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71)화 (71/143)

71화.

“작고 보잘것없던, 그 덩어리가 저주의 시초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라 이르셨다. 이 아이 또한 아버지가 창조한 생명. 내가 발견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다.

나는 그것을 거두어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름을 가진 녀석은 게걸스럽게 모든 것을 삼켰고 점점 크기를 키워갔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는 오벨러스, 이 문헌대로라면 어둠은 신의 실패한 창조물이었다.

“모든 걸 탐욕스럽게 삼키던 어둠은 이내 힘을 갖게 됐다고 합니다.”

빠르게 종이를 넘긴 에런이 한 부분을 가리켰다.

“하나는 제 그림자를 조각내 분신을 만들어내는 능력, 또 하나는 생명을 삼키는 능력입니다.”

이로써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딜리언이 떠올랐으니까.

“대신관님, 말씀드릴 게 있어요. 딜리언 씨가 걸린 저주가 어둠의 두 번째 힘이에요.”

탐욕스럽게 삼키는 힘,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공허’.

어둠의 두 번째 힘은 딜리언이 가진 게 확실했다.

“어둠이 소멸하면, 딜리언 씨의 저주를 풀 수 있을 거예요.”

각오를 다지듯,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두 손을 맞잡은 나는 에런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반드시 그래야 해요.”

놀란 듯,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에런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리아 님께선 전하를 지키기 위해서 오신 거군요?”

지킨다라, 그런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도와주고 싶을 뿐이에요.”

남들이 다 누리는 평범한 일상을, 그도 마음껏 누리게 말이다.

“혹시 그 문헌에 어둠이 힘을 잃었다거나, 빼앗겼다는 내용도 있을까요?”

어쩌면 여기에 딜리언의 저주에 관한 단서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 기대와 달리 에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내용은 적혀있지 않습니다. 문헌이라 부르고 있긴 하나, 실은 일기와 다를 게 없어 중간중간 잘려나간 부분이 많습니다.”

에런의 말처럼 이 문헌은 후대에 남기는 정보라기보단, 의식의 흐름대로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나가 나를 향해 말했다.

“렉스터 블렌트처럼 계약을 한 게 아닐까? 공작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저주를 안고 태어났으니, 선대의 누군가가 어둠과 계약을 맺었을지도 몰라.”

아이나의 가설은 제법 그럴듯했다. 아니, 지금으로선 그게 제일 신빙성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둠은 천 년 전에 봉인당했는데 그럼, 이 계약은 천 년 전부터 이어져 온 걸까?”

어둠이 봉인당했다는 문구를 똑똑히 봤다. 에런도 직접 말하지 않았는가.

천 년 전에 어둠을 봉인했다고.

“지금처럼 중간에 깨어났을지도 모르잖아? 무려 천 년 전의 일이니까.”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렉스터와 달리 딜리언은 자의로 그 힘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둠이 모든 힘을 되찾으면 어떻게 되나요?”

중요한 건 이거다. 어둠이 완전체가 아니라면, 모든 힘을 찾고 나면 세상은 어떻게 변하는 거지?

“세상은 밤으로 뒤덮일 겁니다. 영원히 해는 뜨지 않고, 봄도 오지 않을 것이며, 차가운 겨울 속에서 삿된 저주와 마물을 피해 숨어 살아야 할 겁니다.”

어둠의 부활은 제국, 아니.

세상의 종말이었다.

“오벨러스 님께서 창조한 아름다운 세계는 더럽히려 하다니, 절대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오벨러스 덕후인 에런이 처음으로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나는 잔뜩 힘이 들어간 그의 주먹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관 님 말씀이 맞아요. 그러니 최대한 빨리 어둠을 찾아 소멸시켜야 해요.”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기회였다.

“렉스터는 제가 쏜 화살에 맞았어요. 치명상을 피하지 못했을 거예요. 어둠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거예요.”

“힘을 찾기 위해서 공작을 노릴 테니, 우린 공작을 지키면서 어둠을 쳐야겠네.”

나는 아이나의 말에 순간 멈칫했다.

전부 다 맞는 말인데, 딜리언이 보호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래도 다행이야. 사망 플래그가 사라져서.’

적어도 딜리언이 악한 괴물로 몰려 처단당할 일은 사라졌다.

“우선, 어둠에 대해선 신전 측에선 조사하고 있습니다. 렉스터 블렌트의 행방도 찾고 있고요.”

“렉스터의 행방이라면 공작가에서도 찾고 있을 거예요.”

두 집단이 쫓고 있으니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나눈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어느새 식어버린 차가 지난 시간을 알려줬다.

‘일이 풀릴 것 같으면서도 막막하네…….’

