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78)화 (78/143)

78화.

머리 위에서 오가는 유치한 설전에 고개를 저은 나는 메이에게 다가갔다.

“메이, 왜 안 도와주는 거야?”

“지금 누굴 응원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어.”

“나는 슈만이 나은 것 같다.”

“나는 둘 다 싫은데 슈만 자식이 더 싫으니까 차라리 공작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어.”

“그걸 꼭 응원해야 돼? 말리란 말이야…….”

여기도, 저기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 리아 씨다.”

“허, 내 동생이거든?”

멋대로 내 소유권을 주장하는 두 사람에 더는 참지 못한 나는 주먹을 들어 그들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둘 다 그만해!”

결국, 유치한 기 싸움을 하는 두 사람을 중재한 건 나였다.

* * *

우리는 저택의 2층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저택을 에워싼 봄기운은 야외에서 티타임을 즐기기에 좋았다.

나는 차갑게 식은 차를 흘끔거렸다.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챈 슈만이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공작이 없어서 아쉬워? 가지 말라고 잡을 걸 그랬나?”

“아닌데.”

“아니긴. 아쉬워 죽겠다는 얼굴인데.”

조금 전까지 내 옆에 앉아 있던 딜리언은 제발 좀 돌아와달라는 네이선의 사정에 자리를 떴다.

옆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사라진 게 어색해 흘끔거리던 것을 슈만에게 딱 들키고 말았다.

슈만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장난을 걸었다.

“아까 보니까 너희 진짜 부부 같더라.”

“응, 헛소리 금지.”

슈만의 개소리를 단번에 쳐내자 그가 큭큭 웃으며 쿠키를 베어 물었다.

“여전히 가차 없는 걸 보니까 멀쩡한데, 기분이 오락가락해?”

“향수병인가? 아니면 우울증? 갇혀만 있다 보니까 답답해서 그런 거 같은데.”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메이의 추측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빌헬름에 있던 집보다 훨씬 편하고 마음에 들어.”

갇혀있다는 말도 어폐가 있는 게, 귀찮아서 나가지 않을 뿐. 나는 내가 하고 싶을 때 마음대로 외출했다.

“그럼 다른 고민이 있겠네. 말해봐. 이 오빠가 또 한 상담 하잖아.”

나는 자신만만한 슈만을 진득이 훑었다. 그는 오늘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문득 딜리언의 생일 선물이 떠올랐다.

‘슈만에게 도움을 받으면 되지 않을까?’

“흠. 의외로 괜찮을지도.”

슈만은 꾸미는 걸 좋아하니까, 분명 도움이 될 거다.

반짝거리는 내 눈빛에 슈만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하더니, 이내 양팔로 제 가슴을 가렸다.

“뭐지, 저 눈빛? 너 설마 오빠를 그런 눈으로……!”

“메이.”

내 신호에 메이가 슈만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억!”

“슈만, 개소리 금지.”

“윽, 그래서 뭔데. 왜 그런 눈으로 훑어보는 건데.”

그를 타박하자, 슈만이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문지르며 물었다.

“곧 딜리언 씨 생일인데, 선물을 뭘 줘야 할지 모르겠어.”

“설마, 그게 고민이었어?”

메이의 황당한 기색이 묻어나오는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딜리언 시나이즈. 기어코 성공했구만.”

홀로 중얼거린 메이가 냉수를 벌컥 들이켰다.

“뭐 할 건지는 정했고?”

“브로치나 커프스 버튼으로 해줄까 하는데, 잠시만.”

슈만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세라에게 부탁해 카탈로그를 가져왔다.

“미리 봐둔 게 있긴 있는데, 어떨지 모르겠어.”

나는 딜리언의 눈을 닮은 루비로 만들어진 장식 몇 개를 손으로 짚었다.

“이런 건 어떨까?”

“색은 괜찮은데 공작은 이보다 더 화려한 게 좋을 거 같아.”

빠르게 카탈로그를 훑은 슈만은 나보다 더 진지하게 고민했다.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꾸미는 일에 언제나 진심인 그는 조금 전, 딜리언과 싸운 것도 잊고 쇼핑에 빠져들었다.

“이거랑 이거. 이 두 개가 공작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슈만이 카탈로그 한 군데를 짚자, 말려 올라간 소맷자락 아래로 새하얀 붕대가 드러났다.

