔다.
‘뭐지, 이 기운은?’
정확히 어떤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곳을 향해 손을 뻗어 물건 더미를 헤치자, 평범한 디자인의 둥근 펜던트가 보였다.
‘특별한 건 없는데.’
세월의 흐름을 직격으로 맞았는지 펜던트는 많이 낡고, 녹이 슬어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었다.
아무래도 흉한 외관 때문에 지금까지 외면받은 듯했다.
‘나처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닐 테고 말이야.’
정확히 뭐에 쓰는 물건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런 빛을 내는 물건은 어떤 용도로든 사용자에게 득이 되기 마련이다.
‘이건 얼마든 간에 내가 가져가야겠어.’
확신하건대, 저 펜던트가 이 가판대 위에 있는 물건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펜던트를 향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시야 안으로 작은 손이 불쑥 나타나더니 펜던트를 집어 올렸다.
……?
“누나, 이게 마음에 들어?”
“응. 이건 얼마야?”
“선물로 줄게.”
선물로 준다고? 바가지를 씌우던 녀석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자, 그가 진짜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많이 샀으니까. 그리고 내가 주고 싶은 게 있다고 했잖아.”
“정말?”
농담이 아닌지, 아이는 펜던트를 곱게 포장해 내밀었다.
내가 아닌, 딜리언에게.
“자, 형아 받아.”
“난 필요 없으니까 리아 씨께 드려라.”
“갖는 게 좋을걸?”
딜리언의 거절을 다시 거절한 아이는 억지로 그의 손에 펜던트를 쥐여주었다.
“말했잖아. 나 눈 좋다고. 나중에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 거야.”
“맞아요. 딜리언 씨가 계산했으니까 딜리언 씨가 가져가야죠.”
나도 옆에서 아이의 말을 거들었다.
잘은 모르지만, 저 펜던트는 분명 소유자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거다.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신성력으로 몸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나보단 딜리언이 갖고 있는 편이 여러모로 좋았다.
“꼭 딜리언 씨가 가져야 해요.”
“리아 씨까지 그렇게 말하시면, 제가 갖도록 하죠.”
극구 사양하던 딜리언은 내 말에 얌전히 펜던트를 받아들었다.
“자, 이제 끝! 얼른 돌아가. 곧 해가 질 거야.”
돈을 벌었으니 빨리 집에 가고 싶은지, 우리를 닦달하는 손이 보기보다 매서웠다.
거의 쫓겨나다시피 길가로 나온 우리는 손을 흔드는 그를 향해 마주 손을 흔들었다.
“갑시다, 리아 씨.”
“네.”
꽤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붉게 물든 노을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아름다운 광경에 잠시 눈을 빼앗긴 그때, 뒤에서 아이가 누나, 하고 나를 불렀다.
“이번엔 성공하길 바랄게.”
“뭘?”
“누나의 운명, 사명, 숙원.”
그 순간, 천진난만하던 아이의 얼굴이 청년처럼, 혹은 노인처럼, 여러 얼굴로 섞여서 보였다.
“부디, 성공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어.”
“그게 무슨…….”
아이의 잔잔한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순식간에 골목으로 뛰어간 아이는 잡을 새도 없이 사라졌다.
고개를 돌리자, 물건이 가득하던 가판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신기루를 본 기분에 나는 텅 빈 골목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 * *
집으로 돌아온 나는 복잡한 머리에 도통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런 내가 걱정이 된 나단이 어깨에 내려앉아 물었다.
“리아, 무슨 일이 있었느냐? 왜, 선물을 제대로 못 사 온 게야?”
“응? 아냐. 선물은 제대로 샀어.”
“그럼 왜? 딜리언이 괴롭히더냐?”
“딜리언 씨가 잘도 날 괴롭히겠다.”
나를 짓궂게 놀리긴 해도, 괴롭힌 적은 없었다.
“그건 그렇지.”
“그냥 좀 이상한 아이를 만나서.”
“어떻게 이상하길래?”
“내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는 느낌이었어. 내 운명, 사명, 숙원을 말하면서 성공하길 바란다고 하더라.”
“흠, 눈이 좋은 아이인가?”
“걔도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하던데, 눈이 좋다고.”
그게, 그런 의미인가?
