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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52)화 (52/143)

52화.

누군가 했더니 지금쯤 집무실에서 죽어나고 있을 줄 알았던 딜리언이었다.

“어떻게 왔어요? 안 바빠요?”

나는 흙이 묻은 손을 털어내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아무리 바빠도 리아 씨랑 산책할 시간은 있습니다.”

삭막한 온실과 두꺼비 집처럼 볼록하게 쌓인 잡초를 본 딜리언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리아 씨 온실이랑 달리 너무 볼품없어서 보여드리기가 민망하네요.”

“그래, 엉망이다. 엉망이야.”

나단이 주변을 둘러보며 쯧쯧, 혀를 찼다.

나는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빈말로라도 괜찮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시나이즈 공작가의 온실은 어떨까 기대하고 왔는데, 아쉽네요.”

그러자 딜리언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럼, 리아 씨가 꾸며볼래요?”

“뭐를요, 온실을요?”

당황한 내가 되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돼요?”

“물론이죠.”

내심 온실을 가꾸고 싶었던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던 딜리언이 내 뺨을 문질렀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눈을 움찔거리자, 귓가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 아내가 하고 싶다는데 못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집사에게 말해둘 테니 원하는 대로 하세요.”

“약혼만 했지, 아내는 아닌데요?”

하지만 딜리언은 내 말을 못 들은 척 웃어넘겼다.

딜리언은 흙이 묻어나온 엄지를 내게 보여주며 웃음기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작 여기에 데려올 것을. 제 생각이 짧았군요.”

“그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란 쉽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어린아이처럼 신이 난 나는 딜리언의 팔을 끌고 다니며 각 구역에 무슨 꽃을 심을지 이야기했다.

하지만 딜리언의 시선은 온실이 아닌, 내 얼굴에 꽂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그 눈빛이 부끄러워, 나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 * *

딜리언은 쉴 틈 없이 조잘거리는 리아를 보며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저도 의식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단은 속이 울렁거려 더는 참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단이 떠났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단에겐 눈물 나게 슬픈 일이었다.

리아가 스무 번째 꽃의 이름을 입에 올린 순간이었다. 잠자코 리아의 말에 추임새를 넣으며 경청하던 딜리언이 입을 열었다.

“리아 씨. 저는 내일 황궁에 다녀오려 합니다.”

“황궁이요?”

“황태자께서 드디어 저를 볼 생각이 드셨거든요.”

그가 수도로 돌아온 지도 벌써 일주일.

그 일주일간 딜리언의 알현 신청을 별의별 이유로 거절하다가 마침내 오늘 승인한 것이었다.

‘황태자 나름의 견제 방법이겠지.’

하지만 딜리언에겐 스무 살밖에 안 된 어린 청년의 시기와 견제가 우스울 뿐이었다.

“용의 심장 때문이에요?”

리아는 수도로 올라오던 날 들었던 딜리언이 빌헬름에 오게 된 이유를 떠올렸다.

‘용의 심장을 찾았다는 얘기에 깜짝 놀랐었지.’

저도 한 번도 보지 못한 꽃을 찾아내다니. 새삼 딜리언이 대단했다.

그리고 그 전설의 꽃을 찾아오라 명한 황태자의 터무니없는 명령에 한숨이 나왔다.

‘생각보다 견제가 심하네.’

황제와 달리 딜리언을 견제했던 황태자를 떠올린 리아는 괜스레 걱정됐다.

그야 딜리언은 악당이었고, 황태자는 주인공이었으니까.

리아의 얼굴이 점차 흐려졌다.

설마 리아가 자신을 걱정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딜리언은 자연스럽게 어둠을 떠올렸다.

“어둠은 걱정 마세요. 저택에 결계를 쳐 두었으니 개미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할 겁니다.”

“딜리언 씨도 내일 조심히 다녀와야 해요.”

리아의 걱정스러운 한마디에 딜리언은 멈칫했다.

저를 향한 걱정은 여전히 낯설었지만, 동시에 좋았다.

“그 말, 내일도 해주실 거죠?”

“얼마든지요. 무사히 다녀오면 마중도 하러 나갈게요.”

역시, 리아의 걱정은 퍽, 기분 좋은 것이었다.

누가 들어도 사이좋은 부부 같은 대화에 딜리언은 기분 좋게 웃었다.

* * *

이튿날.

나는 빌헬름에서 입던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온실로 향했다.

집사에게 부탁한 물품이 도착하려면 멀었지만, 지저분한 잡초를 뽑으며 온실을 정리해둘 생각이었다.

“딜리언이 없으니 집이 다 조용하구나.”

딜리언은 어제 말한 대로 이른 아침 황궁으로 향했다.

단잠에 빠져있던 나를 찾아와 기어코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듣고 말이다.

‘……다녀오세요.’

‘다녀올게요. 부인.’

