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82)화 (82/143)

82화.

슈만이 끼고 있는 반지는 심플한 육각형의 페리도트를 가공한 반지였다.

그리고 딜리언이 말한 리아의 귀걸이 또한 페리도트를 가공해 만든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슈만과 리아가 커플템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하단 소리였다.

“이런 미친…….”

“그리고 멋대로 리아 씨 불러내지 마라. 밖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으면서 자꾸 불러내는 이유를 모르겠군. 보고 싶으면 네 녀석이 저택으로 찾아와라.”

생각이 그렇게 짧냐며 딜리언이 혀를 쯧쯧 찼다. 그 태도가 은근히 속을 긁었다.

“물론 받아줄 생각은 없지만.”

리아 앞에서 순한 양처럼 굴던 남자는 어디로 갔나.

딜리언, 그는 리아가 사라진 순간을 노리고 저와 황녀의 목을 물어버린 거대한 사자였다.

이쯤 되니 슈만도 짜증이 일었다.

“그러는 공작이야말로 황녀님과 뭘 했는지 모르겠네. 우리 리아 기분이나 상하게 만들고 말이야.”

다이아 광산 때문에 만났다면 보석점이 아닌, 황궁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은가.

그리고 뭐, 딜리언 시나이즈가 황녀의 사적인 물건을 함께 사주러 왔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무언가 거래가 오간 게 분명했다.

“그건 네가 신경 쓸 게 아니다.”

“당사자도 아닌데 말해도 상관없지 않나.”

엇갈린 두 사람의 대답에 슈만이 눈을 찌푸렸다.

“친해서 리아 씨 귀에 들어갈 겁니다.”

“입막음을 확실히 하면 되지. 그대가 잘하는 것이잖나.”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짧은 설전에서 승리한 사람은 데이지였다.

“공작은 방금 쪼르르 나가버린 약혼녀에게 줄 반지를 사러 온 거다.”

“리아에게요……? 그런데 황녀님은 왜 함께 오신 겁니까?”

“아, 나도 약혼반지를 사러 왔지.”

“……네?”

이게 무슨 소리래. 슈만이 머리에 물음표를 마구 띄우자 데이지가 후후 웃음을 흘렸다.

“몰랐나? 내게 영원을 약속한 연인이 있는데.”

데이지가 행복한 목소리로 말했다.

“올해로 삼 년이 되었다네.”

삼 년, 그녀가 딜리언에게 구애한 기간과 같다.

단번에 지금 상황을 파악한 슈만이 조급히 물었다.

“설마, 공작에게 구애를 한 게 연막이었습니까? 사랑하는 이를 숨기기 위한?”

“당연하지. 나는 이런 무뚝뚝하고 차가운 인간은 취향이 아니야.”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데이지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생겼다. 역시나 티는 나지 않았다.

“내 취향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네.”

그녀는 리아가 나간 문을 흘긋 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공작의 약혼자, 토끼 같은 게 꼭 우리 그이를 보는 것 같아.”

“다람쥐입니다.”

딜리언의 반박에 그녀가 턱을 매만졌다. 그 모습이 퍽 진지해 보인다.

“흠,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 다람쥐 같은 사람이 황녀님의 장난에 깊은 상처를 받았으니 반드시 책임지고 사과하십시오.”

“책임지는 김에 내가 데려가도 되나?”

“황족 지위를 박탈당하고 싶으면 어디 한번 해보시죠.”

황족 지위 박탈뿐이겠나. 저를 죽일 것 같은 무시무시한 눈빛에 데이지가 쯧, 혀를 찼다.

“농이네. 내가 우리 그이를 두고 다른 사람을 볼 것 같아? 나는 토끼 같은 그이만 있으면 돼.”

“리아 씨가 더 귀엽습니다.”

“공작이 얼마나 진심인지는 알겠으나, 말은 똑바로 해야지. 우리 그이가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

“황녀님이야말로 시력에 문제가 있으신 듯합니다.”

