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6장. 건국제
드디어 그날이 밝았다.
로맨스의 꽃이자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는 건국제의 아침이.
“나단. 일어나, 아침이야.”
나는 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나단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그를 깨웠다.
두 눈을 끔뻑이며 나단이 피식 웃었다.
“리아, 그렇게 신나?”
“당연하지.”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축제란 말이야.
빌헬름에선 몸을 숨기느라, 그리고 먹고사느라 바빠 한 번도 축제에 참여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전생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워낙 살기 바빠 축제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후후, 하지만 이번엔 다르지.’
현재 백수와 다름이 없는 내게 이번 건국제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나단, 축제에는 말이야, 맛있는 게 아주 많아.”
솜사탕, 닭꼬치, 통감자, 과일주스!
손가락을 접어가며 음식을 하나씩 나열하자, 나단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 당장 가자. 나는 솜사탕이 먹고 싶다!”
“나는 통감자!”
의기투합한 우리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꿰입기 시작했다.
“리아 님, 옷은 제가…….”
“아니! 드레스는 사양이야.”
“그럼 머리라도…….”
“그냥 묶고 갈 거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텐데 드레스와 머리핀이 웬 말이야.
나는 옷장에 몇 없는 셔츠와 바지를 입고 머리를 질끈 올려 묶었다.
그리고 어둠이 나를 찾아올 가능성까지 생각해 후드가 달린 로브를 어깨에 둘렀다.
순식간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세라와 키라를 뒤로한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이대로 메인 홀만 지나면 무사히 공작저를 탈출……!
“리아 씨. 어디 가십니까?”
하기 전에 딜리언에게 들키고 말았다.
막 훈련을 마쳤는지 딜리언에게서 바람 냄새와 미미한 땀 냄새가 났다.
“오늘이 건국제 개막식이잖아요. 구경 가야죠.”
“달콤한 솜사탕을 먹으러 갈 거다.”
나와 나단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기대감을 드러내자, 딜리언이 못 말린다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두둑한 주머니를 만지며 행복한 상상을 하던 나는 멈칫했다.
“왜요……?”
“같이 가야죠.”
“저희가 약속을 했던가요?”
“부부가 함께 외출하는 데 약속이 필요합니까?”
당연한 걸 왜 묻냐며 딜리언이 의문을 표했다.
“저희 약혼 관계잖아요……?”
“부부나 예비부부나 함께하는 건 같지 않습니까?”
“따지자면 그렇긴 한데…….”
이상하다. 왜 자꾸 말려드는 기분이지?
나는 계단을 오르는 딜리언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
“딜리언 씨!”
“저와 한시라도 떨어지기 싫은 건 알겠지만, 금방 나올 테니…….”
아니, 그게 아니라고! 나는 끝없이 펼쳐지는 망상에 그의 말을 잘라냈다.
“저, 딜리언 씨. 오늘은 메이랑 같이 가기로 했어요.”
활짝 웃던 얼굴에 금이 갔다. 순식간에 일자로 다물린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아니라, 메이 씨요?”
헉, 어떡해. 당연히 자기랑 갈 줄 알았나 봐.
눈치를 보다 고개를 끄덕이자 딜리언이 실망한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지금 외출 금지를 내리면 화내실 거죠.”
어딘가 음습하게 들리는 말에 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우린 동등한 위치라면서요.”
딜리언이 아차, 하는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설마, 제가 한 말이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나 보다.
“그럼 메이 씨를 치워버리는 건……?”
“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세요.”
나는 딜리언의 손을 잡고 그를 달래기 위해 부드럽게 운을 띄웠다.
“전부터 약속해둔 거예요. 그리고 메이 못 본 지 벌써 3주가 다 됐는걸요.”
이 약속이 취소되면 메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불같이 화를 내며 딜리언을 죽이려 들지도 몰랐다.
그리고 딜리언은 그런 메이를 가만두지 않을 테고.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건 내가 될 게 뻔했다.
“대신, 딜리언 씨는 마지막 날에 같이 가요.”
“메이 씨보다 뒤인 게 마음에 안 듭니다.”
“정말요? 마지막 날엔 불꽃놀이가 있는데?”
원래 축제의 대미는 불꽃놀이다.
밤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빛들의 향연과 함께 피어나는 사랑.
로맨스라면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이벤트였다.
“불꽃놀이 보러 가요. 오붓하게.”
나는 양손으로 딜리언의 손을 잡고 구구절절 불꽃놀이의 장점을 나열하며 그를 달랬다.
그러자 뚱하던 그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입꼬리를 보며 함께 웃었다.
‘미안하다. 페이크다.’
올해 건국제의 마지막 날은 안타깝게도 취소된다.
내가 분명 말했잖아. 건국제는 로맨스의 꽃인 동시에 사건사고가 다 터진다고.
그 사건이 바로 축제 엿샛날 터지고 만다.
무려 광장의 시계탑이 날아가는 대테러에 축제는 아비규환.
하루가 남았지만 축제는 취소되고, 불꽃놀이는 어둠 속으로 영영 사라진다.
“약속했습니다.”
이제는 버릇처럼 손가락을 내미는 딜리언을 향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나는 음흉한 마음을 숨긴 채 그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 * *
“리아!”
“메이!”
마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메이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내 허리를 낚아챈 그녀가 그 자리에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에게 안겨 몇 번을 돌았을까. 속이 울렁거렸다.
“메이, 나 멀미 나…….”
메이의 어깨를 힘껏 두드려 겨우 지상으로 착지한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딜리언 그놈이 너 괴롭히지는 않고? 어쩜 얘 몸 마른 것 좀 봐!”
“마르긴, 엄청 쪘는데?”
