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54)화 (54/143)

54화.

“그럼, 설마 방금 있었던 일 전부…….”

“네, 전부 전해졌을 겁니다.”

젠장. 속으로 욕을 지껄인 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둠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왔더니, 이렇게 빨리 위치가 발각될 줄이야.

‘나는 왜 조용히 살 수 없는 거야!’

리아가 이를 빠득 갈았다.

“리아 님, 어둠이 왜 신성력을 가진 사람을 잡아먹는지 아시나요?”

“그건, 신성력을 좋아해서 아닌가요?”

맛있어서 먹으러 오는 거 아니었어?

리아의 대답에 에런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삿된 존재가 신성력을 좋아할 리가 없죠. 어둠이 좋아하는 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그리고 불안해하는 마음.

“그 부정적인 감정들이 어둠의 원동력이자 최고의 식사입니다.”

그러게. 생각해보니 그렇다.

저런 질척하고 흉흉한 기운을 품는 존재가 신성한 힘을 좋아할 리가.

“……신성력은 방해되는군요.”

“네, 어둠은 ‘악’이니까요. 저희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겠죠.”

그래서일까, 다른 곳보다 대신전의 피해가 막대했다.

지난 두 달간 떠나보낸 가족들을 떠올린 에런은 참담함을 숨기지 못했다.

비교적 안전한 곳에 있던 리아가 무사히 수도로 올라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에런이 건강한 리아를 보며 안도하던 그때, 그녀는 다른 생각에 잠겼다.

눈엣가시라, 분명 그럴 거다. 신성력을 가진 자들은 어둠을 타격을 입힐 수 있으니까.

“치밀한 녀석입니다. 분신을 풀어 뭉쳐 다니며, 신관들이 신성력을 쓰기 전에 먼저 숨통을 끊어버리죠.”

떠나간 신관들을 떠올린 에런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절 찾은 이유도 그 때문일까요? 위협이 되기 때문에, 미리 제거하기 위해서?”

“아뇨, 리아 님은 먹이, 혹은 제거 대상으로 여겨지는 저희와는 달라 보입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리아는 특별하다.

“다르다니요? 아니에요. 저도 먹이로 인식한 게 분명해요.”

“단순히 먹고자 했다면, 리아 님은 지금 이 자리에 없겠죠.”

무례한 발언에 루도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세라와 키라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위험했어요. 딜리언 씨가 아니었으면…….”

“리아 님, 지금까지 어둠과 접촉한 자는 전부 죽었습니다.”

뜻밖의 소식에 리아가 숨을 삼켰다.

“……네?”

“리아 님이 처음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에런의 올곧은 눈이 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무례를 저지르면서까지 리아 님을 뵈러 왔습니다. 당신만이 이 모든 상황에서 예외적인 존재기 때문에.”

어둠이 나타난 지 어느새 두 달.

그동안 황실과 대신전은 어둠을 잡기 위해 수없이 많은 함정을 팠지만, 어둠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파편을 심은 숙주를 이용해 정보를 빼가는 탓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리아가 나타났다.

“리아 님은 어둠에게서 살아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어둠이 처음으로 놓친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어둠이 찍은 사람 중 살아남은 자는 없다.

운 좋게 살아남아 정보를 넘겨주는 이들이 존재하긴 했으나,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전하께서 구해줬기 때문에 살았다고 하셨습니다만, 어둠이 원했다면 그 자리에서 리아 님을 바로 삼켰을 겁니다.”

그 말에 리아는 떠올렸다. 계속 저를 주시하던 시선을.

만약 식사를 원했다면, 혹은 제거가 목적이었다면 딜리언을 만나기 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리아 님을 살려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리아 님 주위를 맴돌겠죠.”

“설마, 제가 여기에 있는 걸 알고 기사님께 기생한 건가요?”

그렇게 방비를 했는데도 어둠이 숨어들어왔다. 그렇다면 딜리언의 곁도 더는 안전하지 않다는 말이다.

‘시나이즈조차 안전하지 않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당황한 리아의 물음에 에런이 고개를 저었다.

“리아 님께서 여기에 계신 걸 알고 심어둔 건 아닐 겁니다.”

“확실한가?”

나단의 물음에 에런이 확언했다.

“그 기사의 몸속에 있던 파편은 성체입니다. 두 분도 보셨다시피 한 뼘만 한 크기였죠.”

사람의 몸에 막, 기생하기 시작한 어둠은 대개 엄지손톱만 하다.

그 작은 몸은 숙주의 생명을 빨아먹으며 크기를 키우고, 그 몸이 한 뼘만 해진 순간, 마침내 신경을 장악하는 거다.

시야와 청각을 완전히 공유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보름.

그리고 리아가 공작저에 발을 들인지는 이제 일주일 째.

에런의 말처럼 그녀를 감시하기 위해 심어둔 것은 아니었다.

