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 * *
딜리언은 내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이제 리아 씨도 시나이즈의 주인인데 일일이 제 허락을 받을 필요 없으니, 편한 대로 하세요.”
우리는 동등한 관계라며 아예 금고 열쇠까지 주려는 그의 태도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제가 금고 털어서 도망가면 어쩌려고 그래요?”
“안 그럴 거잖아요.”
“당연하죠!”
“그리고 도망가도 어쩔 수 없죠. 열쇠를 넘겨준 건 제 선택이니. 매일 밤 배신당한 제 처지를 비관하며 눈물을 흘리겠죠.”
딜리언이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며 눈가를 눌렀다.
어이구, 퍽이나 울겠다. 날 쫓아와서 목을 따 버리려고 하겠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닌지 나단과 딜리언의 부관, 네이선이 뭐 씹은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놈이랑 같이 있으면 정신이 너무 피곤하다. 리아, 당장 금고를 털어서 여기를 떠나버리자.”
“그럼 권력의 주인이 바뀌게 되는 거군요. 마님. 오늘부터 마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각기 다른 말을 뱉어내는 둘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요.”
나는 붉은 리본으로 앙증맞게 포장된 열쇠를 냉큼 그에게 던졌다.
네이선의 충성심도 사양이었다.
“다 모인 모양입니다.”
네이선의 말에 아래를 내려다본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많은데?’
고용인이 한둘이 아닐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예상을 벗어나는 규모에 문득 걱정이 들었다.
‘나 오늘 잠은 잘 수 있을까?’
험난한 길이 예상됐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고용인들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짙은 어둠이 깔린 밤.
“정말 이자들이 전부 그 마물한테 당했다는 말입니까, 마님?”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이 믿기지 않는지 당황해하는 네이선에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홀에 누워 기절한 것처럼 잠든 사람은 총 다섯.
성별도, 나이도, 직업도 다양했다.
하인, 하녀, 마부, 기사 그리고 주방장.
평소 그의 요리를 좋아했던 네이선이 저도 모르게 제 목을 부여잡았다.
“전하, 독을 드신 거 아닙니까?”
“걱정은 마세요. 단순히 시각과 청각 공유니까요. 정보만 빼돌려졌지, 독살은 없…….”
걱정 말라며 손을 젓던 나는 번뜩 떠오른 가설에 입을 다물었다.
평소에 딜리언이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알아냈다가 몰래 바꿔치기했을 수도 있잖아?
“마님 왜 얘기를 하다 마십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헉! 그럼 저도 먹은 거 아닙니까?”
몸에 독이 쌓였으면 어떡하냐며 네이선이 오두방정을 떨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네이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부관님도 이리 오시죠.”
“저, 저도 말입니까?”
“당연하죠.”
딜리언과 나를 제외한 사람은 모두 빠짐없이 용의 선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쭈뼛거리는 네이선의 손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그러자 네이선이 두 눈을 꼭 감았다.
저 익숙한 모습을 어디서 봤나 했더니, 치과에 충치를 치료하러 간 아이의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다 큰 어른이 왜 이렇게 겁이 많아.’
꼴사납게 떨리는 손을 힘주어 잡자, 그의 어깨가 퉁, 튀어 올랐다.
“걱정하지 마시고, 셋 세면 끝납니다.”
치과 의사들이 매일같이 환자들을 속이는 말로 네이선을 달랬지만, 그도 몇 번 당해본 적이 있는지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그래 봤자 손은 잡혔는데.’
나는 신성력을 풀어 그의 몸 곳곳을 살폈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몸은 깨끗했다.
“정상이에요.”
손을 놓아주기 무섭게 딜리언이 내 어깨를 당겨 네이선으로부터 떨어트렸다.
“왜…….”
그러냐는 물음은 끝을 맺지 못했다.
뭐야, 저 표정. 부담스러워.
“사람들이 마님 손을 잡고 왜 놀랐는지 알겠습니다…….”
도망갈 땐 언제고 나랑 맞닿은 손을 가슴까지 끌어당겨 꼭 안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리도 따뜻하다니. 이건 마치, 태초의 어머니 품에 있는 것 같은, 억!”