상처가 터졌는지 진물이 나는 팔에 깜짝 놀란 나는 손을 뻗었다.

“너, 팔이 왜 이래?”

“아, 별거 아니야.”

내 손아귀에서 팔을 빼낸 그가 소매를 끌어내렸다.

“별거 아니긴. 진물 나잖아.”

도망치는 손을 잡아채자, 잘못 걸렸다고 생각하는지 슈만이 앞머리를 거칠게 흩트렸다.

“아, 쪽팔리게.”

슈만이 이때쯤 팔을 다친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그 상처 때문에 아이나와 슈만이 만나게 되니까.

‘그런데 왜 아직 치료가 안 됐지?’

딜리언이 손을 쳐냈을 때 유독 아파한다 했더니 이 상처 때문이었다.

“왜 치료 안 했어? 신전에 갔어야지.”

“신전? 화상 좀 입었다고 거길 왜 가.”

“화상?”

아닌데, 내가 알기론 슈만이 저주에 걸린 물건을 곁에 두다가, 미약한 저주에 걸리는 거였다.

“……어쩌다 다친 건데?”

“꼭 말해야 해? 오빠, 자존심 좀 지켜주라.”

“씁, 빨리 말해.”

“……포션 만들다가 터졌어. 하필 터진 액체가 팔에 튀어서 화상 입은 거야.”

정말로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힌 슈만이 딴청을 부리는 메이의 머리에 꿀밤을 놓았다.

“망할 동생이 엉뚱한 재료를 넣었거든.”

“큼. 그런 얘긴 왜 해.”

“리아한테 칠칠이로 찍힐 걸 생각하니 억울해서 그런다.”

“아, 미안하다고 했잖아. 네가 해야 할 일 절반도 내가 다 해주는 걸로 입 다물기로 했으면서.”

그러니까, 이번 일은 진짜로 우연한 사고라는 말이었다.

머리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내 손은 착실히 슈만을 치료했다.

“슈만, 너 최근에 새로 들인 물건 같은 거 없어?”

“들인 건 없고, 사려다가 실패한 건 있지.”

쯧, 혀를 찬 슈만이 거칠게 차를 들이켰다.

“내가 그날만 생각하면 잠이 안 와.”

“또, 또 시작이다.”

으득 이를 가는 슈만 대신 메이가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노점상에서 마음에 드는 목걸이를 발견했는데, 그걸 코앞에서 다른 사람한테 빼앗겼거든.”

“누구한테?”

“성녀.”

“뭐? 아이나?”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등장에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긴 하다. 그런데 언제 이름까지 부르는 사이가 된 거야?”

메이가 추궁하듯 물었지만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아이나가 왜……?”

“몰라, 꼭 자기가 가져가야 한다면서 냅다 채가던데?”

잠자코 메이의 말을 듣던 슈만이 눈을 왈칵 구겼다.

“날강도가 따로 없던데, 어떻게 그런 여자가 성녀지? 후, 열 받아.”

입바람으로 앞머리를 날린 슈만은 한동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나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부정적인 감정에 당혹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니, 이게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아이나가 어떻게 그걸 알고 치운 거지? 우연인가?’

하지만 우연이라기엔 너무 정확했다.

나 또한 슈만을 도와주려 그 목걸이를 애타게 찾아다녔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슈만이 그 목걸이를 사려는 순간에 나타나, 낚아챘다니.

‘역시 수상해.’

대신전으로 가지 않고 황궁에 머물면서 카시스를 구해준 것도, 지나치게 딜리언을 경계하는 것도, 서브 남주인 슈만과의 접점을 완전히 지워낸 것도.

꼭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아는 것처럼 굴지 않는가.

역시, 아이나를 만나서 확인해봐야겠어.

* * *

다음날, 나는 날이 밝자마자 곧장 대신전으로 향했다.

하지만 나를 반긴 건 아이나가 아닌, 에런이었다.

“네? 아이나가 없다고요?”

“네. 장기 임무를 나가서 한동안 만나기 힘드실 겁니다.”

이건 또 무슨 이벤트야. 당황해 어버버거리던 그때, 에런의 옆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왔다.

“예비 공작부인께선 무슨 일로 성녀님을 찾으십니까.”

