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65)화 (65/143)

65화.

* * *

“리아 씨. 좋은 아침입니다.”

“딜리언 씨도요.”

식당으로 내려가자 먼저 온 딜리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아 씨, 아침부터 굳이 힘들게 식당에 내려오실 필요 없습니다. 그럴 시간에 더 주무세요.”

딜리언은 내가 아침밥 때문에 무리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어둠 때문에 머리가 터지게 고민하느라 생긴 불면증 때문이다.

퀭한 눈 밑이 안쓰러웠는지, 딜리언이 내 눈가를 매만졌다.

처음엔 당황해서 그 손을 피했던 나지만 이 짓도 벌써 엿새째.

나는 그냥 딜리언이 맘껏 만지도록 내버려두고 목을 축였다.

“아니에요. 딜리언 씨도 바쁜데 이때 아니면 언제 얼굴을 보겠어요.”

내 앞에 차려진 음식을 오물거리던 나는 뺨을 뚫을 듯 집요한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시선의 주인공은 예상대로 딜리언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거센 충동을 억누르는 듯, 가라앉은 눈이 나를 샅샅이 핥았다.

꼴이 너무 추접스럽나? 하긴 퉁퉁 부은 얼굴로 밥 먹는 꼴이 그리 예쁘진 않지.

민망함에 뺨을 긁적이자, 딜리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치겠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딜리언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커다란 손이 턱 아래로 내려갔을 때, 그의 얼굴엔 평소와 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리아 씨. 오늘 저녁에 약속 잊지 마세요.”

약속? 무슨 약속?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입 안에 음식이 가득 차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불꽃놀이 보러 가야죠.”

헉, 맞다. 그랬었지.

당연히 취소될 거라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한 약속이었다.

‘큰일 났다. 까맣게 잊고 있었어.’

어둠과 아이나에 신경을 쏟느라 그와 한 약속은 뒷전이 돼버렸다.

나는 딜리언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치 빠른 딜리언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식기를 탁, 소리 나게 내린 딜리언이 턱을 괴고, 눈을 사르르 접었다.

“솔직히 말해봐요. 잊고 있었죠?”

“제가요? 그럴 리가요.”

나는 모른 척 시치미 뗐지만, 상대는 딜리언이다. 먹힐 리가.

“저는 이날이 오기만을 고대했는데 리아 씨는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

“어떻게 생각하세요, 리아 씨.”

“제가 죄인입니다.”

먼저 약속했으면서 새카맣게 잊어버리다니. 나는 차마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슬그머니 식기를 놓고 딜리언의 눈치를 살폈다.

“죄인이라, 그럼 당연히 벌을 받아야겠군요.”

“그 벌이라는 게 어떤 건지에 따라…….”

“걱정 마세요. 제가 설마 리아 씨께 힘든 벌을 주겠어요?”

그래, 힘든 벌은 아니겠지. 이러나저러나 딜리언은 내게 엄청 신경 쓰고 있으니까.

그래서 문제였다.

본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벌을 내릴 게 뻔하잖아.

“그러니까 어떤……?”

턱을 괸 채 나를 관찰하던 딜리언은 눈을 나른하게 내리뜨며 슬그머니 입꼬리를 당겼다.

“딜리언 씨……?”

몇 번을 불러도 그는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로 웃기만 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내가 내 무덤을 팠다는 것을, 그리하여 존X 망했다는 것을.

* * *

딜리언이 내린 벌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힘들어요?”

“힘들면, 그만 놔줄 거예요?”

힘없이 늘어져 있던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딜리언을 바라보았다. 기대로 반짝거리는 내 눈을 본 딜리언이 싱긋 웃었다.

“설마요. 그럼 벌이 아니잖아요?”

쳇. 그럼 왜 물어본 거야. 괜히 기대하게.

나는 들었던 고개를 다시 파묻었다. 책상에 이마가 부딪히기 직전, 그 사이에 손을 집어넣은 딜리언이 내 머리를 들어 올렸다.

“자, 얼른 일해야죠. 그래야 불꽃놀이를 보러 가죠.”

나는 눈앞에 산처럼 쌓인 서류를 보고 몸을 비틀었다.

“그때까지 이걸 어떻게 다 해요!”

딜리언이 내린 벌은 불꽃놀이를 보러 가기 전까지, 하루 종일 자신과 함께 서류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바로 옆에 딱 달라붙어서.

일에 방해되는 나단은 당연히 출입 금지였다.

‘리아! 안 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저놈이랑 단둘이 있는 걸 허락할 수 없어!’

‘나단, 네가 청포도를 좋아한다 했지.’

‘흥, 그게 뭐.’

코웃음을 치던 나단은 제 앞에 차곡차곡 쌓이는 과일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큼, 안 된다. 내가 이 정도로 넘어갈 줄 아느냐, 턱도 없다. 나는…….’

그 가운데 자리한 과일 셔벗을 발견한 나단이 침을 꿀꺽 삼켰다.

‘흠. 되지. 되고말고.’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안 돼, 안 돼, 돼, 돼, 돼.’였다.

나단을 다루는 법을 알아버린 딜리언은 손쉽게 그를 제거하고, 나를 손에 넣었다.

셔벗 하나에 팔려간 나는 그대로 딜리언에게 붙잡혀 집무실에 갇히고 말았다.

딜리언이 입고 있던 수트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곧장 목을 죄던 타이를 풀고, 셔츠 소매를 걷기 시작했다.

