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 *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나는 세라와 함께 중앙 광장의 시계탑으로 향했다.
“마탑주가 오면 혼쭐을 내줘야겠어요. 감히 리아 님을 기다리게 하다니.”
“진정해. 내가 5분 일찍 온 거잖아.”
오늘의 동행인은 슈만이었다.
그의 이름을 빌려 선물을 샀기 때문에 보석상까지 함께 가기로 했다.
시계탑의 바늘이 1시를 가리킨 그때, 나는 눈앞에 나타난 슈만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너 머리가 왜 그래?”
폭탄이라도 맞았는지,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그답지 않았다.
“마탑에 사는 미친개가 내 머리를 다 물어 뜯어놨어.”
마탑에 사는 미친개라면 메이뿐.
“내가 아끼는 셔츠인데. 쯧.”
머리만 뜯긴 게 아니라 옷도 엉망진창이었다.
메이가 이유 없이 슈만을 공격하진 않았을 테고.
“설마, 놀렸어?”
“당연히 놀려야지. 너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부러워 죽으려고 하더라. 가여운 녀석, 일 때문에 널 보지도 못하고.”
슈만이 눈 밑을 찍는 척하며 깐족거렸다. 내가 놀림당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나 얄미운지, 메이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네가 먼저 신경을 긁어댔네. 왜 애꿎은 애 속을 긁고 그래.”
“화내는 얼굴 웃기잖아.”
하여튼 성격 별나다니까.
“마탑주, 너무 늦습니다. 리아 님께서 기다리셨다고요.”
“리아, 이 오빠 기다렸어?”
미친개라고 불리는 메이에게 적응할 대로 적응한 슈만은 세라의 날카로운 눈빛에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
“왜 대답 안 해?”
“대답할 가치가 없어서.”
“너무하네.”
고개를 저은 나는 슈만과 함께 보석상으로 향했다.
“나단은?”
“신전에.”
더는 몸을 숨길 필요가 없어진 나단은 종종 신전에 마실을 나갔다.
오늘도 재미없는 보석을 보는 것보단 신전에서 노는 게 낫다며 쪼르르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넌 왜 온 거야? 안 귀찮아?”
슈만의 이름을 빌리긴 했으나, 대리 수령이라는 방법도 있는 마당에 굳이?
“신상이 들어왔다길래 겸사겸사 내 것도 사려고.”
슈만이 잔뜩 들뜬 얼굴로 입꼬리를 당겼다. 녹색 눈동자에 서린 광기에 세라가 소곤거렸다.
“리아 님, 마탑주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에요?”
“놀랍게도 정상이야.”
“하지만, 눈이 풀렸는걸요.”
“곧 품에 안을 보석들 생각에 살짝 돌아버린 거야. 걱정하지 마.”
하지만 세라는 도통 경계심을 풀지 못했다.
제가 경계 받는 줄도 모르고 보석상에 도착한 슈만이 이름을 말하자, 우리에게 VIP룸이 제공됐다.
“얼마나 돈을 쓴 거야?”
얼떨떨한 물음에 슈만이 조용히 내 귀에 속삭였다. 입이 떡 벌어지는 액수에 나는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나였으면 그 돈으로 광산을 샀다.”
“광산엔 관심 없어. 내가 갖고 싶은 건 완성품이니까.”
과연, 모든 걸 가진 자가 할 법한 말이었다.
“고객님, 결제하신 상품입니다.”
하얀 장갑을 낀 직원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벨벳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딜리언의 눈 색을 닮은 루비가 영롱하게 빛났다.
육각형 모양으로 세공된 커프스 버튼을 보고 만족스럽게 웃은 나는 남은 대금을 치렀다.
눈꽃의 숨결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모은 돈을 여기에 탈탈 털어 넣었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그만큼 받았으니까.’