까칠한 태도로 나를 대하는 파비안이었다.

쟤는 전부터 왜 나만 보면 냉기를 풀풀 흘리는 걸까?

“친구를 보러 오는 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친구?”

예상치 못한 대답인지 파비안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이나랑 친구란 말입니까?”

얼마나 당황했는지, 꼬박꼬박 성녀라고 호칭을 붙이던 그가 이름을 불렀다.

“네, 서로 친구 하기로 했어요. 무슨 문제라도?”

“아니, 아닙니다. 문제는 없습니다.”

거짓말. 아주 문제 많아 보이는데?

지진이 난 듯, 엉망으로 떨리는 눈동자가 그의 진심을 말해줬다.

유일한 소꿉친구, 그 포지션을 쭉 유지하다가 내가 등장하면서 그 관계가 부서지고 만 것이다.

‘질투 나나 보네.’

그러기에 진작에 잘할 것이지.

자신이 성녀와 이어질 수 없다는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아이나를 놓치다니.

파비안, 그는 아이나의 첫사랑이었다.

결과적으로 아이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카시스였지만, 분명 파비안에게도 승산이 있었다.

그걸 뻥 차버린 건 파비안, 그였다.

“어머, 모르셨구나. 아이나랑 저 친구 하기로 했는데. 첫.친.구.”

나만 보면 날을 세우는 파비안이 얄미워, 살짝 약을 올렸더니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첫 친구.”

“친구 하면서 서로 말도 텄는데 아이나가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저도 기뻤어요. 첫 번째 친구로서 오래오래 잘 지내보려고요.”

내 말이 이어질수록 파비안의 몸이 비틀거렸다.

어디선가 ‘크리티컬!’ 하는 알림음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나는 방긋 웃으며 파비안을 공격했다.

“아이나의 첫 번째 친구는 접니다! 저흰 소꿉친구라고요!”

“어머, 그러셨어요? 그런데 어떡해요. 아이나는 이미 마음이 뜬 것 같던데.”

거짓말이다. 아이나의 마음이 떴는지 안 떴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안 떴습니다! 저랑 아이나는 여전히……!”

“여전히?”

“여전히……. 큭!”

발끈해서 높아진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들리지 않았다.

내 공격에 처참히 발린 파비안이 이내 쓰러지고, 나는 상쾌한 얼굴로 에런을 돌아보았다.

“신전에 활기가 넘치니 너무 보기 좋네요.”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할아버지 같은 말을 했다.

“그런데 아이나는 무슨 일을 하러 간 거예요?”

“어둠의 위치를 대략 찾아냈습니다. 그 뒤를 밟는 중입니다.”

“어둠의 위치를요? 어떻게 찾은 거예요?”

아이나에게 어둠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걸까? 그녀는 성녀니까 가능할지도 몰랐다.

당연히 아이나의 힘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전하께서 말씀해주지 않으셨나요?”

“네? 어떤 얘기요?”

딜리언 씨가 왜 여기서 나오는 거지?

“전하께서 준 위치 추적기로 어둠의 뒤를 쫓을 수 있었던 겁니다.”

“네? 위치 추적기?”

어리둥절하는 내게 에런은 대신전의 계획을 알려주었다.

분신을 잡은 것부터 시작해서 위치추적기를 심은 것까지.

‘숨기던 게 이거였어?’

렉스터와 어둠을 어떻게 잡을 건지 끝까지 비밀로 하더니, 신전과 손을 잡았을 줄이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신전을 향한 뿌리 깊은 혐오는 쉽게 지워지지 않을 텐데…….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에런은 잘 아는 듯했다.

“그 증오를 흐리게 할 만큼 전하께서는 리아 님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저, 때문이라고요……?”

“네. 리아 님을 보호한다는 공통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전하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셨죠.”

에런이 내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정작 나는 아무것도 몰랐는데 말이다.

“리아 님과 전하의 도움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리고 있습니다. 감사드려요.”

“정말 잘 풀리고 있는 게 맞을까요?”

“네, 특별히 엄선한 자들로 꾸린 원정대를 보냈으니 잘할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내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지고 말았다.

실망감에 힘이 쭉 빠지던 그때, 옆에서 바스러질 듯 흐릿한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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