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그 녀석의 힘을 내가 빼앗으면, 그대는 무사할 테니까.”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그가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봐, 그대는 무사하잖아.”
내 뺨을 훔치는 다정한 손길에, 따스한 말 한마디에 나는 무너져내렸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너머로 그의 몸을 뒤덮은 검은 가시에 숨이 막혔다.
코마에게서 빼앗아와 자신이 가져버린 저주였다.
“다행이지. 그대 대신에 내가 아플 수 있어서.”
그 사람은, 나를 위해서 코마의 힘 하나를 가져와 제 몸에 심었다.
그의 희생 덕분에 코마는 약해졌고, 나는 온 힘을 쏟아부어 코마를 봉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저주를 가져감으로써, 그는 아버지께 버림받은 아이가 돼버렸다.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알고 하는 말이에요? 저주를 받은 아이를 아버지께서 봐주실 리가 없어요.”
무너져 내린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다시 태어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소멸해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단 말이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 본 적도 없다고…….”
남자가 내 어깨를 감싸자, 저주의 삿된 기운에 온몸이 저릿거렸다. 그 사실을 눈치챈 그가 몸을 물렸다.
나는 피하려는 그를 힘껏 껴안았다.
‘시간이 별로 없어.’
시간이 지날수록 저주에 잠식되어 가고 있다. 이미 얼굴의 반이 검게 물든 후였다.
“다음 생에서도 그대를 보지 못하는 건, 그래.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몇 번이나 시간을 돌려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를 구해줄 수 없다.
코마를 봉인하는 데 힘을 다 써버려서, 사랑하는 남자의 목숨을 구해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지독한 자괴감과 죄책감, 절망이 몰려들었다.
“미안해. 미안해요. 내가 부족해서, 전부 나 때문이야.”
“늘 웃는 얼굴만 보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나는 매번 그대를 울리기만 하는군.”
내 눈물을 닦아주던 그가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나를 위로해주듯이.
“그대 말처럼 이대로 소멸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가 만든 세상을 구했는데 신도 한 번쯤은 기회를 주지 않겠어?”
얼굴 곳곳에 잘게 입을 맞추던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안 주면 뭐, 내가 지옥에서라도 기어 올라와서 만나러 갈게. 끈질기게 쫓아와 그대의 마음을 얻어낸 것처럼 말이야.”
곧 떠날 것처럼, 마지막으로 하는 인사에 나는 그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가지 마. 가지 말아요.”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처럼, 눈이 세상을 뒤덮은 날 다시 만나러 올게.”
“……거짓말.”
“약속할게.”
그가 새끼손가락을 펼쳐 내밀었다. 나는 머뭇거리다 그의 손에 내 손을 엮었다.
“리아, 그대가 어디에 있든 꼭 찾으러 갈게.”
그건 내게 하는 약속인 동시에, 자신에게 하는 다짐과도 같았다.
나는 점점 숨결이 약해지는 그를 껴안고 울음을 삼켰다.
“그러니, 그대는 그저 기다리고 있어.”
“응, 응. 꼭 그럴게.”
나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와 함께하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그동안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더 바라보려는 듯이, 찰나의 순간이라도 새기려는 듯이.
그리고 다가온 마지막 순간, 이거면 됐다는 듯이 눈을 감고 미소 지었다.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그가 떠났다는 것을 알려주듯,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은 울음으로, 이내 오열로 바뀌었다.
나는 몇 날 며칠을 목 놓아 울었다.
온몸의 수분이 마르고, 탈진한 몸이 무너져 내린 순간.
그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야.”
나는 버석한 얼굴을 들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빛을 바라보았다.
그 빛 속에서 한 인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왜 그리 울고 있느냐.”
“……아버지.”
그는, 오벨러스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그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아니죠? 정말로, 소멸시키신 건, 아닐 거예요. 그렇죠?”
그건 애원에 가까웠다. 간절한 내 눈빛에 그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이야. 네겐 미안하지만, 규칙은 어겨서는 안 돼.”
그 단호한 말에 나는 무너져내렸다. 끝을 알 수 없는 절벽으로 떨어진 기분이 이런 걸까.
나는 죽은 눈을 하고 중얼거렸다.
“저를 사랑한다고 하셨잖아요. 누구보다 저를 아낀다고 하셨잖아요.”
부서질 듯, 흐릿한 목소리에 서서히 독기가 서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고, 나는 거역해서는 안 되는, 절대자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왜 그러신 거예요. 차라리 저도 데려가지 그러셨어요!”
나는 가슴을 퍽퍽 치며, 소리를 질렀다.
“차라리 제 숨도 거두어 가시란 말이에요!”
완전히 무너져버린 내 절규에 금빛 눈동자에 안타까운 빛이 서렸다.
“내 어찌 네 숨을 거두어 가겠니.”
부드럽지만, 단호한 거절이 나를 아프게 찔렀다.
그는 다정하지만 단호했고, 따스하지만 냉혹했다.
오벨러스는 결국 그 사람을 살려주지도, 내 숨을 거두어주지도 않았다.
“너는 영웅이란다. 사람들이 모두 너를 우러러볼 거야.”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랑하는 사람조차 구하지 못했는데.
“한 번만,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제발…….”
나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평범한 인간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빌고, 또 비는 것뿐이었으니까.