“닥쳐라.”
어디서 불경하게 소름 돋는 소리를 뱉냐며 딜리언이 네이선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리고 네이선과 잡았던 내 손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만족스럽지 않은지 내 손을 붙잡았다.
“왜요?”
“소독입니다.”
“전하, 사람을 세균 취급하는 건 나쁜 행위입니다.”
“나쁜 병이라도 옮았을까 봐 걱정이군요.”
네이선을 철저하게 무시한 딜리언은 내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엮었다.
올가미처럼 손을 얽은 딜리언이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성큼 다가왔다.
“저는 안 해도 됩니까.”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저주를 품고 태어난 딜리언이 고작 어둠의 파편에 당할 리가.
내게 달려들던 어둠을 단번에 꼬챙이로 만드는 모습까지 봤는데도 그는 뻔뻔하게 굴었다.
“어휴, 저놈은 어찌 귀여운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구나.”
“말하는 부엉이 님. 방금 발언을 취소해 주시기 바랍니다.”
역시 충실한 부관……!
“전하에게 귀여운 구석이 생긴다면 그날은 제국 종말의 날일 겁니다.”
충신은 무슨, 그냥 공포의 주둥아리였네.
둘이서 쿵짝, 손뼉을 치며 주거니 받거니 할 동안에도 딜리언의 눈은 내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틈으로 나중에 둘을 족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지만 현재 우선순위는 나였다.
“리아 씨. 저도 파편을 삼켰을지도 모릅니다.”
“……알았어요.”
하지만 그리 말한 딜리언도 나도 그가 삼키지 않았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린 딜리언이 눈을 키웠다.
“방금 그건 뭡니까?”
“축복이요. 아무한테나 해주는 거 아니에요.”
효과는 여러 가지였지만 주로 피로 회복과 체력 증진, 그리고 널뛰는 감정을 진정시키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래, 이건 금방 목이 날아갈 것 같은 네이선을 위한 선물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딜리언은 퍽 감동 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괜히 양심에 찔린 나는 딜리언을 뒤로하고 쓰러진 사람들의 몸에서 나온 파편을 살폈다.
‘크기는 전부 제각각이었지만, 전부 보름을 넘긴 것들이야.’
내가 시나이즈에 발을 들인 건 일주일 전.
“아무래도 제가 아니라 딜리언 씨를 노린 것 같아요.”
“그렇군요.”
내가 딜리언과 함께 올 것을 한 달 전부터 알고 예측했을 리는 없었다.
애초에 노린 것은 딜리언. 그를 감시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는 건 어둠이 계약한 사람은 딜리언과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딜리언이 빌헬름에 묶인 틈을 노려 공작가의 정보를 야금야금 빼간 게 분명했다.
“누군지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모를 리가 없죠.”
렉스터, 이 X신 같은 새끼가.
단번에 범인을 알아차린 딜리언의 눈빛이 형형했다.
* * *
주륵, 새하얀 얼굴에 붉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제 눈에서 흘러내린 붉은 액체를 무성의한 손길로 훔쳐낸 사내가 중얼거렸다.
“결국 들켰네.”
실소를 터트린 남자가 화장실로 향했다.
쏴아아- 쏟아지는 물줄기를 받아 얼굴을 더럽힌 피를 씻어내자, 개수대로 붉은 물이 빨려 들어갔다.
물소리만 들리던 고요한 화장실에서 별안간 사나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나이즈 공작가에 심어둔 제 파편들이 단 하루 만에 모조리 소멸했다.
제게 다가오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자 황홀경에 빠진 보랏빛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렸다.
부드럽게 흔들리던 백금발, 빠져버릴 것 같은 푸른 눈동자, 포근한 향기가 아직도 코끝에 맴도는 듯했다.
“역시 대단하다니까.”
남자는 상기된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발밑에서 그림자가 크게 일렁거렸다.
개수대를 잡고 있던 몸이 무너지고, 시야가 뒤집혔다.
그러자, 순식간에 장소가 바뀌었다.
“렉스터.”
