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
재빨리 뒤를 돌았지만, 시장만큼이나 복잡한 광장에서 정확히 상대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리아! 그놈이다!”
나단도 느꼈는지, 빠른 속도로 내게 날아오는 중이었다.
‘그래, 느껴져.’
딜리언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흉흉한 기운. 발끝을 타고 오르는 진득하고도 소름 돋는 감각.
어둠이다.
나단을 향해 달려가려던 그때, 남자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가는 거야?”
“아, 길 알려줘서 고마워!”
“그래, 다음에 또 보자.”
또? 의미 모를 말에 멈칫한 나는 달려가던 몸을 돌렸다.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남자가 입을 뻐금거렸다.
그 모양이, 꼭 내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겠지.’
찜찜함에 눈으로 사내를 쫓았지만, 그는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리아?”
“아니야, 어느 쪽으로 가야 해?”
“이쪽이다.”
나는 흉포한 기운을 따라,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그러자 희미하게 멀어졌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다.
나는 본능적으로 후드 앞부분을 끌어내렸다.
“본체는 아닌 것 같고. 저쪽이 계약자, 맞지?”
“그래.”
딜리언의 예상대로 어둠과 계약한 자가 렉스터가 맞을까?
막상 여기까지 쫓아오긴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 잡아야 하나? 아니면 돌아서야 하나?’
주춤하는 사이 그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당장 잡는 건 무리야. 하지만, 하지만……!’
어둠이 노리는 게 내가 아니었다면, 나단을 노렸던 사람이 렉스터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기서 무시하고 뒤를 돌았을 거다.
‘하지만 나를 노리고 있잖아!’
또 바보같이 당할 수는 없어.
내 발은 이미 멋대로 남자의 뒤를 밟고 있었다.
“리아, 어쩌려고.”
“조금만 더 따라가 보자.”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내빼면 돼.
나는 팔찌를 매만지며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밟았다.
시끄럽던 사위가 조용해지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골목을 통해, 텅 빈 공터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의 사각지대인 담벼락에 달라붙었다.
‘……이 이상 따라가면 위험해.’
아깝긴 하지만 돌아가야 할 때였다.
발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몸을 돌린 그 순간, 낮은 목소리가 공터에 울렸다.
“이만 나오지 그래.”
젠장, 들켰다.
나는 그 자리에 굳어 마른침을 삼켰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간도 크지, 감히 내 뒤를 쫓다니.”
저벅저벅, 다가오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도망갈 타이밍을 놓친 나는 골목을 주시하며 팔찌를 향해 손을 뻗었다.
‘늦었어. 도망쳐도 잡힐 거야.’
여기서 무사히 벗어날 방법은 없다.
‘아마 시치미를 떼도 소용이 없을 거야.’
정면 승부를 하는 수밖에.
어둠이 언제 나를 잡으러 올까 전전긍긍하며 사느니, 내가 먼저 선수를 치는 편이 나았다.
렉스터가 가진 힘이 저주라면, 내가 가진 신성력으로 무효화할 수 있을 거다.
우선 제압하자. 그 후는 딜리언이나 대신전에 맡기면 되는 일이다.
슈만에게 배운 대로 팔찌를 꾹 누르던 그때였다.
반대쪽 골목길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외진 곳까지 유인하다니. 내가 쫓아오는 거, 알았나 봐?”
“아, 그쪽이었나.”
턱밑에서 살랑거리는 은발. 싱그러운 녹안. 그리고, 그녀의 주변에 일렁이는 흰색 빛.
“성녀.”
그녀는 분명, 아이나였다.
* * *
아이나가 어떻게 여기에……?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당황한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것 같아 그랬다.
“리아?”
자리를 피하다 말고 벽에 달라붙어 상황을 주시하자, 나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쉿, 잠시만.”
그 사이 아이나는 겁도 없이 렉스터를 향해 성큼 다가섰다.
“어디서 이렇게 악취가 풀풀 풍기나 했더니, 여기였네.”
비뚜름히 한쪽만 올라간 입매가, 렉스터를 쏘아보는 차가운 눈빛이 낯설었다.
‘저 사람이 아이나라고?’
거짓말. 내가 아는 아이나는 사랑스럽고, 상냥하고, 언제나 따뜻한 순둥이란 말이야.
그런데 저 사람 하나 찢어 죽일 것 같은 눈은 뭐냐고.
“귀족 나리나 되시는 분이 어디서 이딴 걸 묻혀왔지?”
“내가 어디에서 뭘 했든, 성녀가 무슨 상관이지?”
“내가 명색이 성녀인데 세상을 더럽히는 오물을 보고 모른 척 지나가면 안 되겠지?”
“감히 누구한테 더러운 오물이라고.”
높게 치든 손이 아이나를 향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헉.”
어떡해. 솥뚜껑만 한 손에 맞으면 아이나가 다칠 텐데…… 응?
“너……!”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작고 여린 손에 붙들린 렉스터의 손이 허공에서 부들거렸다. 가볍게 손찌검을 막아낸 아이나가 픽 웃었다.
“렉스터 블렌트.”
성인 남자에게 뒤지지 않는 힘에 놀란 것도 잠시, 나는 익숙한 이름에 이성을 찾았다.
‘역시 렉스터가 맞았어.’
딜리언의 예상대로 어둠과 계약한 자는 렉스터 블렌트였다.
“어디서 삿된 저주를 받아왔는지는 몰라도 꺼져줘야겠어. 너 때문에 우리 천사님이 고생이라도 하면 곤란하거든.”
“뭔 개소리야.”
그러게. 천사님은 또 뭔데……?
