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 * *
대신관은 딜리언이 돌아오기 전에 저택을 떠났다.
곧 돌아올 딜리언의 분노를 피하기 위한 해리스의 조치였다.
막무가내로 뚫고 들어왔으면서 후환이 두렵긴 했는지 돌아가는 발걸음이 다급했다.
‘리아 님. 오늘은…….’
‘헉. 해리스 씨. 저 방금 소름 돋았어요. 해리스 씨까지 그러지 마세요.’
갑자기 존대를 쓰는 해리스에 기겁하며 질색을 하자 그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리아 씨, 오늘 막무가내로 들어온 점 죄송합니다.’
괜찮다 손사래를 쳐도 해리스는 미안하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딱히 화가 나진 않았는데.’
당황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딜리언이 얼마나 철벽으로 쳐냈길래 해리스가 이런 강경책을 썼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지켜준다는 말은 사실이었구나.’
대신전의 침입은 딜리언에 대한 신뢰도와 믿음만 더욱 높여준 셈이었다.
“리아, 에런이랑 만나보니 어떻더냐.”
“좋은 사람 같아. 그렇게 깨끗한 신성력은 처음 봤어.”
그리고 신성력이 눈에 보일 정도로 강한 사람을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혹시,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한 것과 달리 그는 신사적인 사람이었고, 신전으로 와달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부탁마저도 저자세로 정중하게 하여 내가 확실히 갑이라는 걸 상기시켜 주었다.
‘나는 평생 을이었는데 갑이 되는 상황이 올 줄이야.’
그리고 에런이 아니었다면 어둠의 파편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을 거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오늘 만남은 꼭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신전과 함께 어둠을 잡을 생각은 없지만.’
고개를 들지 않는 대신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각해보겠다고 했을 뿐.
‘하지만 이미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대신관한테 말려든 걸지도.’
가라앉은 내 표정을 본 나단이 어깨 위로 올라와 나를 다독였다.
“썩 내키지 않지?”
“응, 나보고 미끼가 되어 달라는 거잖아?”
어둠을 잡는다면 좋지만, 거기서 내 역할은 분명 미끼겠지.
아주 먹음직스러운 떡밥이 아닐까? 그러니 대신관도 미안함을 숨기지 못하는 것일 테고.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눈앞에 훤히 그려지는데 냉큼 ‘합시다!’라고 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나.
“뭐, 그런 의미도 없지 않아 있지.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전부 네가 원하는 대로 될 테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라……. 잘 모르겠다.
내가 원했던 건 수도로 오는 게 아니라, 옆 나라로 피신하는 거였다.
‘원작이 시작되면 이곳에 없을 줄 알았는데…….’
수도에 온 것도 모자라 이렇게 깊이 엮여버릴 줄이야.
이쯤이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엑스트라는 무슨. 히든 캐릭터잖아.’
넘치는 신성력, 딜리언의 저주를 억누를 수 있는 강한 힘, 그리고 어둠이 살려준 유일한 존재.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설정을 엑스트라한테 주겠어?
하나만 갖고 있어도 놀랄 상황에 저걸 전부 가진 사람이 나였다.
“하아아.”
단전 깊은 곳에서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태풍에 휘말려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소파에 늘어져 한참 동안 한숨만 푹푹 쉬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하늘에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 종이와 펜을 꺼낸 나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베개 위에 몸을 묻은 나단이 코를 골았다.
“커어어.”
“잘 자네.”
낮잠을 자는 나단을 확인한 나는 다시 펜을 빙글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차근차근 정리해보자.’
이 이야기는 세상을 구하는 성녀 아이나의 일대기이다.
지금껏 여러 번 말했지만, ‘선’인 아이나와 대립하는 존재는 ‘악’인 딜리언.
신전을 증오하는 딜리언은 아이나의 존재를 거슬려했고, 아이나 또한 저주에 걸린 딜리언을 제거 대상으로 인식했다.
‘첫 만남은 아마, 저번 달에 열렸을 황실 무도회였지?’
하지만 빌헬름에서 기억을 잃은 딜리언은 황실 무도회에서 아이나를 만나는 대신, 검은 숲에서 나를 만나버렸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고, 타임라인이 어그러져 버렸다.
대립각을 세워야 하는 둘은 서로의 얼굴도 모를 터.
‘……나 때문이네.’
나쁜 의미로 아이나에게 신경을 집중시켜야 할 딜리언은 정작 내게 꽂혀 나를 아내로 만들 계획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악, 어둠이 등장했다.
이쪽은 원작에 없던 존재다.
나도 처음 본 존재라 제대로 대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딜리언보다 이쪽이 위험해.’
딜리언이 최종 보스로 격상하는 건 그가 치명상을 입고 저주에게 자아를 빼앗겼기 때문.
내가 곁에 있는 이상 그럴 일은 없다. 그가 폭주한다 하더라도 억누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전에 렉스터 그 자식을 치워버릴 작정이었다.
‘설마, 어둠이 등장한 것도 나 때문은 아니겠지?’
아이나에겐 시련이 필요한데, 내가 딜리언의 곁을 지키면서 그의 위험성이 현저히 낮아졌으니까.
그녀를 위해 새로운 시련이 던져진 걸지도 몰랐다.
이게 바로 나비효과인가, 아니면 내 업보인가.
“망했네…….”
