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 * *
사람들은 모두 입 모아 말했다.
대신관은 세상에서 가장 선한 자라고.
‘그 말이 맞네.’
그는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선한 자다.
대신관의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렇게 깨끗한 신성력은 처음 봐.’
그 어떤 때도 묻지 않은 순수한 빛에 나는 감탄을 터트렸다.
나를 보며 미소를 짓던 에런은 나단을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
신과 가장 가까운 자. 황제와도 같은 위치에 있는 자.
대신관이 고개를 숙이자 기사단 내에서 놀란 숨이 터져 나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단 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나야 잘 지냈지. 너는 그때와 달라진 게 없구나. 바로 알아보겠어.”
대신전을 거절한 것치곤, 나단의 말에서 짙은 반가움이 느껴졌다.
“못난 자식을 신께서 아껴주시어 이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예쁘니까 계속 옆에 두려고 그러는 것이지. 별 걱정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에런의 뒤로 익숙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가 살며시 휘어지며 내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래, 혼자 올 리가 없지.’
에런의 최측근이자, 딜리언과도 가까운 자.
성기사 단장. 해리스 트리시오가 여기서 빠질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선 기사.
성기사 부단장이자 성녀, 아이나의 소꿉친구 파비안.
‘어떻게 한 번에 원작 인물 둘을 만나냐. 그것도 전부 거물급.’
라인업 한번 화려하네. 너무 화려해서 숨이 턱 막혀.
한 명은 이미 예전에 만났었으니, 여기에 황태자 카시스와 아이나까지 나타나면 게임 끝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루도를 비롯한 기사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
순식간에 생긴 거대한 성벽에 나는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했다.
“대신관께서 시나이즈에 방문하신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검에 손을 가져다 댄 루도가 그들을 경계하며 물었다.
“누구의 허락으로 들어오셨습니까.”
“누구의 허락도 없었습니다. 그저, 리아 님을 뵈러 왔을 뿐.”
그러니까, 딜리언이 없는 틈을 노려 당당히 침입했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나 때문이라고, 콕 집어서.
“지난 일주일간, 리아 님께 연락을 드렸으나 단 한 번도 답이 돌아오지 않아 너무 걱정되는 마음에 이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 연락했다니.
나를 지켜준다던 딜리언이 내 귀에 들려오기 전에 전부 차단한 게 분명했다.
그래도 그렇지, 설마 직접 행차할 줄은 몰랐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비아냥거림이 아닌, 순도 백 퍼센트의 걱정과 안도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특히나, 빌헬름의 눈을 전부 녹여버릴 것 같은 미소 때문에 더더욱.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음에도 말이다.
‘큭. 역시 대신관……!’
설마 내 양심을 후벼 팔 줄이야.
“리아 님, 나단 님. 잠깐 대화를 나눌 수 있으신지요.”
“그건 곤란,”
“아까 그것에 대해 이야기도 나눌 겸.”
거절의 말을 뱉기도 전에 대신관이 선수를 쳤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얼굴로 말이다.
* * *
우리는 저택의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나와 에런이 마주 앉았고, 내 옆에 나단이 착석.
에런의 뒤로 해리스와 파비안이, 그리고 내 뒤로는 세라와 키라 그리고 루도가 호위처럼 붙었다.
나는 차를 마시는 에런을 흘긋 살폈다.
에런 해밀튼.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나 실제 나이는 200살 이상. 그가 대신관 자리에 앉은 게 올해로 200년 째였다.
역대 대신관 중 가장 자애롭고 선한 자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파비안 첼슨.
아이나의 소꿉친구이자, 성기사단의 2인자.
차갑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한 남자의 정석인 사람으로, 일자로 다물린 입술과 날카로운 눈매가 그의 성정을 보여주는 듯했다.
실제로 그는 아이나 외의 사람에겐 가시를 세우는 걸로 유명했다.
‘그래도 그렇지, 초면인데 이렇게 노려보기 있냐.’
파비안으로부터 시선을 뗀 나는 에런을 바라보았다.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지,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다정한 눈빛에 눈가를 움찔거렸다.
나는 에런을 향한 세간의 호평에도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지금껏 내가 본 신관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나사가 빠지고 썩어빠진 인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를 악물고 도망쳤던 게 무색할 정도로 그는 선한 사람이었다.
‘나단이랑 느낌이 비슷하단 말이지.’
그래서 그런가, 괜히 친근하게 느껴졌다.
“미카 님도 오고 싶어 하셨습니다만, 일이 바쁘셔서 저만 왔습니다.”
“미카?”
처음 듣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나단이 답했다.
“나와 같은 신수다. 계약자는 에런이지.”
그와 나 같은 사이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분들도 리아 님을 만나뵙길 고대하고 계십니다. 다음에 함께 뵙는 게 어떠신지요?”
에런은 세상 다정한 얼굴로 당당하게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에 또 이렇게 무단침입하시면 딜리언 씨가 화내실 텐데…….”