아이나의 행동, 말투, 그리고 그녀가 뱉는 말의 진위까지. 전부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걱정 마. 내가 싹, 정화해줄게.”
렉스터와 맞닿은 아이나의 손에서 빛과 함께 신성력이 일렁거렸다.
“나한테 이 정도는 일도 아니……!”
그러나 아이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파직, 정전기가 일어나듯, 아이나의 손이 튕겨 나갔다.
‘아이나의 신성을 튕겨냈잖아?’
나만큼이나 당황한 아이나가 재빨리 렉스터와 거리를 벌렸다.
“어떻게……?”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제 손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렉스터 블렌트. 어디서 이 저주를 받아온 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렉스터가 모른 척 시치미를 떼자 아이나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시치미 떼지 마! 방금 내 신성력을 튕겨냈잖아!”
“지금 본인 입으로 인정한 건가? 고귀한 성녀께서 선량한 시민을 오해하여 멋대로 능력을 사용했다는 걸?”
와, 말하는 것 좀 봐. 진짜 얄밉다.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리아, 저길 봐라.”
그때, 나단이 날개를 펼쳐 한 곳을 가리켰다.
수상한 남자 몇 명이 아이나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진짜 비겁하다.”
지금까지 전적으로 봐서 쓰레기 같은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치사하게 뒤를 치다니.
아이나는 제 뒤로 누군가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렉스터에게 달려들며 공격했다.
“리아, 어쩔 셈이냐.”
계획대로라면 나는 모른 척,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렉스터에게 정체를 들켜서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정체를 숨기고 훗날을 도모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막을 수 있으면서 혼자 내빼는 것도 우스웠다.
“내가 조금만 더 이기적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기에 너는 사랑스러운 사람인 거지.”
칭찬은 고맙지만, 나단이 버릇처럼 하는 말이라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나는 픽 웃으며 품에 안은 나단을 땅에 내려주었다.
“나중에 딜리언이 알면 화내겠다. 그치?”
“흥, 그 녀석이 너한테 화를 낼 리가.”
“그래? 그럼 다행이고.”
나는 팔찌를 꾹 눌렀다. 그러자 반짝, 빛과 함께 팔찌가 활처럼 변했다.
“오오, 신기하구나.”
“슈만이 실력 하나는 최고잖아.”
나는 활과 활시위에 손가락을 걸었다.
‘이 버튼을 누르면 활 형태로 변형될 거야. 화살은 따로 필요 없어. 네 신성력으로 구현해내면 되니까.’
아래로 늘어진 팔을 들어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숨을 참고, 줄을 한계까지 팽팽하게 당긴 그 순간,
슉!
내 손을 떠나, 날아간 화살이 정확히 적의 허벅지에 명중했다.
‘다리를 다치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겠지.’
“악!”
비명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지는 적을 확인한 나는 다시 한번 활시위를 당겼다.
* * *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아이나의 감각이 날카롭게 일어섰다.
‘뒤에서 공격……!’
재빨리 몸을 튼 아이나는 제 앞에 쓰러지는 사내를 보고 눈을 키웠다.
‘저건, 신성력?’
화살 꼬리부터 천천히 스러지는 저 빛은 분명 신성력이었다.
‘누구지? 대신관의 신성력은 아니야.’
처음 보지만, 낯설기는커녕 따뜻하고 포근한…….
“……설마?”
아이나는 렉스터에게서 등을 돌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급하게 무언가를 찾는 모양새였다.
렉스터 또한 아이나로부터 눈을 떼고 주변을 살폈다.
그의 손등에 새겨진 저주가 지잉, 하고 울렸다.
‘이 저릿함. 신성력이군.’
몸이 저릿할 정도로 제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단 둘이다.
대신관과 제 앞에 있는 성녀.
하지만 성녀 또한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대신관이 온 건가?’
그때였다.
삐- 이명과 함께 누군가 강제로 그의 머리를 헤집었다.
[렉스터, 리아 건드리지 마.]
“X발, 이딴 방법으로 말 걸지 말라고!”
[건드리지 말라고.]
잠깐, 왜 갑자기 그 여자 이야기를…….
‘설마.’
지금 숨어서 신성력 화살을 날리고 있는 이가, 그 리아라는 여자란 말인가?
“닥쳐, 마구잡이로 화살을 날려서 죽게 생겼다고!”
[아, 맞다. 성녀는 몰라도, 리아의 신성력은 피해. 당하면 한동안 못 움직일 테니까.]
어둠이 경고하기 무섭게 렉스터의 부하들이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욱신거리는 머리를 감싼 렉스터가 이를 뿌득 갈았다.
‘빌어먹을, 이게 정말 딜리언의 약혼녀가 저지른 짓이라고? 리아인지 뭔지 하는 그 여자가?’
성녀를 유인하려 했더니, 엉뚱한 게 걸려들어 방해할 줄이야.
렉스터는 주변을 살피다 아이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성녀의 숨이라도 거둬가야 했다.
“리아, 3시 방향. 성녀가 위험하다.”
리아는 나단의 말에 재빨리 몸을 틀었다.
백발백중, 명사수와 앞을 내다보는 눈이 힘을 합치면 무서울 게 없었다.
리아는 정확히 렉스터의 허벅지를 조준한 후,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았다.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하게 날아갔다.
하지만 그 화살은 렉스터에게 닿지 못했다.
촤악-!
렉스터의 그림자 안에서 무언가 솟아올랐다. 빌헬름에서 마주친 마물이었다.
어둠의 분신, 그림자라 불리는 마물들이 몸을 꿈틀거리며 벽을 만들었다.
콰앙-!
상극인 힘이 부딪히며 일어난 바람에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렸다.
그 사이로 느껴지는 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운에 리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