이렇게 되면 원작대로 흘러가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물론 원작이 박살 난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내가 위험에 빠질 일도 없고, 모두 행복한 일만 남은 셈이니까.
하지만 아이나를 견제하는 세력은 딜리언만이 아니었다.
사실, 딜리언은 저주에 먹히기 전까진 이렇다 할 공격을 하지 않았다.
아이나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딜리언에겐 모기가 앵앵거리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작 그녀를 노린 건, 황태자와 적대 세력이던 3황자였다.
‘지금쯤이면 황태자와 3황자가 박 터지게 싸우고 있겠네.’
원작 시작부터 완결까지 굵직한 사건 몇 개를 정리하던 나는 멈칫했다.
“어? 이상한데?”
나는 고개를 들어 달력을 보았다.
손가락을 접어가며 계산을 해보니 지금쯤 황궁에서 황태자를 노린 테러 사건이 터졌어야 할 시기였다.
“내가 잘못 알았나?”
아니다. 분명 이쯤이다.
테러로 다친 황태자와 그를 치료하러 온 아이나가 한층 더 가까워지는, 황태자 강화 에피소드였다.
“테러가 일어났으면 수도에 왔을 때 분명 그 소식을 들었을 텐데…….”
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고민한들 답이 나올 리가.
일개 평민인 내가 황궁 상황을 알 방법은 오직 하나.
“딜리언. 언제 오려나.”
그가 얼른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 * *
한편, 리아가 애타게 기다리는 딜리언은 황태자와 독대 중이었다.
“고맙네. 어려운 부탁이었는데 들어주어서. 이번 일로 공의 충성심을 다시 한번 확인했어.”
“알아봐 주시니 다행입니다.”
‘감사하다’가 아닌 ‘다행이다’. 황태자의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으나, 카시스는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오만하지만 그게 딜리언 나름대로 예의를 차린 말이었다.
툭, 치면 찢어질 얄팍한 예의에 퍽 자존심 상했지만, 용의 심장을 찾아와준 딜리언과 대립각을 세우는 건 좋지 않았다.
딜리언의 진심이야 어찌 됐든, 현재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시나이즈 공작이 저와 부딪칠 생각이 없다는 걸 보여주었으니까.
‘나를 지지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마누스에게 힘만 실어주지 않으면 되는 일이야.’
세간에서 시나이즈를 부르는 이름은 킹 메이커.
그가 선택한 자는 다음 대의 황제가 된다.
마음 같아선 딜리언이 자신을 선택하길 바랐지만,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
언제 어디서 3황자, 마누스와 접점이 생길지 몰랐다.
그래서 카시스는 딜리언의 진심을 확인해보고자,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어 빌헬름에 보낸 것이었다.
“빌헬름이 워낙 흉흉한 곳이라 걱정했네. 다치지는 않았는가?”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다행이군. 그대가 다쳤다면 내 마음이 편치 않았을 거야.”
입에 발린 소리에 딜리언은 말없이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지루하군.’
용의 심장도 전했겠다, 이쯤에서 자리를 파했으면 좋겠는데 카시스는 견제에서 회유로 전략을 바꿨는지 딜리언의 발을 붙잡았다.
은근히 제 편에 붙으라는 카시스의 제안에 딜리언은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는 중이었다.
지금 딜리언의 관심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리아 씨가 잠들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데.’
그래야 마중 인사를 받을 것 아닌가.
오늘 아침에도 잠에 취한 그녀를 깨워 겨우 들은 인사였다. 마중 인사만큼은 제정신일 때 들어야 했다.
그래도 애벌레처럼 침대 위를 굴러다니던 리아를 떠올리자 기분이 풀렸다.
처음 보는 딜리언의 편안한 미소에 멈칫한 카시스는 미약한 기대를 품고 그에게 물었다.
“공작, 함께 저녁을 드는 건 어떻소?”
“그건 곤란할 듯싶군요. 밖에서 쥐새끼가 저희 얘기를 엿듣고 있는지라.”
그 말에 카시스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이야기가 새어나갈까 봐 하인도 전부 물렸는데 대체 누가……!
마누스가 보낸 첩자라 의심한 카시스는 거칠게 문을 열었다.
차갑던 그의 얼굴은 작은 체구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이나?”
“황태자 전하, 손님이 오셨다 하여 차를 준비해왔어요.”
아이나가 트레이를 내밀며 수줍게 웃었다.
“고맙다. 잘 먹으마.”
“누굽니까.”
카시스의 등에 가려진 아이나를 정확히 잡아낸 딜리언이 묻자, 카시스의 얼굴에 낭패가 떠올랐다.
대신전과 딜리언의 사이를 알고 있는 카시스는 성녀인 아이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몰라 말을 끌었다.
“큼, 그러니까 이 여인은 말이다…….”
딜리언은 단번에 여자의 정체를 알아챘다.
‘이쪽이 그 유명한 성녀군.’
턱 끝에서 살랑거리는 은발과 녹안,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마에 찍힌 성흔.
‘그렇게 대단하다더니, 위상만큼은 아니군.’
딜리언에게 신성력을 알아보는 눈은 없다. 하지만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성스러움의 정도만을 따지자면 리아가 훨씬 더 성스러웠다.
“성녀겠지요.”
설마 알아볼 줄은 몰랐는지 놀란 카시스가 얼굴을 굳혔다.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제가 죽이기라도 할까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