“넌 닥쳐.”
뒤에서 들려온 유들유들한 목소리에 메이가 팔꿈치를 휘둘렀다.
아슬아슬하게 메이의 공격을 피한 녹색 눈이 능청스럽게 휘어졌다.
“오랜만이네, 오빠 안 보고 싶었어?”
“슈만?”
<성녀, 아이나>의 서브 남주 중 하나이자, 현 마탑주. 그리고 메이의 오빠인 슈만 알트란이었다.
“캔디, 오빠라고 불러주면 안 될까.”
“그놈의 캔디 소리 좀 집어치워.”
“이름이라도 똑바로 불러주는 걸 감사히 여겨. 솜사탕 대가리라고 부르는 수가 있으니까.”
“여동생들 기가 너무 세서 아주 죽겠다, 죽겠어.”
그리고 어째서인지 나를 동생 취급하는 중이다.
“나단, 잘 지냈냐? 너도 잘 먹었나 보네. 살이 아주 포동포동해.”
잡아먹기 딱 좋다며 입맛을 다시자 나단이 슈만의 머리를 쪼아댔다.
“네놈은 어찌 볼 때마다 똑같은 소리냐!”
“아하하, 볼 때마다 신기하다니까. 도대체 부엉이가 어떻게 말을 하지?”
저 모습을 보고 있으니,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 * *
때는 일 년 전.
그날은, 메이를 주워온 지 딱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아직 상처가 완치되지 않은 메이를 홀로 둘 수 없었던 나는 나단에게 그녀를 맡기고 마을에 잠시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슈만을 만났다.
“솜사탕?”
태어나서 처음 본 솜사탕을 닮은 분홍색 머리.
흔치 않은 머리 색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런 내 시선을 느낀 남자가 정확히 나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
큰일 났다. 기분 나빴겠지?
사람을 빤히 쳐다본 건 명백한 실례였다.
나는 성큼 다가온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머리 위에서 날아온 말은 내 생각과 많이 동떨어진 것이었다.
“너구나.”
“네?”
“네가 메이미를 데리고 있지?”
메이미라면, 내가 치료하고 있는 환자의 이름이었다.
당시 메이는 배신자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세상에 관심이 없는 나도 알 정도로.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냐는 얼굴인데, 그리 대단한 건 아니고 너한테서 메이미의 기운이 느껴지거든.”
“…….”
“그래서, 메이미는 어디에 있지?”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사람이 메이미를 죽이러 온 사람이라면, 더더욱 알려줄 수 없었다.
“너, 날 의심하는구나?”
내 얼굴에 떠오른 의심을 읽은 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누구신데 메이미를 찾으시는 거죠? 원하는 대답을 듣고 싶으시면 먼저 본인 소개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똑 부러지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입술을 끌어당겼다.
“슈만 알트란. 그 못난이의 오빠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슈만. 그 이름은 주인공 중 한 사람의 이름이었으니까.
“혹시, 마탑주……?”
“나 원 참. 이런 깜찍하게도 작은 시골 마을에서까지 나를 알아보다니. 너무 유명해도 문제라니까.”
슈만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후후 웃었다.
“사인이라도 해줄까?”
사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X됐다. 망했어.’
원작이라면 절대, 절대 엮이고 싶지 않았으나 그중에 특히 만나고 싶지 않은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딜리언 시나이즈와 마탑주인 슈만 알트란.
이 두 사람은 제멋대로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녀석들이었다.
“자, 소개했으니 너도 알려줘야겠지. 메이는 잘 지내? 치료는?”
“거의 다 나았어요. 메이미 데려가려고 오셨어요?”
“그럴 생각이었는데, 널 보니까 어련히 잘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그냥 가려고.”
왜? 지금 데려가. 설마 또 찾아오는 건 아니겠지?
나는 불안한 눈으로 슈만의 눈치를 살폈다.
“내일 이 시간 오케이?”
“제가 왜…….”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격한 움직임에 픽, 웃음을 터트린 슈만이 내 손에 무언가를 올렸다.
뭔가 했더니, 알이 큼지막한 루비였다.
“내일, 오케이?”
“오케이.”
“재밌는 녀석이네.”
……그래, 나 속물이다. 싫다, 싫다 할 땐 언제고 루비에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다.
“좋아, 캔디. 내일 저기서 보자.”
“캔디?”
“아, 너 사탕 닮았어.”
무슨 의미일까. 반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도 캔디의 의미를 모르겠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슈만을 만나 메이의 몸 상태를 알려주었다.
메이가 병상에서 완전히 털고 일어날 때까지.
그리고 그때부터 슈만의 말도 안 되는 오빠 노릇이 시작됐다.
동생의 친구면 내 동생이라는 기적의 논리를 펼치면서.
* * *
그런 때가 있었지. 아련한 얼굴로 과거를 회상하던 나는 셋이서 옥신각신 싸우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나단과 메이가 편을 먹고 슈만을 공격하는 광경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부엉이가 말을 해.’, ‘부엉이가 사람을 괴롭혀.’ 등등 나단을 보고 놀라는 중이었다.
대신전에 정체를 들킨 마당에 딱히 숨길 이유는 없지만, 어딜 가나 시선이 집중되니 부담스러웠다.
“그만 싸워.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창피하다고.”
그러자 뒤늦게 이곳이 야외라는 것을 깨달은 슈만이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며 멋진 척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 있었나?”
“……너 도대체 뭐 하러 온 거야?”
“섭섭하네. 오랜만에 얼굴 좀 보려고 왔더니.”
슈만이 품을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내밀었다. 오팔처럼 오묘한 색깔이 눈에 띄는 팔찌였다.
“자, 네가 부탁했던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