지금 내가 차고 있는 액세서리만 팔아도 이보다 더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계산을 마친 선물을 세라에게 넘긴 나는 슈만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쇼핑 삼매경이었다.
“뭐가 더 잘 어울려?”
슈만이 두 개의 귀걸이를 번갈아 가며 귀에 가져다 댔다.
“나는 이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흠, 나는 이게 마음에 드는데.”
“그럼 그거 하든지.”
“근데 네가 골라준 것도 포기 못 하겠어.”
“어쩌라는 거야?”
“역시 두 개 다 사야겠다.”
뭐지, 이 답정너는?
황당한 건 세라도 마찬가지인지, 옆에서 ‘뭐야, 저건.’ 하며 눈으로 욕을 했다.
“너 처음부터 두 개 다 살 생각이었지?”
“당연하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한 슈만은 대기하고 있던 직원을 불렀다.
금수저의 놀라운 행보에 고개를 젓던 그때였다. 창밖으로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딜리언 씨?”
“뭐? 공작이 여기에 왔어?”
“전하께서요?”
“응, 분명 딜리언 씨인데…….”
“잘못 본 거 아니야?”
공작은 이런 곳과 거리가 멀다며 슈만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저 늠름한 뒷모습은 분명 딜리언이었다.
“내가 딜리언 씨랑 몇 달을 살았는데 뒤태 하나 못 알아볼 줄 알아?”
그런데 딜리언은 혼자가 아니었다.
‘여자잖아?’
허리까지 물결치는 짙은 녹색 머리카락과 붉은 드레스의 조합이 눈길을 끌었다.
“옆에는 누구지?”
“잠깐, 황녀잖아?”
“뭐? 황녀님이라고?”
어느새 창에 달라붙은 슈만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미친놈. 왜 저기로 들어가?”
“왜? 저기가 어딘데?”
우리와 마찬가지로 룸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나는 불안한 눈으로 슈만을 바라보았다.
불길하다, 불길해. 싸한 기운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딱딱하게 굳은 슈만이 왼손을 들어 약지를 가리켰다.
“주로 여기에 들어가는 반지를 맞추는 곳이지.”
나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커플링 혹은 약혼링.”
누군가 뒤통수를 후려친 것처럼 머리가 어질거렸다.
‘황녀랑 저기에 간다고? 연인들이 가는 공간에?’
“말도 안 돼.”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자 슈만이 답답하다며 가슴을 두드렸다.
“너 몰라?”
“뭘?”
“황녀가 공작을 3년이나 쫓아다녔잖아. 결혼하자고.”
무슨, 처음 듣는 소문에 멍청하게 입이 벌어졌다.
“그런 말, 한 번도 들은 적 없는데…….”
“당연하지. 누가 예비 마님한테 그런 소릴 하겠냐?”
사색이 된 세라를 향해 슈만이 턱짓했다.
“내 말이 틀려?”
“그, 그게.”
세라가 마른 침을 삼켰다.
함께 여기에 온 진위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황녀가 3년간 딜리언을 쫓아다닌 건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사람이랑 함께, 보석상에 왔다고? 그것도 반지를 맞추는 곳에?
이상하게 목이 콱 막혔다.
“……나한텐 일하러 간다고 했단 말이야.”
“그럼 바람피우는 새끼들이 사실대로 말하겠어?”
“바람…….”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내 몸을 세라가 받쳤다.
“이보세요, 전하께서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서 목소리를 죽인 그녀가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따라와.”
“어쩌게?”
슈만이 내 팔을 잡아끌며 룸 밖으로 나섰다.
“확인해야지. 우리가 오해했을 수도 있으니까 두 눈으로 직접 보자고.”
하지만 슈만은 오해일 리 없다고 여기는지 눈에 확신이 가득했다.
“기다려. 지금 투명화 마법을 걸 테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의 몸에 투명화 마법을 건 그는 작은 구슬을 세라와 내게 전달했다.
“내 도움 없이 투명화를 풀고 싶으면 그걸 깨.”
