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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84)화 (84/143)

84화.

머리부터 목까지, 심지어 귀까지 빨개진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새빨갛게 물들고 식식거리는 그 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녀는 알까.

홍시처럼 붉어진 뺨을 깨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잇자국이 남을 정도로 세게 물고 싶다는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리아의 얼굴을 눈에 새겨 넣었다.

그 묘한 눈길에 더는 참을 수 없어진 리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빨리 가서 일이나 해결하고 와요!”

“제게 맡기세요. 10분 안에 다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자신감에 가득 찬 딜리언이 밖으로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착실하게 길드를 조지는 모습을 방관하던 리아의 곁으로 데이지가 다가왔다.

“공작과 화해했나 보군.”

“큼, 네.”

차마 싸운 적이 없다곤 대답할 수가 없었다.

리아는 무표정한 데이지를 흘긋거렸다.

“할 말이 있나 보군.”

“……황녀님께서 딜리언 씨께 연심을 품고 계시는 거 알아요.”

“흠, 그래서?”

“하지만 황녀님의 마음이 어찌 됐든 지금 딜리언 씨는 저와 약혼한 사이예요. 임자가 있는 남자니, 사적으로 만나는 걸 삼가주세요.”

속에 품고 있던 말을 쏟아낸 리아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황녀가 이 일로 기분이 상해 제 뺨이라도 후려갈기면…….

‘몰라, 때리든지. 그럼 난 딜리언한테 가서 다 일러바칠 거야.’

리아는 데이지의 위압감에 짓눌릴까 봐, 눈에 힘을 주고 버텼다.

리아의 당당한 외침에 황녀가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귀여운 줄만 알았더니, 뚝심도 있군. 이건 우리 그이가 본받아야 할 텐데.”

“네?”

어리둥절한 리아의 곁으로 다가온 데이지가 품에서 펜던트를 꺼내 내밀었다.

“이걸 왜……?”

데이지는 대답 대신 펜던트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든 것은 한 남자의 초상화였다.

보통의 초상화가 그렇듯 딱딱한 무표정의 얼굴이 아닌, 활짝 웃는 얼굴이 해맑았다.

‘이게 뭐지?’

리아는 애써 당황을 숨기며 데이지 황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의미일까?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도무지 의중이 잡히지 않았다.

황녀는 도통 속을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어떤가.”

뒤늦게 초상화 속 남자에 관해 묻는 말이라는 걸 알아차린 리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처음 느낀 감정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웃는 모습이 아름다우시네요.”

“그렇지?”

은은하게 미소를 지은 데이지가 비밀을 알려주듯 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와 혼인할 남자라네.”

“……네?”

“공작한테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야.”

“네에?”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벌어지는 리아의 턱을 검지로 들어 닫아준 데이지가 후후, 웃음을 흘렸다.

“공작이 아니면 혼인을 하지 않겠다 선언한 건, 그가 절대 나와 혼인해주지 않을 걸 알기 때문에 이용한 거라네.”

“이용…….”

“내 약혼자가 평민이라, 반대가 심했거든.”

천하의 딜리언 시나이즈를 이용해? 이쪽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안 공작도 나를 이용했지.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는 자라서 말이야.”

3년간 어울려 주는 대가로 다이아 광산을 따냈으니 말이다.

‘수완이 대단한 자야.’

날강도 같던 딜리언을 떠올린 데이지가 쯧, 혀를 찼다.

다시 생각해도 그 광산은 아까웠다.

“공작과 함께 이곳을 찾은 이유는 그이에게 줄 반지를 사기 위해서였네. 나 혼자 반지를 사러 들어가면 추문에 휩싸일 게 뻔하니까 말이야.”

겸사겸사 그 광산에서 나온 다이아몬드의 품질도 확인할 겸 보석상으로 장소를 정한 것이었다.

데이지의 말이 길어질수록 제가 단단히 오해했다는 걸 깨달은 리아의 얼굴에 점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대에겐 미안하네. 나는 허울뿐인 관계인 줄 알고 공작에게 부탁한 것인데, 진지한 관계였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라네.”

“아, 아닙니다. 저야말로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푹 숙인 리아의 어깨를 데이지가 부드럽게 두드렸다.

“오해를 제공한 내 잘못이지. 그대, 이름이 리아라고 했나?”

“네, 리아 델리스입니다.”

“리아. 공작은 그대에게 아주 푹 빠져 있으니까 바람 걱정은 할 필요 없네.”

터질 것처럼 붉어진 리아의 얼굴을 본 데이지는 처음으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둘이서 예쁜 사랑 하게.”

* * *

상황이 정리되자, 황녀는 이만 돌아가겠다며 먼저 마차를 타고 떠났다.

나는 멀어지는 마차를 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민망함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혼자서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다니.

‘아니지, 애초에 슈만이 바람이라는 이상한 소리를 해서……!’

오해의 늪에 빠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나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이 고생을 했는데 잘 전해줘라.”

“……그래.”

어쨌든 그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으니,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우리 사이로 끼어든 딜리언이 한 손으로는 내 어깨를 감싸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슈만의 어깨를 밀어냈다.

“마그네슘 부족인가? 아무 때나 눈을 깜박거리는군.”

“공작, 윙크도 몰라? 애정의 표시라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못 봐줄 윙크군. 차라리 영원히 못 뜨는 쪽이 낫겠어.”

원하면 해주겠다며 검집에 손을 올리자 슈만도 질세라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사이좋게 길드 박살 낼 땐 언제고 왜 싸워요!”