감당할 수 있겠냐는 속뜻에 에런이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그럼 리아 님이 대신전을 찾아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이토록 자연스럽게 신전으로 불러들이려 하다니.
‘이백 년을 허투루 산 건 아니구나.’
노련함이 남달랐다.
“부담을 드리려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부드럽게 달래기까지!
“신전의 일은 전부 미뤄두고, 사람 대 사람으로서 리아 님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은 마음이라 조금 욕심을 내었습니다.”
그가 민망한 듯 뺨을 긁적였다. 새하얀 피부에 띤 미약한 홍조가 눈을 사로잡았다.
“늙은이랑 놀면 재미없으시겠지만, 종종 와서 말동무가 되어주시면 좋겠군요.”
“……그거면 되나요?”
정말 사심이라곤 느껴지지 않아 물었더니, 에런이 갑자기 내 눈치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역시 본래 목적이 있었구나! 나를 속인 거야.
홀로 배신감을 느끼던 그때,
“같이 신성 공부를 하면 어떨까 하는데 혹, 관심이 있으신지요.”
찻잔을 든 손이 삐끗거렸다.
거의 다 마셔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흘릴 뻔했다.
“신성 공부라면 어떤……?”
“신성력의 운용이나 이론, 그리고 ‘오벨러스’ 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좋습니다.”
에런은 어딘가 불이 붙은 사람처럼 신나게 말했다.
점잖던 사람이 약을 맞은 것처럼 갑자기 돌변했다.
옅은 홍조가 떠오른 얼굴에 당황한 나는 에런의 호위를 맡은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들은 익숙한 듯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에런은 대신관이 되기 전에는 신학 학교를 다녔단다.”
그래서 학구열이 남다르구나.
그렇다. 에런은 그저 창조신, 오벨러스의 열렬한 덕후였다.
“그래서 깨끗한가 보네.”
흘리듯, 중얼거린 말을 잡아낸 에런이 나를 향해 몸을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세라와 키라의 몸이 움찔거렸다.
“혹시, 보이십니까?”
그냥 깨끗하다고만 말했는데 바로 알아듣는 대신관이 신기했다.
“보통은 안 보이지만, 대신관님께선 워낙 대단한 분이라 보이네요.”
여기서 더 숨겨서 뭐 하나. 솔직하게 답하자 갑자기 에런에게서 신성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공격으로 여기고 긴장했던 나는 눈앞에 펼쳐진 생경한 광경에 멈칫했다.
머리 위에서 피어나는 저건 설마,
“……꽃?”
퐁퐁, 피어난 꽃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당황한 나와 달리 에런의 눈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팝콘 터지듯 튀어 오른 꽃이 내 뺨에 튕겨 바닥으로 떨어졌다.
“…….”
이게 뭐야. 아프진 않았으나, 반사적으로 뺨을 문지르며 해리스를 바라보자 그가 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게……. 전에 말씀드렸지만 에런 님께선 기분이 좋으시면 꽃을 피우십니다.”
내 머리 위로 장미가 툭, 떨어졌다.
아, 기억났다.
시나이즈 공작저로 떠나기 전, 잠시 남은 시간에 해리스에게 대신관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다.
‘대신관님은 어떤 분이세요?’
가장 선한 자, 가장 상냥한 자, 그리고 제국에서 가장 강한 자.
수많은 칭찬 사이에 이상한 말이 하나 끼어 있었다.
‘기분이 좋으시면 꽃을 피우십니다.’
나는 그 말이 꽃처럼 활짝 웃는다는 뜻인 줄 알았다.
정말로 꽃을 피운다는 소리일 줄은 몰랐지.
* * *
에런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진정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응접실 한구석엔 쓸어 모은 꽃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간신히 붉어진 얼굴을 잠재운 에런은 저를 부르는 리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대신관님, 이제 알려주세요. 그 벌레는 뭐였죠?”
“리아 님은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죠.”
그래, 실은 어느 정도 추측하고 있다.
불길한 기운, 타르 같은 점액질, 슬라임처럼 물컹한 성질.
딱딱하게 굳은 리아의 얼굴을 바라본 에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입니다.”
“하지만 제가 본 어둠이랑은 달랐어요.”
내가 본 어둠. 그러니까 그림자라고 불리는 마물은 사람처럼 컸다. 저런 벌레 같은 게 아니라.
“정확히는 어둠의 파편입니다.”
“파편……?”
파편이라니, 무슨 사혼의 구슬 조각이야?
“저 파편으로 뭘 할 수 있죠?”
“정보를 수집합니다.”
“정보……? 어떻게요?”
저 작은 벌레가 어떻게 정보를 훔치는 걸까.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리아의 모습에 에런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파편을 심어, 숙주에게 기생해 시야를 공유하고, 대화를 전해 듣습니다.”
에런은 마른 침을 삼키는 리아를 향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종의 도청장치인 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