“내 눈이 왜?”

“190이 넘는 거구의 사내를 토끼로 칭하는 것부터 이미 시력은 정상이 아닙니다.”

냉수로 속을 달래다 사레가 들린 슈만이 목을 움켜잡았다.

내가 뭘 들은 거지……?

“쯧, 그대랑은 말이 안 통해.”

짜증스레 고개를 저은 데이지가 슈만을 불렀다.

“들어보게, 마탑주. 우리 그이가 말이야.”

“리아 씨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서로의 연인을 자랑하는 둘의 모습에 슈만이 먼 산을 보았다.

젠장,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다.

* * *

턱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물을 훔쳐낸 나는 세면대를 꽉 붙잡았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형편없었다.

“꼴사납게 뭐 하는 짓이야.”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나자, 서서히 머리가 식었다.

그러자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지나치게 흥분했던 것도, 황녀의 앞에서 별별 소리를 다 한 것도 전부 부끄러웠다.

나는 지난 상황을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점을 찾아냈다.

‘이번 일이 그렇게까지 화를 냈어야 하는 일이었나?’

서로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계약이 있긴 하나, 그건 그저 명목상 쓴 이야기일 뿐.

당시의 나는 딜리언이 다른 여자를 만나도 괜찮다고 여겼다.

그런데 막상 그 모습을 보자 그런 생각은커녕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나도 몰랐던 내 이면이었다.

그리고 의문점 또 하나.

‘지금이 계약을 그만두기 좋은 때가 아닐까? 분명 그런데 왜 하기 싫은 걸까.’

내 입으로 파혼이라 말했지만, 실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화가 나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다.

그리고 약혼의 쓸모가 사라진 현실을 깨달았지만, 나는 여전히 꿈속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딜리언이랑 헤어지기 싫다는 거네.’

헤어지자, 헤어지자, 주문처럼 외울 땐 언제고 이젠 헤어지기 싫었다.

황녀한테 빼앗기는 건 더더욱 싫었다.

미처 몰랐지만, 나는 질투를 하고 있었던 거다.

딜리언이 평생 나만 보고 있을 거라는 대단한 착각 속에 살다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아 현실을 깨달은 격이었다.

황녀에게만 하는 질투가 아니었다. 그 누구에게도 딜리언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딜리언 옆에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걸 생각하면…….

“짜증 나 죽겠네.”

나는 머리가 복잡해지자, 다시 한번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화장이 씻겨나갔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 딜리언 좋아하나……?”

그를 향한 호감과 애정은 확실했다. 그러니 딜리언의 저주를 풀어주고 싶어 했지.

그럼 호감과 애정을 넘어서 사랑이 되었나?

잘 모르겠다. 사랑이라면 뭔가 좀 더 뜨겁게 달아오르고, 눈 앞에 별이 펑펑 터지고, 하여튼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처음 느낀 감정이 뭔지 몰라 당황했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았다.

이대로 딜리언을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을.

‘계약이라고 하나, 공식적인 약혼녀는 나야. 황녀라고 함부로 빼앗을 수는 없어.’

나는 몇 번이고 얼굴에 물을 적시며 질투와 상념을 씻어 보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잇따른 마찰에 얼굴에 붉은 기가 가득했다.

손수건으로 대충 얼굴을 훔쳐낸 후, 손을 닦아내며 밖으로 나오던 그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단검이 목을 짓눌렀다.

“얌전히 있어.”

위협적인 목소리가 나를 협박했다. 등과 목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숨을 쉬기가 불편했다.

낯선 이에게 제압당해 얼어붙은 그때, 복면을 쓴 사내들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무장강도?’

그들은 저마다 하나씩 위협적인 무기를 들고 있었다.

“대장, 이쪽은 다 처리했어.”

“여기도.”

“보석은 물론이고 돈이 될 만한 건 전부 다 쓸어 담아.”

부하에게 명령을 마친 남자가 나를 거칠게 밀어냈다.