‘설마……?’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 갇히게 되자 엉뚱한 상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벌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이었다.

‘이런 벌은 안 되는데……!’

나는 붉어진 얼굴로 콧김을 뿜어댔다. 그런 내 얼굴을 보며 피식 웃은 딜리언이 내 손에 쥐여준 건,

……고급스러운 잉크 펜이었다.

“리아 씨, 이것도 부탁드립니다.”

제 부관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딜리언은 나를 지독히도 부려먹었다.

“네에.”

내 앞에 내민 서류를 뚱한 얼굴로 받아들자 딜리언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실망한 얼굴이네요.”

“네?”

불쑥, 옆으로 잘생긴 얼굴이 끼어 들어왔다. 놀라 몸을 물리려는 내 어깨를 붙잡은 딜리언이 나른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기대했어요?”

“뭐, 뭘?”

“글쎄요, 뭘까?”

어깨를 타고 올라오는 손길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은근한 손길에 나는 펄쩍 뛰어올랐다.

“미쳤어요?!”

휘두른 팔에 서류가 사방으로 날렸다. 가뿐히 내 공격을 피한 딜리언이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끅끅거리면서 어깨까지 떠는 모습에 나 또한 수치심으로 어깨를 떨었다.

“하루라도 빨리 식을 올리든가 해야지. 리아 씨 얼굴에 다 티 납니다.”

“제가 뭐요!”

그렇고 그런 상상을 한 걸 들키자 얼굴에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나는 애써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히고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거 제가 봐도 되는 서류예요?”

“간단한 서류라 리아 씨도 무리 없이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혹시라도 내가 정보를 캐가면 어찌할 거냐는 말이었지만 딜리언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긴, 워낙 간단한 서류라 내가 봐도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아.’

자료를 정리하던 나는 고개를 들어 딜리언을 흘끔거렸다.

‘열심히 공부했다더니, 정말이네.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 보이잖아?’

그는 무서운 집중력을 보이며 서류를 처리했다. 그에 비해 나는…….

‘거북이가 걸어가도 이보단 빠르겠다.’

처음엔 왜 나를 보조로 쓰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해도 해도 줄지 않는 일거리를 보자 거북이라도 옆에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날 데려와서 일을 시키는 거겠지.’

기계적으로 서류를 정리하던 나는 손을 멈칫했다.

‘잠깐, 이거 딜리언 생일이야? 헉! 얼마 안 남았잖아?’

정확히 보름 뒤가 그의 생일이었다. 예상치 못한 정보에 숨을 삼키자, 딜리언이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재빨리 서류를 덮고 열심히 일하는 척했다.

뺨에 그의 의아한 눈빛이 따라왔지만, 나는 끝내 모른 척 서류를 정리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이미 딜리언의 생일로 가득 찬 지 오래였다.

* * *

무슨 정신으로 일을 끝냈는지 모르겠다.

‘딜리언 생일……. 생일 선물 뭐 하지……?’

우연히 보게 된 딜리언의 생일 때문에 온통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버린 탓에 일은 더욱 더디기만 했다.

“리아 씨, 갑시다.”

딜리언은 노을이 지자마자 칼같이 일어나 나를 이끌었다.

‘선물……. 생일 선물…….’

생일을 알아버렸는데 모른 척 지나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비싼 선물을 주자니, 모든 걸 다 가진 딜리언에게 뭔들 성에 찰까 싶고.

한참 고민하던 나는 딜리언의 부름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리아 씨.”

“네, 네?”

고개를 든 나는 주변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벌렸다.

뒷산 입구였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야?’

당연히 마차를 타러 갈 줄 알았던 나는 당황하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불꽃놀이 보러 간다면서요? 광장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요?”

“제가 광장으로 간다고 말했던가요?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없는데.”

“그렇긴 한데…….”

보통은 광장에서 불꽃놀이를 본다고. 명당도 다 거기에 있잖아.

“시계탑이나, 분수대, 별숲 공원…… 명당은 전부 광장에 있잖아요……?”

나는 아이나가 남자 주인공들과 다녔던 데이트 코스를 줄줄이 읊었다.

“거기보다 더 좋은 곳입니다.”

나는 딜리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이 산이?

정말로 이 산이 명당이라고?

“갑시다.”

애써 찜찜함을 달랜 나는 산으로 발을 들였고, 이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팔자에도 없는 등산을 하게 되다니!’

온종일 일만 하다가 갑자기 등산으로 혹사당한 몸이 피곤하다며 울부짖었다.

“체력이 이렇게 약해서 어떡합니까.”

“저 정도면 정상이거든요?”

미친 체력을 가진 딜리언과 비교하면 한없이 모자라지만, 나는 지극히 평균이었다.

‘아니, 평균 이상은 된다고!’

나무를 짚고 턱 밑에 매달린 땀을 훔치던 그때 불쑥, 딜리언의 손이 내게 다가왔다.

“늦으면 안 되니까 조금만 더 힘내세요.”

딜리언이 내 손을 당겼다. 가볍게 나를 끌어올린 그는 이제 다 왔다며 내 어깨를 도닥였다.

“이쪽입니다.”

딜리언이 앞을 가로막은 가지를 젖혔다.

“여깁니다.”

딜리언이 이끄는 대로 안쪽으로 향하자 가파른 절벽이 보였다.

심장이 덜컹거릴 정도로 아찔한 높이였지만, 내 입에선 비명이 아닌 감탄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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