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카시스와 맞잡은 손을 풀고, 의자가 흔들릴 정도로 거칠게 일어선 아이나가 우리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두 눈에 적의가 가득했다. 어찌나 차가운지, 딜리언이 가까이하지 말라는 말이 이해가 됐다.
“리아 님. 어째서 당신 같은 분이 저런 자와 함께 계시는 거예요.”
“네?”
“저런 삿된 자 곁에 있으면 위험해요. 언젠간 리아 님마저 잡아먹을지도 모른다고요. 지금부터 제가 모실게요. 당장 저랑 같이……!”
지금 저게 사람의 면전에 대고 할 소리인가? 삿됐다니, 잡아먹을 거라니.
‘딜리언은 그걸 왜 가만히 듣고 있는 거야?’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괜히 내가 마음이 불편하고 울컥거렸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내가 욕을 먹는 것도 아닌데.’
듣다 듣다 더는 참지 못한 나는 아이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거친 내 행동에 당황했는지 그녀의 눈이 크게 떨렸다.
“성녀님. 말조심해요.”
“네? 하지만, 저 사람은 저주에……!”
“황태자 전하,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단, 가자.”
“리, 리아 님.”
나는 애타게 뻗은 손을 무시하고 등을 돌렸다.
이리 과하게 대처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건만,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리아 님은 내 수호천사잖아요!”
아이나가 퍽,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 애원에 지금까지 끌려다녔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성녀님. 저는 누구의 수호천사도 아니에요.”
내가 지켜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건 나단과 딜리언이다.
내가 여주인공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의무 같은 건 없다고.
매정하게 카페 밖으로 나온 나는 창가에 비치는 아이나를 보고 한숨을 삼켰다.
상처가 큰지, 카시스의 품에 안겨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리아 씨.”
딜리언이 내 뺨을 감싸 제게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후드를 내 머리까지 씌우고 단단히 여며주었다.
“집에 갈 거죠?”
“네, 가서 잘래요. 피곤해요. 그런데 메이는 어떻게 찾죠?”
“시계탑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다행이네요. 어서 가요.”
나는 딜리언의 손을 잡았다. 설마 내가 먼저 손을 잡을 줄은 몰랐는지 딜리언이 움찔거렸다.
덩달아 놀란 내가 손을 빼려 했지만, 그 순간 강한 힘이 내 손을 움켜쥐었다.
“잡았다가 놓는 게 어딨습니까.”
혹시라도 내가 도망칠까 봐 딜리언은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제 손을 얽었다.
나는 슬그머니 딜리언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나른한 얼굴이었다.
“딜리언 씨, 화 안 났어요……?”
“화났습니다.”
역시.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을 들었는데 기분 안 나쁜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다음부터 제가 호위 붙여준다고 하면 거절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놀랐는지 압니까.”
“……그쪽이었어요?”
“그럼 달리 화낼 일이 있겠습니까.”
그는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성녀가 나쁜 말을 했잖아요.”
“아아, 그런 일이 있었죠.”
이제야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이 무심했다.
내가 말을 꺼내기 전까진 관심도 없었던 게 분명했다.
“상관없습니다. 제가 그런 소리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고, 일일이 신경 쓰면 저만 피곤합니다.”
이런 일이 일상인 듯 딜리언은 대수롭지 않다며 웃었다.
그 모습이 왜 이리도 화가 나는 걸까. 울컥한 나는 딜리언의 팔을 잡아 거칠게 흔들었다.
“그럴 땐 화를 내야죠!”
“리아 씨, 화났어요?”
“당연하죠!”
그를 대신해 화를 내던 나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새삼 딜리언에게 정말 많은 정을 줘버렸구나 싶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런 사이가 될 줄은 몰랐는데.
사실 아이나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나도 그녀처럼 생각했고, 불안해했으니까.
실제로 몇 번이고 그를 밀어내려 하지 않았는가.
아이나처럼 예민한 사람은 딜리언의 저주가 더더욱 강하게 느껴지겠지.
‘그래도 대놓고 말하는 건 너무하잖아!’
괜히 내가 더 속상하고, 억울했다.
“리아 씨, 저 때문에 화내는 거예요? 제가 욕먹어서?”
보면 모르겠냐? 나는 가자미눈을 하고 딜리언을 째려보았다.
나는 이렇게 화가 나고 속이 답답한데, 그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입가를 씰룩였다.
“지금 이게 웃겨요?”
“아뇨.”
딜리언이 정색하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자꾸만 움찔거리며 위로 치솟는 입꼬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하나만 물어도 됩니까.”
“뭔데요.”
“욕은 제가 먹었는데 왜 리아 씨가 화를 내세요?”
“왜냐뇨! 당연히……!”
나는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
“소중한 사람이 자기 잘못도 아닌 일로 욕을 들었으니까요.”
그와 함께 지낸 시간만큼 정도 많이 들었고, 약혼까지 한 사이니 소중한 사람이 맞지.
혼자서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인 나는 딜리언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딜리언 씨는 제가 길 가다가 욕을 들으면 화 안 낼 거예요?”
“설마요, 그 새끼의 혀를 뽑아버리겠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세상 다정했지만, 말의 내용은 과격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는 그마저도 익숙해진 나는 그런 뜻이라며 손뼉을 쳤다.
“네, 그런 비슷한 의미에서 화를 낸 거예요. 그러니까 딜리언 씨도 저런 말을 들으면 화를 내세요. 알겠어요?”
“누구 말씀인데, 명심할게요.”