“내가 인질인가 봐?”

“이번 녀석은 깡이 좋네. 그래, 인질이다.”

잠깐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인질이 될 건 뭐람. 나는 한층 더 깊이 들어오는 검날에 한숨을 푹 쉬었다.

“당신 말이야, 인질을 잘못 잡았어.”

“입 다물고 얌전히 따라와!”

쯧쯧, 딜리언이랑 슈만에게 걸리면 죽은 목숨일 텐데.

내 넓은 마음도 몰라주는 그는, 방 한구석에 나를 던지다시피 넣었다.

인질은 나뿐만이 아닌지 몇몇 사람들이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나는 어깨를 누르는 힘에 주저앉았다.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있던 한 여인이 눈물을 터트렸다.

“흑, 흑으윽. 우린 다 죽었어.”

“쉿, 조용해요. 성가시게 굴면 죽일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하지만, 데미카 길드잖아요. 이러나저러나 우리가 죽는다고요……!”

데미카 길드? 수도에서 악명 높은 단체인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누가 시끄럽게 질질 짜냐. 입 다물어라.”

강도의 경고에 울던 여인이 끕,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팔을 들어 우리를 위협한 동시에, 강도가 내 목걸이를 잡아당겼다.

툭, 하고 끊어진 줄에 목이 따끔거렸다.

목걸이를 끊어낸 부하가 헙, 하고 숨을 삼켰다.

“잠깐, 대장. 이거 태양의 눈물 아니야?”

“확인해봐.”

대장의 명령에 목걸이를 감정한 부하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골드다이아몬드야.”

“제일 수수해 보여서 별거 아닌 줄 알았더니, 알짜배기는 이 아가씨군.”

나를 바라보는 눈이 음흉했다.

나는 저런 눈빛을 잘 알고 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취급, 신전에서 종종 받아보던 눈빛이라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 재수 없는 일 생기겠다.’

히죽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대장이 내 어깨를 잡아챘다.

억지로 당겨진 몸이 휘청거렸다.

“아가씨는 잠시 따라와. 아무리 봐도 여기 있는 놈들이랑 급이 다른 것 같단 말이지.”

“어디 가는데요.”

“씁, 말이 많아. 그냥 얌전히 따라와.”

대장이 거칠게 나를 밀쳤다. 비틀거리며 간신히 균형을 잡은 나는 잠재운 열이 다시 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냥 확 걷어차 버릴까? 한두 군데 베이는 것쯤이야, 치료하면 그만인데.’

이자를 밀쳐내고 거리만 확보되면 활로…….

“그대, 붙잡힌 건가.”

그때, 아무도 없던 복도에 불쑥 누가 튀어나왔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사람은 뜻밖에도 황녀였다.

“뭐야, 이 여잔.”

그녀는 나와 대장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 공작이 많이 걱정하고 있다네. 이 모습을 보면 화를 많이 내겠군.”

뒤에서 길드원이 꺼지라며 위협했지만 황녀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단순히 무시가 아닌,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강철 멘탈인가.’

표정에 변화 하나 없는 얼굴은 내가 처한 상황도 잊어버릴 정도로 평온했다.

투명인간 취급에 열이 받은 길드원 중 하나가 황녀에게 손을 뻗은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팔에 손이 닿은 동시에, 화르륵 불이 붙더니 순식간에 통구이가 되어버렸다.

“허락 없이 내 몸에 손을 대다니. 무엄하다.”

고저 없는 목소리에 카리스마가 넘쳤다.

길드원들이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대장도 긴장했는지 내 어깨를 꽉 쥐고 목에 칼을 더 바짝 들이댔다.

“마법사인가?”

“정확히는 마도구지.”

당황하는 괴한들을 향해 황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반지를 낀 중지를 치켜들었다.

“…….”

“왜 그런 눈이지. 궁금해서 알려줬잖아.”

느리게 깜박거리는 커다란 눈망울이 순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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