“사이좋게 지낸 적 없어. 평생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마탑주와 제가 사이좋게 지내는 날이 온다면 그날은 저자의 제삿날입니다.”

팽팽한 기 싸움 속에서 먼저 손을 거둔 건 슈만이었다.

“다음부턴 내가 없는 데서 사랑싸움해라. 진짜 피곤해 죽을 것 같으니까.”

완전히 질려버린 슈만이 투덜거리며 자취를 감췄다.

눈 깜짝할 사이에 덩그러니 둘만 남자, 어색해진 나는 먼 산을 바라보았다.

“좀 걸을까요?”

“네…….”

이대로 마차에 올라타 숨 막히는 시간을 보낼 게 눈에 훤히 보였던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에서 나온 세라를 물린 딜리언이 성큼 앞서기 시작했다.

일부러 그와 거리를 둔 채 뒤를 따라가자, 자리에서 멈춰선 딜리언이 내 손을 잡았다.

“전처럼 미아가 되면 안 되니까요.”

“미아라고 하기엔 다 컸거든요. 그리고 이제 길 다 외웠어요.”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그 손을 빼지 않았다. 이 온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없으면 허전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부관님은 어디 가셨어요?”

“일이 다 끝나서 먼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도 돼요? 부관인데?”

“없는 게 낫습니다. 옆에 있으면 시끄럽게 굴 게 뻔하거든요. 있었으면 지금쯤 얼른 집으로 돌아가자고 리아 씨께 달라붙어 아양을 떨었을 겁니다.”

“설마 그 정도로……. 음, 그러게요. 그러겠어요.”

새로운 권력자의 등장이라느니, 천사 강림이라느니, 이상한 소리를 스스럼없이 하는 사람이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리고 황녀님과는 우연히 마주친 것입니다.”

“알아요. 황녀님이 딜리언 씨를 이용해서 3년간 연막 친 것까지 다 들었어요.”

제 연인 자랑을 하며 행복하게 웃던 그녀를 떠올리자 다시금 얼굴이 뜨거워졌다.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절절한 사랑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다길래 당연히 딜리언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솔직히 알맹이는 몰라도 겉모습은 심장을 부여잡을 정도로 잘생겼으니까.

“저야말로 미안합니다. 과정이 어떻든 간에 리아 씨가 오해할 만할 상황을 만들었으니까요.”

고개를 숙였던 나는 흘긋 시선을 들어 딜리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나는 짙어진 딜리언의 미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요?”

“보기 힘든 리아 씨의 질투를 봤으니까요.”

“……질투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정말?”

“정말!”

다 알면서도 나를 놀려대는 딜리언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괜히 딴청을 부리며 노점상이 즐비한 거리를 구경하던 그때였다.

천막을 치고 멋들어지게 꾸며낸 상점들 중 한 곳에서, 작은 남자아이가 자리에 앉아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얼떨결에 함께 손을 흔들던 나는 딜리언의 부름에 아이에게서 시선을 뗐다.

“저기에 뭐가 있습니까?”

“저 애랑 눈이 마주쳐서요.”

구석진 곳을 가리켰던 나는 텅 빈 자리를 보고 눈을 깜박였다.

“분명 있었는데…….”

“얘요?”

“네?”

딜리언의 부름에 틀었던 몸을 정면으로 돌리자, 아까 본 아이가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누나!”

“어, 어어. 안녕?”

얼떨결에 아이와 인사를 나누던 그때였다. 왼손에서 작고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응?”

“누나, 누나. 한 번만 보고 가!”

그 행동이 어찌나 부드럽고 자연스러운지, 손이 잡히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주고 싶은 게 있어!”

아이가 눈을 반짝였다.

그러니까 이건 물건을 주긴 하겠지만, 결국 돈은 내가 내게 하는, 고단수의 호객 행위였다.

‘나 지금 낚인 거야? 한 발만 더 가면 호갱인 거야?’

자그마한 손이 나를 잡아끌었다. 또래에 비해 작은 체구 때문일까, 이상하게 아이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형아도 가자.”

“리아 씨, 어쩔까요.”

“……한번 가봐요.”

길이 바쁜 것도 아니고, 잠깐 구경하는 것 정도야 괜찮겠지.

‘사달라고 하면, 사주지 뭐.’

아이가 바가지를 씌워봤자 얼마나 씌우겠어.

“이쪽이야.”

우리를 가판대로 이끈 아이가 두 팔을 벌려 자랑하듯 말했다.

“짜잔. 많지?”

“응, 많네.”

아이를 띄워주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고 정말 별 게 다 있었다.

위조품이긴 하나 예쁘게 세공된 액세서리부터 컵이나 그릇 같은 생활용품, 꽃병도 있고 장난감, 그리고 약까지.

통일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정리되지 않은 채 널브러진 물건들 때문에 더 그렇게 보였다.

‘얜 이 많은 걸 어떻게 들고 다니는 거지?’

순수한 궁금증과 걱정에 아이를 바라보자, 그가 왜 그러냐며 눈을 깜박였다.

“누나, 마음대로 골라봐.”

“아무거나?”

“응!”

“그러면 이거?”

내 손이 귀여운 장난감 반지에 닿자, 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건 1골드야.”

“뭐?”

1골드면 4인 가족의 한 달 식비다. 그런데 이 장난감 반지가 1골드라고?

“그럼 이건?”

“그건 2골드.”

“이건?”

“3골드!”

바가지 씌워봤자 얼마나 씌우겠냐 했더니,

아주 제대로 씌우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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