“그럼 우리끼리도 안 보이는 거 아니야?”
“구슬을 가지고 있는 사람끼리는 보여.”
걱정 말라며 어깨를 두드린 슈만은 딜리언이 들어간 방의 문에도 투명화 마법을 걸었다.
“들어가서 보면 좋겠지만 공작이 워낙 감이 좋아서 분명 들킬 테니까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자.”
그렇게 우리는 문 근처에 자리를 잡고 딜리언을 주시했다.
“이건 어떤가.”
“별로입니다. 제가 보기엔 이게 훨씬 낫군요.”
“흠, 이건 취향이 아닌데. 이건 어때?”
“황녀님 마음대로 하실 거면서 왜 물어보는 겁니까. 양심이라는 게 있습니까?”
티격태격 정다운 대화에 기가 막혔다.
‘지금 다른 여자랑 사이좋게 반지를 고르는 거야?’
일이 있다고 나랑 늘 먹던 점심도 거르고 나가더니, 그게 반지를 고르는 일이었냐고!
둘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들끓는 속과 달리 싸늘하게 가라앉은 내 얼굴에 세라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를 살폈다.
“리, 리아 님…….”
미안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녀를 안정시킬 상태가 아니었다.
분노로 눈이 시뻘겋게 변한 나 대신 매의 눈으로 안을 살피던 슈만이 별안간 내 팔을 두드렸다.
“어어, 일어난다. 우리도 빠지자.”
비틀거리는 나를 옆구리에 낀 슈만이 재빨리 모퉁이 뒤로 숨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어디겠어. 당연히 데이트 코스의 꽃인 카페로 가겠지.”
나는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에 이를 으득 갈았다.
“우선 증거는 확보했으니까 조금 이따 추궁을…….”
“따라간다.”
“리아, 잠깐.”
나는 슈만의 손을 뿌리치고 딜리언의 뒤를 밟았다.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보자고.’
투명화 마법이 걸려 있겠다, 거리낄 게 없어진 나는 딜리언이 사라진 곳을 향해 성큼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벽에서 뻗어져 나온 손이 내 어깨를 힘껏 밀어냈다.
그대로 힘에 떠밀린 나는 벽에 어깨를 들이박았다.
“윽.”
찌르르 울리는 통증에 신음을 터트린 순간, 내 어깨를 짓누르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리아 씨?”
고통에 눈물을 찔끔 흘리던 나는 당황한 딜리언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투명화가 풀렸나?’
그건 아니었다. 딜리언은 내 위치를 모르는지, 주변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감은 또 엄청나게 좋아서 정확히 팔과 어깨를 붙잡았다.
“리아 씨, 다쳤어요?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모습을 보여주세요. 상처를 확인해야겠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딜리언은 나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여기서 더 숨겨봤자 먹히지도 않겠네.’
나는 슈만이 걸어준 마법을 깨트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감이요. 그보다 여긴 어떻게 왔습니까.”
“그러는 딜리언 씨는 여기서 뭐 하는 건데요?”
아직 분노가 가시지 않은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하지만 딜리언은 대답을 피하며 눈물이 맺힌 내 눈가를 문질렀다.
“미안합니다. 리아 씨인 줄 몰랐어요. 멍이 들었을지도 모르니까 지금 당장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너무 당황해서 내가 신성력을 사용한다는 걸 잊은 걸까?
딜리언은 벽에 부딪힌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단단한 사내가 기껏해야 타박상이 들었을 내 어깨를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눈에 담으며 그의 손등을 토닥였다.
“괜찮아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나를 걱정하고 챙겨주는 모습에 욱했던 마음이 풀리려던 찰나였다.
“리아! 어디에 있어!”
“공작. 이만 가지.”
투명화를 풀어낸 슈만과 황녀의 등장에 복도가 얼어붙었다.
미치도록 어색한 사자 대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