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방금 그건…….”
“리아! 도망친다!”
놀란 것도 잠시. 리아는 나단의 부름에 재빨리 활시위를 당겼다.
렉스터를 보호하듯, 그를 감싼 마물들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날아간 화살이 벽을 뚫고 렉스터를 노렸다.
“큭!”
희미하지만 렉스터의 고통에 찬 신음이 들렸다. 그리고 바닥에 흩뿌려진 붉은 피.
렉스터는 그림자에게 먹혀 자취를 후였으나 당시 상황이 그녀의 공격이 통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리아는 천천히 당겼던 활시위를 풀며 팔을 내렸다.
‘조금 전, 렉스터에게서 느껴지던 힘은 대체 뭐지? 어떻게 그런 기운이…….’
렉스터가 보인 그 힘은 어둠의 힘인 동시에 딜리언에게서 느껴지던 저주의 힘과 매우 흡사했다.
“나단, 렉스터가 쓴 그 힘 말이야…….”
하지만 리아는 그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달려온 아이나가 리아의 품에 파고든 탓이었다.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몸을 아이나가 힘껏 붙잡았다.
“천사님! 역시, 절 구하러 오실 줄 알았어요!”
렉스터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 괴리감에 당황한 리아는 아이나를 밀치고 그녀에게 활을 겨눴다.
“당신, 누구야.”
코앞에 화살이 겨눠졌음에도 아이나는 놀라긴커녕,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러더니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인사했다.
“아이나 베른이라고 해요. 이번 대에 성녀가 됐어요.”
쑥스러운지 몸을 배배 꼬며 인사하던 아이나가 별안간 얼굴을 굳히고 리아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화나셨어요?”
“화?”
생뚱맞은 말에 리아는 상황도 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사님이 오시기 전에 제가 일을 다 해결해야 했는데, 죄송해요.”
렉스터와 싸울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리아는 혼란스러웠다.
“리아, 혹시 이번 대의 성녀는 이중인격인 걸까?”
나단도 적응이 되지 않는지 리아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나단 님이세요? 세상에! 처음 뵙습니다. 이번에도 못 뵐 줄 알았는데, 너무 기뻐요.”
리아는 제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아이나를 보고 천천히 활을 아래로 내렸다.
‘어느 쪽이 진짜 아이나의 모습일까?’
렉스터를 대할 때 보인 시니컬한 모습도, 자신을 대할 때 보여준 애교 많은 모습도 전부, 그녀가 아는 모습은 아니었다.
확실한 건, 지금 제게 위협이 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저기, 천사님은 무슨 말이야?”
“제 수호천사님이시잖아요.”
“수호천사라니?”
“그분께서 분명 저와 약조하셨어요. 저만을 위한 수호천사를 보내주겠다고.”
순식간에 손이 붙잡히자, 당황한 리아가 발을 뒤로 물렸다. 아이나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바짝 따라붙었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어요. 천사님.”
반짝거리는 눈동자, 진한 그리움이 묻어져 나오는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진 리아는 얌전히 그녀에게 손을 내어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피하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
“아이나!”
“카시스 님!”
여기서 들려선 안 될 이름에 리아의 목이 끼긱거리며 돌아갔다.
태양을 품은 듯 밝은 금발, 자수정처럼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
아이나의 영원한 왕자님, 카시스 아르젠티아.
‘인생…….’
원작 남주의 등장이었다.
* * *
나는 내 앞에 쌓인 디저트 더미에 땀을 삐질 흘렸다.
아이나에게 붙잡혀 얼떨결에 카페에 오긴 했는데,
“리아 님, 이것도 드셔보세요.”
“으, 응. 제가 먹을게요.”
“말 편하게 하세요. 리아 님은 제 수호천사잖아요.”
“아니에요. 제가 어찌 그러겠어요…….”
나는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는 포크를 간신히 넘겨받아 입에 물었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꽃받침을 한 아이나의 입에서 끊임없이 간지러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크림에서 이상하게 쓴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진짜 미치겠다.’
나는 옆에서 뺨을 뚫어버릴 것처럼 강렬한 시선에 연신 물을 벌컥 들이켰다.
‘이 망할 커플들은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과한 친절과 애정을 보내는 아이나와 그녀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나를 견제하는 카시스.
‘결국 원작 인물을 다 만나버렸잖아…….’
도망가고 싶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선 우선, 아이나를 떼어내야만 했다.
“저기, 성녀님. 아무래도 생각해봐도 저는 수호천사 같은 게 아니에요.”
그냥 평범한 소시민이라고. 나는 열심히 아이나를 설득했지만, 조금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말해도 저는 다 보여요. 리아 님의 신성력이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다운지, 얼마나 거대한지 다 보인다고요.”
“저도 보여요. 성녀님의 신성력도 엄청 깨끗해요.”
대신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새하얀 순백의 빛이었다.
“그걸 볼 수 있다는 시점에서 리아 님이 남들과 다른 거예요.”
알고 있다.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쯤은.
히든 캐릭터니까 뭔가 특별히 시킬 일이 있는 거겠지.
“신께서 저와 약속하셨어요. 제국을 수호하는 성녀가 되는 대신에 저를 지켜 줄 수호천사를 보내주기로.”
하지만 그 역할이 여주인공의 수호천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분은 약속대로 제게 수호천사를 보내주셨어요. 리아 님이 오늘 저를 만난 것도, 저를 구해주신 것도 다 운명이에요.”