“……네가 이리도 애원하는데 안 된다고 할 수도 없구나.”
다정한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요?”
“그래, 네 말대로 너는 내가 가장 아끼는 아이니까.”
졌다는 듯, 미소 지은 그가 내 뺨을 적신 눈물을 닦아주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주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침내 얻은 기회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그때, 어깨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마냥 좋아하지 말거라. 이건 기회인 동시에 시험이니.”
“시험……?”
“가여운 영혼을 소멸시키진 않으마. 하지만, 이번 생에선 그 사내를 만날 수 없다. 그리고 너는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날 것이다. 모든 기억을 잃은 채.”
마주친 눈이 단호했다.
“그때마다 떠올리거라. 네 본 모습을, 네 사명을, 네가 해야 할 일을.”
오벨러스의 커다란 손이 내 눈을 가렸다.
“스스로 지켜내 보거라. 네가 사랑하는 것들을.”
의식이 흐려졌다. 서서히 멀어지던 목소리는 이내, 완전히 멎어버렸다.
* * *
멀리서 리아, 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꿈속의 연인이 나를 부르는 건지, 아니면 현실에서 부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리아 씨.”
잠에서 깨어난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걱정이 서린 딜리언의 얼굴이 보였다.
‘아직도 꿈인 걸까? 아니면 현실?’
눈을 깜박이자, 뜨거운 물기가 뺨을 따라 흘렀다. 흐르는 눈물을 훔쳐낸 딜리언이 내 이마를 짚었다.
“리아 씨, 괜찮아요? 어디 아픕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악몽이라도 꾼 겁니까?”
“……아뇨. 악몽은 아니었어요.”
“그럼?”
“……슬픈 꿈이요.”
아주, 슬픈 꿈.
끝까지 나를 걱정하다 떠나던 그 얼굴을 떠올리자, 또다시 눈물이 터졌다.
고작 꿈 때문에 왜 이러나 싶었지만,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멈추지 않았다.
“무슨 꿈이었길래 이리 서럽게 울어요.”
딜리언이 내 눈가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누가 우리 리아 씨를 울렸을까요.”
아이를 달래듯 장난스러운 물음에 나는 입술을 툭 내밀었다.
“몰라요. 기억 안 나요.”
“다른 남자 때문이면 혼낼 겁니다.”
……무슨 촉이 저렇게 좋아? 어떻게 안 거야?
“아니거든요.”
나는 몸을 홱 돌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자 뒤쫓아온 딜리언이 이불을 걷으며 자꾸 장난을 쳤다.
가라앉은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럼 나 때문에 울었으려나.”
“확신하는데 딜리언 씨는 아니에요.”
“아아, 남자긴 남자였나 보네요.”
불시에 뻗어져 나온 손이 내 뺨을 잡았다. 아프지 않게 당기는 힘에 볼 살이 죽 늘어났다.
점점 손에 힘이 실리는 게, 아무래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다.
“누굴까요, 리아 씨를 울린 남자는. 누구길래 이렇게 서럽게 울지?”
누군진 몰라도, 세상에서 존재를 지워버릴 기세였다.
분명 눈을 휘어가며 웃는데, 웃는 게 아니었다. 등 뒤로 어두운 기운이 흘러나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딜리언을 피해 몸을 굴렸다. 그런 나를 놓칠세라 딜리언이 쫓아왔다.
나는 구르고, 딜리언은 쫓아오고.
때아닌 추격전에 끼인 나단이 꽥 소리를 지르며 눈을 떴다.
“애도 아니고 둘 다 뭐 하는 거냐! 술래잡기할 거면 밖에 나가서 해!”
단단히 화가 났는지 나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가 화를 낼 만한 게, 침대를 구르던 내 팔에 맞아 깨어난 나단에게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미, 미안.”
“왜 리아 씨가 사과합니까. 눈치 없이 거기서 자고 있던 나단 잘못이지.”
“됐다. 내가 나가고 말지……가 아니라! 딜리언 네 이놈! 왜 이 방에 있는 거냐!”
뒤늦게 이상함을 눈치챈 나단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제야 나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나단의 옆에 딱 달라붙었다.
“그러게. 딜리언 씨 왜 여기에 있어요……?”
“해가 중천인데 아무도 안 일어나길래 걱정돼서 와 봤습니다.”
창가로 다가간 딜리언이 두꺼운 커튼을 걷었다. 그러자 쏟아지는 햇살이 내 눈을 공격했다.
“으.”
커튼이 쳐져 있어서 몰랐지,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이제 슬슬 하루를 시작해야죠.”
“네에…….”
나는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눈을 뜨자마자 한바탕 뛰어다닌 탓에 정신은 맑아졌지만, 머리 한구석에는 여전히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나는 딜리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무심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딜리언 씨.”
내 부름에 딜리언이 나를 바라보았다.
“말하세요.”
“…….”
막상 말을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딜리언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 그를 믿는다.
그는 저주의 당사자이며, 이번 일에 나만큼이나 깊게 관련된 사람이니까.
하지만, 모든 게 불확실한 이 정보를 말해도 될까?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정보를, 함부로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에요.”
모든 게 확실해지면 그때, 알려주자.
그 남자에 대해서도.
그 꿈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 시험에 대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