좀 더 많은 정보가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에런이 가진 문헌을 흘끔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문헌, 제가 가져가서 봐도 될까요?”

“……읽을 수 있으신가요?”

“네, 놀랍게도 읽히네요.”

“혹, 고대 언어를 배우셨다거나?”

“안타깝게도 배움과는 연이 없어서요.”

신학 학교를 졸업한 에런은 당연히 고대 언어를 읽을 수 있었지만, 나는 지독히도 가방끈이 짧은 평민이었다.

그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나도 이걸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 모르겠는걸.’

뺨이 뚫릴 듯, 강렬한 시선에 뒷목을 쓸어내린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곤란하면 거절하셔도…….”

“아닙니다. 가져가셔도 됩니다.”

흔쾌히 문헌을 내미는 그에 당황한 건 나였다.

“이렇게 쉽게 주셔도 되는 거예요?”

“원칙적으로는 안 되지만, 리아 님이 원하시는데 드려야죠. 어디 가서 말하지는 마시고, 몰래 들고 가세요.”

에런은 당당하게 불법을 저지르고 있노라 고했다.

“나도 입 꼭 다물고 있을게!”

아이나가 죽, 입을 잠그는 시늉을 했다. 순식간에 공범이 생겼다.

이거 괜찮은 거 맞아……?

* * *

“리아 님, 드릴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에런이 새로 끓여 대접한 차를 마시던 리아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네, 말씀하세요.”

편히 말하라 일렀지만, 에런의 시선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아이나에게 향했다.

“아이나, 잠시 리아 님과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들으면 안 되는 건가요?”

말없이 미소만 짓는 에런에 아이나가 몸을 일으켰다. 무언의 압박에 더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리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하지만 여전히 미련이 남은 아이나가 뒤를 흘긋거렸다.

그리고 정면으로 마주한 단호한 얼굴에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리고 밖으로 향했다.

조용히 닫히는 문에 리아가 입을 열었다.

“아이나까지 내보내시고……. 중요한 얘기인가요?”

“시나이즈 가문에 내려온 신탁에 대해서 아십니까.”

“신탁이요?”

그런 게 있어? 처음 듣는 이야기에 리아가 눈을 깜박였다.

에런은 딜리언이 태어나던 날 내려온 신탁을 떠올렸다.

시나이즈 가문에 저주받은 아이가 태어날지니, 누구도 그 저주를 풀 수 없다.

그를 구원할 자는 오직 한 사람뿐.

빛을 기다려라. 스물다섯이 되는 해 운명의 아이가 나타나 저주를 풀어줄 테니.

에런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운명의 아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게 신탁이라고요? 딜리언 씨가 태어난 날에 내려온 신탁?”

“그렇습니다.”

리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지, 눈을 왈칵 찌푸렸다.

“그럼 애초에 대신관님도, 그 누구도 딜리언 씨의 저주를 풀 수 없는 거였네요?”

그런데 왜 공작 부부는 딜리언을 신전으로 데려간 것일까.

“선대 공작 부부는 이 사실을 몰랐나요?”

“그럴 리가요. 신탁이 내려오자마자 그들에게 알렸습니다. 믿고 싶지 않아 신탁조차 거부했을 뿐이죠.”

“도대체 왜…….”

독실한 신자인 그들이 신탁을 거부했다고?

그렇다는 건 신앙심보다, 체면이 더 중요했단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과연, 저주를 갖고 태어난 딜리언을 사랑해줬을까?

“딜리언 씨가 여기서 무슨 일을 당했죠?”

딜리언이 신전을, 신성력을 극도로 혐오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다.

원작에선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진실을, 지금이라면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둡게 가라앉은 에런의 얼굴에 불안이 몰려왔다.

“전하, 그러니까 딜리언은 이곳에서 세례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겐 고문이나 다름없었죠.”

“고문이요……?”

당황한 리아의 물음에 에런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딜리언처럼 신성 저항력이 큰 사람은 신전에 발을 들이는 것도 고통스럽습니다.”

그랬다. 신성이 넘쳐나는 이곳은 딜리언과 상극이었다.

자신은 왜 그 간단한 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숨도 쉬기 힘든 이곳에서 받는 세례란, 그 아이에겐 불로 몸을 지지는 고통이었을 겁니다.”

리아는 이어지는 말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선대 공작 부부는 딜리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지요.”

공작 부부는 저주에 걸린 딜리언을 두고 보지 못하고 주에 한 번은 꼬박꼬박 신전을 찾았다.

고통스러워하는 제 아들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애초에 저는 풀 수 없는 저주였습니다. 그걸 공작 부부는 인정하지 못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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