아이나는 광신도처럼 나를 수호천사라 외쳐댔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오벨러스가 진짜로 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도대체 아이나한테 무슨 바람을 불어넣은 거야…….’
한편, 나처럼 수호천사라는 말에 의문을 표하는 자가 있었으니,
“아이나, 그대가 신의 대리인인데 수호천사라는 게 존재할까? 저 여인이 그대를 구해줬기 때문에 착각,”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카시스가 대신 해주자 속이 뻥 뚫렸으나 그것도 잠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나가 무섭게 반격했다.
“카시스 님. 지금 제 말을 못 믿으신다는 거예요? 제 수호천사의 존재를 부정하시는 거냐고요.”
“아니, 무시하는 게 아니다. 너무 갑작스러워 그러지.”
“그리고 저 여인이 아니라 리아 님이에요. 고귀하고 숭고한 이름이 있는데 어찌 그런 무성의한 호칭을 쓰실 수 있으세요. 정말 실망이에요.”
따발총 같은 아이나의 공격에 카시스가 금방 꼬리를 내렸다.
“……내가 실언을 했군. 델리스 양은 그만 챙기고,”
“리아. 리. 아.”
“그래, 리아 양은 그만 챙기고, 너부터 먹거라.”
“괜찮아요. 저는 리아 님 얼굴만 봐도 배가 불러요. 리아 님, 이것도 먹어봐요.”
“아니에요. 성녀님이 드세요. 전 이거 안 좋아해요.”
그러자 청천벽력 소리라도 들은 듯 아이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가 그런 멍청한 실수를……! 리아 님의 취향도 몰라보고. 난 바보야!”
“아이나! 그럴 리가. 리아가 착각한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아니라고 하면 죽일 기세였다.
나는 재빨리 그녀가 준 쿠키를 입에 욱여넣었다.
“아이나, 보거라. 아주 맛있게 먹고 있다.”
“리아 님……!”
아이나는 내 저작 운동에 감동했는지 눈물까지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꾸덕한 초코 쿠키를 공격적으로 씹으며 의자에 기댔다.
“나단.”
나는 나단에게 SOS를 보내며 엉덩이를 찔렀지만, 그는 처음 먹어보는 과일 셔벗에 정신이 나간 지 오래였다.
“맛있다! 세상에 이리도 맛있는 게 존재했다니!”
딱히 내게 신경을 쓰지 않는 걸 보면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는 건데…….
그래, 위험하진 않지. 내 안구가 괴로울 뿐.
‘시X, 커플 다 죽었으면…….’
어느새 찰싹 달라붙어 애정 행각을 벌이는 두 사람에 나는 내 눈을 찌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쯤에 둘의 관계가 상당히 진척됐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정도가 심한 게 아닌가?
‘누가 보면 진득하게 연애하고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인 줄 알겠어.’
누가 저 모습을 두 달 된 사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다. 딜리언을 떠올리면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기도…….’
대신전이 아닌 황궁에서 쭉 머물더니 빠른 속도로 사이가 가까워진 듯 보였다.
딜리언과 나처럼.
나는 턱을 괴고 아이나와 카시스를 바라보았다.
딜리언이 내게 애정 공세를 쏟아부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남들 앞에서 그러면 정말 막아야겠어.’
그들의 안구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뜻밖의 자기반성에 울적해지던 그때였다.
딸랑- 청아한 소리가 들렸다.
커플의 지독한 애정행각으로부터 눈을 돌릴 곳을 찾던 나는 이때다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장 마주친 선홍색 눈동자에 깜짝 놀랐다.
“딜리언?”
나는 딜리언의 모습을 보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흐트러진 앞머리와 그 사이로 맺힌 땀, 크게 들썩이는 가슴.
그는 마치, 급하게 달려온 사람 같았다.
풍랑처럼 흔들리던 눈이 이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생생히 보였다. 나를 찾은 딜리언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내 맞은편에 앉은 카시스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오로지 나를 향해서만.
“리아 씨.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다가온 그의 팔을 붙잡았다.
믿기지 않아서 그랬다. 딜리언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나타날 줄은 몰랐거든.
“괜찮습니까? 다친 곳은 없고요? 위험한 일에 휘말리거나 그러진 않았습니까?”
“네? 네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리아 씨가 사라졌다는 보고를 듣고 주변을 다 뒤졌습니다. 메이 씨도 모른다고 하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당시 그의 감정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딜리언은 멀쩡한 내 모습을 보자 불안이 가셨는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뱉었다.
항상 완벽하던 딜리언의 흐트러진 모습에 이상하게 가슴이 술렁거렸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이 이토록 불안해하는 원인이 나라는 사실에.
“미안해요. 그게, 사람이 너무 많아서 떠밀려버렸지 뭐예요. 낯선 곳이라 길을 잃었는데 이분들이 도와주셨어요.”
나는 맞은편에 있는 아이나와 카시스를 가리켰다. 그제야 카시스를 발견한 딜리언이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상당히 건성인 인사였지만 카시스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듯 묘한 눈으로 딜리언을 주시했다.
아이나는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리아 님, 그쪽은……?”
“구면이죠? 제 약, 약혼자예요.”
내 입으로 딜리언을 소개하는 건 처음이라 얼굴에 열이 올랐는데, 홍조를 가득 띤 내 얼굴을 바라보는 아이나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말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