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오벨러스는 사명이라는 핑계를 대며 다시 한 번 너를 사지로 몰아넣고 있잖아. 내 말이 틀려?”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이었어.”
힘이 잔뜩 실린 대답이었으나, 흔들리는 눈까지 숨길 수 없었으니.
“시간을 돌아온 게 너의 의지였다고? 우리 솔직해지자. 네가 아니라 오벨러스의 의지였겠지.”
어둠이 안타깝다는 듯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팠다.
“네 망가진 정신과 육체는 누가 보상하지? 잃어버린 시간은? 기회를 얻은들 달라지는 게 있을까? 아니, 똑같은 길을 반복할 뿐이야.”
아이나는 아무런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나, 널 이해할 수 있는 건 나뿐이야.”
어둠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나를 향해 속삭였다. 번들거리는 자안에 비친 감정은 가여움이었다.
“네가 시간을 돌아왔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나뿐이잖아. 안 그래?”
어둠의 말대로다.
아이나는 시간을 되돌려 다시 한번 삶을 살 기회를 얻었다.
이건, 세상을 구하고 희생한 그녀에게 신이 주는 선물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했다.
이건 오벨러스의 의지니까. 신이 그렇게 만든 세상이었으니까.
사랑했던 카시스도, 신수들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때는 적이었던 딜리언도 아이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건 아이나, 그녀 혼자였다.
“넌 혼자가 아니야.”
아이나의 외로움을 알아본 건 어둠이었다. 어둠은 그녀가 돌아왔다는 걸 한 번에 알아차렸다.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의 의지를 벗어난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나를 풀어줘.”
“……풀어주면, 그다음엔 어쩔 생각이야.”
“난 말이야, 오벨러스가 만든 이 세상을 부숴버릴 거야. 그리고 다시 새롭게 만드는 거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너도, 나도, 누구도 버려지지 않는 세상을.”
어둠의 말은 모순투성이였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고? 인간들을 잡아먹으며 힘을 키우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궤변도 저런 궤변이 없다.
하지만 아이나는 고민 끝에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천천히 빠져나오는 손에 들린 건 열쇠였다.
아이나가 구멍에 열쇠를 꽂아 넣자, 어둠이 그럴 줄 알았다며 자색 눈을 휘었다.
찰칵.
끼익-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흥분한 어둠이 그녀를 재촉했다.
“아이나. 어서.”
“입 다물어. 아직 어떻게 할지 안 정했어.”
안으로 들어간 아이나는 어둠에게 박힌 성물을 하나씩 뽑아냈다.
형체가 없는 어둠을 구속할 방법은 성물을 못처럼 박아 넣어 그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것뿐이었다.
“그래, 아이나. 잘 생각했어.”
마지막 구속구를 풀어내자 크게 몸을 꿈틀거린 어둠은 끝끝내 아이나를 회유하려 들었다.
“아이나, 내 말 잘 생각해봐. 성녀의 사명이 정말로 너를 위한 일인지.”
“……지하 수로를 통해서 빠져나가. 위에 신수들이 모두 모여있으니까.”
“때가 되면 데리러 올게.”
아이나의 귀에 속살거린 어둠은 이내,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아이나는 그 광경을 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아이나는 주머니를 뒤져 수정구를 꺼내,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하의 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들렸음에도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수정구를 향해 있었다.
“그림자가 도망쳤군요.”
“에런 님.”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밝은 빛에 아이나가 고개를 들었다.
에런은 텅 빈 감옥과 그 안에 앉아 있는 아이나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계획은 성공했나요?”
“네. 눈치는 못 챈 것 같아요.”
“다행이군요.”
“제가 흔들렸다고 여긴 것 같아요. 잘하면 들키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이나는 수정구 속 붉은 점이 반짝거리며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한 후, 에런에게 넘겨주었다.
아이나는 리아가 에런과 대화하던 그때, 제게 다가온 카나에를 떠올렸다.
‘전하께서 보내신 물건입니다.’
‘이게 뭐죠?’
‘제가 만든 위치 추적기예요. 이걸 어둠의 몸에 심으면 됩니다.’
‘위치 추적기?’
‘이번 일이 성공하면, 어둠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건투를 빌겠습니다.’
아이나는 어둠을 풀어주는 과정에서 추적기를 심어 넣었다.
흥분한 어둠은 아이나가 연기를 했다는 사실도, 추적기를 심었다는 사실도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아야 할 텐데.”
“아이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분명 우리를 승리로 이끌 거예요.”
“그러면 좋겠네요.”
어차피 붙잡고 있어봤자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그럴 바에야 놓아주는 척하며 어둠이 숨어있는 곳을 알아내는 쪽이 훨씬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딜리언의 계획이었다.
“공작이 일을 도와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리아 님께서 관련이 되어 있으니 전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겠죠.”
아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때와 다르다.
아주 사소한 일들이 모이고 모여, 현재를 바꾸고 있었다.
“아이나, 어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거기에 흔들리면 안 됩니다.”
“에런 님, 걱정하실 것 없으세요. 저는 그분을 믿습니다.”
어둠은 이 고생을 절대 보상받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래, 사명을 이뤄내면 온몸이 부서지겠지. 모든 게 헛수고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나의 생각은 달랐다.