뛰어난 점성술사들은 미래를 보고, 과거를 본다고 한다. 하지만 평범한 아이가 그걸 볼 수 있나?
‘아니, 평범하진 않지. 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묘한 녀석이었어.’
그 때문일까, 아니면 내일이 바로 딜리언의 생일이라는 것 때문일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시계 종이 열두 번 울리며 딜리언의 생일을 알렸다.
“벌써 생일……. 선물은 어떻게 전해주지.”
언제, 어디서, 무슨 말로 축하하며 선물을 줘야 하지?
사서 고생이라는 말이 있듯, 벌써 걱정을 하기 시작한 나는 한참이나 뒤척였다.
‘어차피 잠도 안 오는데, 밤 산책이나 해야지.’
잠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킨 나는 숄을 두르고, 등불을 들었다.
목적지는 늘 그렇듯 온실이었다.
빌헬름에서 살 적의 버릇 어디 안 간다고, 마음이 복잡할 때면 나는 온실부터 찾곤 했다.
온실의 등불을 켜고, 습관처럼 잡초를 뽑던 그때였다.
“밤에 종종 나간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 여기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딜리언 씨?”
“좋은 밤입니다.”
잠잘 준비를 마친 것인지, 딜리언의 옷차림은 낮과 달리 가벼웠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여길 오면 리아 씨랑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거든요.”
“장난치지 말고요.”
“정말입니다.”
농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로 나를 헷갈리게 한 딜리언이 내 옆에 허리를 굽히고 앉았다.
“리아 씨, 새벽에 잡초 뽑으면 안 피곤해요?”
“생각 정리하는 데는 이거만 한 게 없어요.”
자꾸만 입술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푸푸, 뱉어내자 딜리언이 손수 머리카락을 떼주었다.
그 손길이 간지러워 목을 움츠렸더니 귓가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간지러워요?”
“조금? 이제 됐으니까 놓아주세요.”
“되긴요. 또 입에 붙잖아요.”
부족하다 여겼는지 아예 내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잡았다.
“편하게 해요. 잡고 있을게요.”
“괜찮아요. 다 끝났어요.”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잡초를 한데 모으고, 장갑을 벗었다.
자꾸만 목덜미를 스치는 손길이 간지러워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손바닥에 새어 나온 땀을 대충 허벅지에 문지르던 그때였다. 별안간 손이 붙잡혔다.
“그거, 아직도 끼고 있었습니까.”
정확히 왼손을 당긴 딜리언이 못마땅한 눈으로 약지를 노려보았다.
아이가 직접 끼워준 나무 반지였다.
‘아차, 빼는 걸 잊었네…….’
딜리언의 생일도 생일이지만, 수상한 아이 때문에 정신없이 보낸 탓에 반지를 빼는 것도 잊고 만 것이었다.
그 사실이 못내 거슬리는지 딜리언이 반지를 잡아당겼다.
강탈하듯, 반지를 빼가는 모습에 나는 딜리언을 흘긋 살폈다.
‘딜리언은 아이와 나의 마지막 대화를 못 들었겠지?’
그러니 반지에만 신경 쓰는 거겠지?
“약혼자 앞에서 외간 남자가 준 반지를 계속 끼고 있으면 곤란합니다.”
“남자라고 하기엔 걘 너무 어리지 않아요?”
“어리다고 성별이 가려집니까. 생물학적 남성인 것은 부정할 수 없죠.”
그의 유치한 질투에 웃음이 나왔다.
‘계속 보니까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전이었다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밀어냈을 텐데, 요즘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 모든 건 내 앞에서만 보여주는 모습이었으니까. 묘한 우월감까지 들었다.
고작 몇 시간이었으나, 손가락에 남은 자국이 선명했다.
그 흔적을 지우고 싶은지 딜리언이 연신 내 손을 매만졌다.
“있다 없으니 부족한 것 같습니까.”
“조금?”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너도 속 좀 끓어봐.’
항상 당하기만 하니, 나도 한 번쯤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딜리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잘됐군요.”
“뭐가요?”
내 놀림을 기회로 바꾼 딜리언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내 약지에 무언가를 끼우기 시작했다.
나무와는 다른 서늘한 감촉이 선명했다.
“리아 씨의 고운 손에는 그 조잡한 나무보단 이게 훨씬 잘 어울립니다.”
내 약지를 채운 반지가 달빛에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