막 잠자리에 들었던 렉스터는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네놈에겐 시간 개념이 없는 거냐? 예의라는 걸 갖춰보는 게 어때.”
렉스터는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인영을 보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짜고짜 나타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줘도 매번 이 모양이었다.
‘아니, 애초에 저주한테 예의를 운운하는 것도 웃기군.’
피곤함에 찌든 눈 밑을 꾹 누른 그가 ‘어둠’에게 물었다.
“새벽에 쳐들어온 이유가 뭐냐.”
“시나이즈 공작가에 심어뒀던 파편이 파괴됐다.”
“뭐?”
또 별 시답지 않은 이유겠거니 하고 무시하던 렉스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낮에 하나, 그리고 방금 다섯 개 모두 제거당했어.”
“네 입으로 분명 절대 들키지 않을 거라 말했을 텐데?”
“그건 리아가 개입하기 전의 이야기지.”
“리아?”
낯선 이름에 눈을 찌푸렸던 렉스터가 이내 기억났다며 눈썹을 들썩였다.
“딜리언이 싸고도는 그 여자? 그 여자가 제거했다고?”
“그래.”
그러고 보니 그 여자가 특별한 힘을 쓴다고 했지.
어둠의 파편까지 제거할 정도면,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렉스터가 턱을 문질렀다.
“딜리언 그놈이 평민에, 별 볼 일 없는 그 여자랑 약혼길래 미친 줄 알았더니. 역시 쓸모가 있어서, 컥!”
불시에 달려든 어둠이 렉스터의 목을 움켜쥐었다.
“입 조심해. 평민? 별 볼 일 없는 여자? 너같이 하찮은 게 입에 올릴 이름이 아니다.”
어둠은 렉스터의 목을 힘껏 조였다. 그 억센 힘에 렉스터의 얼굴이 붉게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이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뒤늦게 어둠이 힘을 풀었다.
“쿨럭. 쿨럭, 컥.”
“하마터면 죽일 뻔했네.”
그건 곤란하지.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어둠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렉스터의 붉은 눈을 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눈은 네 것이 마음에 들었는데…….”
어둠이 아쉽다며 입맛을 다셨다.
눈을 파버릴 기세로 다가온 날카로운 손끝에 렉스터가 침을 꿀꺽 삼켰다.
“쫄기는, 걱정마. 더 갖고 싶은 눈이 있으니까.”
천천히 손을 물린 어둠이 즐거운 듯, 흥얼거렸다.
렉스터는 그 모습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계획이 틀어졌는데 뭐가 그렇게 좋냐.”
“리아가 제 발로 수도에 올라왔는데 당연히 좋지. 렉스터 어떻게 생각해? 역시 내가 직접 만나러 가야겠지?”
“소용없는 짓이다. 딜리언이 그 여자를 얼마나 싸고도는지 알고 하는 말이냐? 황궁보다 더 삼엄한 경비로 24시간 내내 그 여자를 지키고 있다고.”
“그래서 뭐, 다 죽이면 그만이야.”
“그럴 힘은 있고? 괜한 오기 부리지 말지.”
황실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시나이즈 공작가에 쳐들어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절대 안 될 일이다. 그건 렉스터에게도 위험한 행위였다.
지금까지 그가 저지른 일이 다 밝혀진다면, 시나이즈 공작가는 물론이요, 블렌트 가문에서까지 쫓겨날지도 몰랐다.
공작가의 정보를 캐내려다 들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했다.
“괜히 설치다가 정체가 드러나면 큰일이니까 몸이나 사려.”
어둠은 강하다. 하지만 그는 아직 힘을 다 찾지 못했다.
그걸 알면서도 어둠은 이따금 막무가내로 굴었다.
‘도대체 그 여자가 뭐길래 딜리언이고 이 자식이고 정신을 못 차리는 거지?’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렉스터가 짜증스레 손을 휘저었다.
“정 그 여자를 만나고 싶으면 건국제를 노리든지.”
앞으로 이 주 뒤, 로하임 제국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건국제가 열린다.
무려 일주일이나 계속되는 화려한 축제에 다들 긴장을 늦추게 될 터.
“한 번쯤은 그 요새 밖으로 나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