“저는 충분히 보상받았는걸요.”
비록 성녀의 의무는 그대로였지만, 신은 약속대로 리아라는 수호천사를 보내주었다.
저를 이해하고, 보듬어줄 존재를.
리아를 만났고, 에런을 만나고, 카시스를 만났다.
영영 보지 못할 거라 여겼던 인연을 다시 만났는데 이걸 어찌 희생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었다.
아이나는 에런이 내민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기사단을 모집해주세요. 준비되는 대로 바로 뒤를 쫓겠습니다.”
* * *
“아가씨,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고생했어요, 카나에 씨.”
내 호위가 끝나기 무섭게 본업으로 복귀하는 카나에를 뒤로한 나는 온실로 향했다.
한시라도 빨리 세계초를 심기 위해서였다.
나단은 모종에 큰 흥미가 없는지 먼저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정신은 오로지 세계초에 쏠려있었다.
적당한 장소에 쭈그려 앉은 나는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더러워지는 드레스에 세라가 발을 동동 굴렀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뿌리가 보이지 않도록 흙을 덮고, 물까지 다 준 후에야 나는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세라, 이만 들어, 헉!”
눈앞에 보이는 단단한 가슴팍에 깜짝 놀란 나는 무심결에 뒷걸음질 쳤다.
“깜짝 놀랐잖아요.”
벌렁거리는 심장에 가슴을 움켜쥔 나는 딜리언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왔어요?”
“리아 씨가 집에 돌아온 순간부터 곁에 있었습니다.”
정말? 나는 몰랐는데? 슬쩍 눈을 굴려 세라에게 묻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그렇게 좋습니까. 리아 씨를 기다리고 있는 저는 눈에도 안 들어올 정도로?”
분명 딜리언의 입은 웃고 있는데 마주친 눈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의 싸한 미소에 나는 무의식중에 꽃의 앞을 가로막았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제 눈이 어땠죠?”
어떻긴. 세계초를 뽑아다가 줄기를 부러뜨리고, 불질러버리고 싶어 하는 눈이었다.
“아플 정도로 따갑고 강렬한 눈빛……?”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다. 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간 정말로 그렇게 만들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리아 씨를 바라보는 제 눈빛은 언제나 뜨겁죠.”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낸 딜리언이 세계초를 향해 눈짓하며 물었다.
“그래서 저도 못 보고 지나칠 정도로 대단한 저 물건은 뭡니까?”
은근히 말에 가시가 있었다.
아무래도 외출해서 돌아온 나를 마중 나가는 그림을 기대한 모양인데, 내가 쌩하고 지나치자 속이 뒤틀린 게 분명했다.
“에런 님께서 주신 세계초예요. 구하기 힘든 건데 흔쾌히 선물로 주셨어요.”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면 딜리언이 질투 난다며 꽃을 뽑아버릴까 봐 일부러 흥분을 억누르고 덤덤히 말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딜리언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귀한 건가 봅니다.”
“그럼요. 엄청 키우기 힘든 종인데 에런 님께서 이걸 키우셨더라고요.”
“흐음.”
“스트레스에 취약해서 살짝만 잘못 건드려도 죽어버리는 녀석인데 그걸 한 송이도 아니고 열 송이 넘게 피워냈더라니까요.”
말이 길어질수록 당시, 대신전의 온실을 본 그 감각이 되살아났다.
결국, 상황도 잊고, 에런과 함께 나눈 대화를 자랑하듯 이야기하던 그때였다.
“그 사이에 많이 가까워졌나 봅니다. 친근하게 이름도 부르고, 선물도 받아오고. 그렇죠?”
“그, 그렇게 많이는 아니고…… 조금?”
질투로 무섭게 타오르는 딜리언의 눈빛에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큰일 났다. 잘못 건드렸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시선을 옮기던 나는 이내 결심했다.
“앗! 배가 너무 아파요! 먼저 들어가 볼게요!”
순식간에 장갑과 모종삽을 집어던진 나는 재빨리 온실에서 벗어났다.
‘일단, 도망이다!’
하지만 내 계획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박살이 나고 말았다.
턱, 내 어깨를 붙잡는 손에 몸이 용수철처럼 튕겨 올랐다.
그 몸짓을 도망이라 여긴 딜리언이 내 허리에 팔을 휘감았다.
“미쳤어요?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 그래요!”
나는 허리를 뒤로 젖히고 딜리언을 피해 물러났다.
“바람은 안 됩니다.”
점점 다가오는 딜리언의 얼굴을 밀어내던 나는 멈칫했다.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네?”
“엄연히 약혼한 사이인데, 제 앞에서 그렇게 행복한 얼굴로 외간 남자의 이름을 부르다니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잖아!
버럭 소리를 지르자, 딜리언도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대신관은 200살이 넘었습니다. 제가 이만할 때도 할아버지였단 말입니다.”
“아니, 그걸 누가 몰라요! 저도 잘 알거든요!”
“얼굴만 보고 이십 대 중반이라고 생각할까 봐 조마조마합니다.”
정말로 내가 넘어갈까 봐 걱정인지, 딜리언의 눈에 미약한 질투가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