“작정했다기보단, 우연히 발견했다고 보는 게 좋겠죠.”

무거운 이야기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리아는 버릇처럼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원작에선 본 적 없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 등장에 리아는 머리가 복잡했다.

“대신관님, 어둠의 정확한 정체가 뭔지 아시나요?”

“제국 역사상 가장 위험하고 삿된 것이라 알려진 저주입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부정적인 감정을 먹고 자라는 거구나. 리아는 제법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지 않으시군요.”

“어둠이 가진 기운이 저주와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어쩌면 저도 모르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 불길한 기운은 보통의 마물과는 확연히 달랐으니까.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저주가 깨어난 적 없었습니다만, 최근 누군가 그 봉인을 푼 것 같습니다.”

“어떤 미친 사람이…….”

무심코 욕을 뱉은 리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성스러운 대신관 앞에서 욕을 하다니.

“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속이 다 시원하네요.”

다행히 사람 좋은 에런은 웃으며 리아에게 더 욕해도 된다고 다독여주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단은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에런을 불렀다.

“그 저주가 풀렸다면, 아마 저주를 풀어준 자가 있을 거다. 계약 형태일 확률이 높아.”

“네, 그리고 저희는 그 계약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 인간만 찾으면 어둠까지 한 번에 보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리아 님, 이런 부탁을 드려 송구하나, 도움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에런은 리아를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다.

“무슨, 당장 일어나세요!”

깜짝 놀라 일어난 리아가 그를 만류했지만, 에런은 꿋꿋했다.

제 주군이 한낱 평민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을 본 파비안의 눈이 사나워졌다.

어서 대답하라는 날카로운 눈빛에 리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까부터 나를 못마땅히 여기더니, 이젠 대놓고 저러네.’

파비안의 뾰족한 시선에 뺨이 뚫릴 것 같았다.

“대신관님. 저는…….”

가장 고귀하고 신성한 사람의 정수리를 바라보는 리아의 눈이 심란했다.

* * *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에런은 리아가 고민 끝에 뱉은 말에 얌전히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함께하겠다는 확답은 아니었으나 에런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지난 1년간 자취를 감추고 피했던 그녀이다. 당연히 단호하게 거부당할 줄 알았던 에런으로선 아주 달가운 답이었다.

예상보다 더 즐거운 만남에 에런은 쉬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퐁퐁 솟아나는 꽃에 파비안이 이해할 수 없다며 말했다.

“에런 님. 어째서 저런 자에게 머리를 숙이신 겁니까.”

“파비안.”

에런은 불경한 말을 내뱉는 파비안을 타일렀으나 흥분한 그는 경고를 알아듣지 못했다.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저 여인인 겁니까. 우선시해야 할 사람은 성녀가 아니었습니까?”

대신관이 만나러 가야 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나여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황실에 잡혀있는 그녀를 구해야 하건만, 대신관이 찾은 사람은 평민.

그것도 신전을 멸시하는 시나이즈의 예비 안주인이었다.

평소 딜리언을 좋지 않게 보던 그로서는 리아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심지어 제가 가장 존경하는 대신관이 저자세로 나오니 그의 적대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높이 치솟았다.

“파비안. 네가 성녀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건 알지만, 말은 가려서 해라.”

해리스의 경고에도 파비안은 멈추지 않았다.

“우선순위는 성녀입니다. 무려 백 년 만에 나타난 성녀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도대체 뭐라고 성녀를 밀어내고…….”

“빛.”

처음이었다. 에런이 상대의 말을 끊어낸 것은.

낯선 광경에 파비안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리아 님은 빛이란다. 파비안.”

자신이나 성녀와는 비교도 안 될 막중한 사명을 갖고 태어난 하나뿐인 빛.

에런은 기사를 치료하던 리아를 떠올렸다.

그녀의 주변을 맴돌던 황금 나비를. 술렁이던 자연을.

‘신이 사랑한 아이.’

에런은 리아를 만나기 전까진 신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건 자신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신성력. 압도적인 힘의 차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찬란하고 선명한 색깔.

아, 빛이란 저런 거구나.

처음 느끼는 강렬한 감정에 에런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지그시 눌렀다.

처음으로 느껴본 경외심이었다.

“파비안. 네 말대로 성녀는 백 년 만에 나타난 신탁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리아 님 또한 신탁의 주인이란다.”

“네? 또 다른 신탁이 있었단 말입니까?”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신탁의 주인이라니.

“아주 오래전, 선대의 선대로부터 내려오던 신탁이 하나 있었지.”

[로하임의 끝, 저주받은 땅에서 빛이 태어날지니]

[악이 세상을 집어삼킬 때, 어둠을 뚫고 나타나 너희를 구원하리라]

“그분께서 우리를 빛으로 인도할 거란다.”

이 세상에서 어둠을 없앨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리아뿐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