달콤하게 속삭인 딜리언이 고개를 숙여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델 듯 뜨거운 감촉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가끔 내보이는 이런 신사적인 태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알면서 이러는 거 아니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딜리언이 입꼬리를 당겼다. 묘하게 색정적인 그 얼굴에 후끈 열이 올랐다.
그러다 문득 딜리언의 목으로 시선이 향했다.
딜리언의 저주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고 있다.
빌헬름에서 습격당한 일을 마지막으로 그의 저주는 폭주한 적이 없고.
딜리언이 폭주를 제어하는 법을 익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종종 그의 저주를 신성력으로 달래주기도 했고.
‘슬슬 해야 할 때지?’
나는 벌어진 셔츠 깃 사이로 보이는 저주를 향해 손을 가져다 댔다.
손끝이 닿자 딜리언이 의문스러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신성력을 풀어내며 조심스럽게 저주를 쓸었다.
“이 저주, 제가 꼭 풀어드릴게요.”
아이나도 대신관 에런도 풀지 못한 저주를 내가 무슨 수로 풀겠냐 싶기도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다른 힘을 쓰니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안 돼도 되게 만들 거다.
“반드시.”
그리고 다시는 저런 대접 받을 일 없게 만들겠어.
전에 없던 의지를 활활 태우자, 놀란 듯 커졌던 딜리언의 눈이 이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리고 별안간 내 허리를 껴안아 당겼다. 막을 새도 없이 끌려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박은 나는 눈을 깜박였다.
진하게 느껴지는 그의 향기에 뒤늦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무슨 짓이에요?! 사람들이 다 보는 대낮에…….”
“그럼 제 저주가 풀리기 전까지 어디 가지 마세요.”
파닥거리며 딜리언을 밀어내던 나는 멈칫했다.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벅차오르는 것처럼 들려서.
‘이건 반칙이지.’
괜히 술렁거리는 마음에 나는 입술을 내밀었다.
“기간이 점점 늘어나는 거 아니에요? 분명 기억을 찾기 전까지 함께 있기로 했잖아요.”
“기억은 평생 안 돌아올 것 같으니까 늘어나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허어, 큰일 날 소리 하네.
“말 나온 김에 물어볼게요. 정말 뭐 기억나는 거 없어요?”
기억을 잃은 사람치고는 너무 자연스러워 보인단 말이지.
“제가 연기를 너무 잘했나 봅니다. 리아 씨까지 깜빡 속아 넘어간 걸 보니.”
딜리언이 다행이라며 방긋 웃었다.
“필요한 정보는 전부 외웠습니다. 제 과거도, 가문의 역사도, 가계도까지 전부요.”
과연, 딜리언이다. 그의 철두철미함에 나는 혀를 내두르는 한편,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다행이죠.”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딜리언 씨의 비밀은 아무도 모르겠네요.”
“리아 씨가 떠날 일이 없을테니.”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기억을 찾으면 도망갈 거잖아요. 그럼 평생 찾지 말아야지.”
말이나 못 하면. 이제는 뻔한 수작질에도 웃음이 나왔다.
“알았으니 손 좀 풀어요. 남들 보기 민망하다고요.”
“그 말은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선 괜찮다는 거군요. 예를 들어 마차라든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딜리언이 나를 마차로 밀어넣었다.
“잠깐……!”
간절한 내 손길에도 마차의 문은 매정하게 쾅 닫혔다.
* * *
“아이나. 진정하고 우선 돌아가자.”
카시스는 우느라 진이 빠진 아이나를 달래 겨우 거리로 나왔다.
저 멀리 리아와 딜리언의 뒷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다정하고 사이좋아 보이는 광경이었다.
카시스는 그 모습을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누이와 혼인하기 싫어 연막을 친 줄 알았더니, 진심이었을 줄이야.’
딜리언이 리아에게 가진 감정은 분명 자신이 아이나에게 품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처음엔 그의 가죽을 뒤집어쓴 마물이라 착각했을 정도로 믿기지 않았다.
‘천하의 딜리언 시니이즈가 걱정을 해?’
주변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리아를 향해 돌진하던 그 모습을 떠올리자 다시금 충격이 몰려왔다.
카시스는 딜리언을 떠올리고 저도 모르게 제 얼굴을 매만졌다.
아이나를 바라볼 때 자신의 얼굴도 저럴까. 궁금해진 탓이었다.
‘민망할 것 같군.’
그만큼 딜리언의 감정은 노골적이었다. 보는 사람의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숨김없이 드러났다.
‘감정도 모르는 괴물이라더니. 다 헛소리였어.’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로서는 딜리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니까.
문제는 그 대상이 제 연인이 수호천사라 부르는 사람이었다.
‘수호천사라…….’
아이나가 오랫동안 한 여인을 찾아다닌 걸 알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줄 천사님을 기다린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 수호천사는 아이나가 아니라 딜리언을 선택했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깊어 보이는 사이였다.
카시스는 훌쩍이는 아이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아이나. 이번엔 그대가 심했어. 아무리 공작이라도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쁠 거다.”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리아를 도와주고 싶어서 한 행동이었는데, 설마 둘이 그런 관계였을 줄이야.
소중한 사람을 욕하면 누구나 기분이 나쁠 터.
아이나는 덤덤히 제 잘못을 인정했다.
“다음에 사과하도록 해. 그럼 리아 양도 다시 웃으면서 받아줄 거다.”
“……네.”
카시스는 상심에 빠진 아이나를 다독였다.
카시스의 정성 어린 조언에 뺨을 두드리며 정신을 차리던 아이나는 발아래 길게 늘어진 그림자에 멈칫했다.
“물러서세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아이나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