걸걸한 목소리로 인사한 나와 달리 달콤했던 목소리가 떠오르자 귓가가 달아올랐다.

“집중! 정신 집중!”

스스로를 다그치며 잡초를 뽑던 나는 뻐근한 허리를 두드렸다.

“리아, 밖에 나가서 숨도 좀 돌려야지.”

“그럴까?”

나단의 말대로 온실 밖으로 나오자 어디선가 힘찬 기합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내밀자, 저 멀리 연무장에서 훈련 중인 기사단이 보였다.

“오호, 부지런한 녀석들이구나.”

“있지, 나단. 우리 저기 가볼까?”

살면서 기사를 볼 일이 어디에 있나. 기사단 훈련은 내가 꼭 보고 싶었던 장면 중 하나였다.

근육! 근육! 속에서 어서 등짝을 보러 가자며 아우성을 쳤다.

“그것도 좋지. 요즘은 어떤 훈련을 하는지 보러 가자꾸나.”

나단을 앞세워 연무장으로 향한 나는 연무장 근처에 앉아 훈련을 훔쳐봤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 벗은 사람은 없었지만, 군무처럼 각 잡힌 훈련은 한눈에 봐도 멋있었다.

넋을 놓고 훈련을 구경하던 그때.

“마님!”

귀신같이 나를 알아본 루도가 바람처럼 달려와 방방 뛰었다.

주인을 발견한 강아지 같은 그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루도 경, 훈련 안 해요?”

“지금은 자율 훈련 시간입니다!”

늘 그렇듯 앳되어 보이는 귀여운 모습에 문득 그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루도 경은 몇 살이에요?”

다짜고짜 건넨 무례한 질문이었건만 루도는 씩씩하게 답했다.

“열일곱입니다!”

세상에. 애잖아.

생각보다 어린 나이에 놀라야 하는지, 아니면 그 나이에 한자리를 꿰찬 것에 놀라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대단하-.”

그때였다.

“악!”

어디선가 고통 섞인 신음소리가 들렸다.

고통스러운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리자, 발목을 잡고 바닥에 주저앉은 기사가 보였다.

“진, 괜찮냐?”

“윽, 치사하게 발을 노리냐!”

상대를 향해 불같이 화를 낸 기사는 휘청거리며 일어나더니, 이내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악!”

단순히 접질린 게 아닌 듯했다.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은 기사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진, 왜 그래? 못 일어나겠어?”

“바, 발에 힘이 안 들어가…….”

그의 한마디에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다쳤나 봐요?”

“견습 기사들이다 보니, 아무래도 사건이 많습니다.”

어쩐지 다 어려 보이더라.

그래서 그런가? 부상에 제대로 대처할 줄 몰랐다.

‘계속 움직이면 안 되는데……. 어휴, 저러다가 덧나기만 하겠다.’

조마조마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성큼 나아갔다.

지금까지 숨기며 살아온 힘이지만, 이미 신전에 들킨 마당에 더 숨길 것도 없다.

기사들을 헤치고 안으로 파고든 나는 진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안녕하세요, 기사님.”

“아, 안녕하세요……?”

그는 내가 누군지 모르는 눈치였다. 평소에 입던 드레스가 아닌 작업복이라서 그런가.

다들 정원사라고 착각하는 듯했다.

‘차라리 잘됐지.’

나는 루도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 눈치를 준 후, 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정확히 어디가 아프세요? 여기?”

부상을 입은 것으로 의심되는 부분을 조심스럽게 매만지자, 그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악!”

“조심하셨어야죠. 금 갔어요.”

나는 진의 발목에 손을 올린 채로 신성력을 풀었다.

그러자 하얀 빛이 그의 몸 안으로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누군가 숨을 삼키는지, 헉 소리가 들렸다.

“천사다…….”

이상한 헛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이제 괜찮죠?”

“……네? 네, 네! 괜찮습니다.”

발목을 돌리고 제자리에서 뛰어오른 진이 직각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나는 진처럼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아까 그건 뭐였지?’

희미했지만, 진의 몸속에서 무언가 느껴졌다.

“기사님, 잠시 다시 앉아보시겠어요?”

내 부름에 진이 냉큼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며 물었다.

“잠시, 손을 대도 될까요?”

내가 가리킨 곳은 그의 가슴, 정확히는 심장 부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진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역시, 이상해. 꿈틀거리는 게 꼭,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이게 뭐지?”

“뭔가 있습니까?”

루도의 물음에 나는 눈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글쎄요, 이게 뭔지는 저도 잘……. 잠시만요.”

나는 두 눈을 감고 온 신경을 심장 부근에 집중했다.

가슴을 꾹 누르면서 위로 끌어 올리자 별안간 진이 무언가를 토해냈다.

“쿨럭, 컥!”

바닥에 툭 떨어진, 타르처럼 검은 점성질의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그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빌헬름에서 본 그것과 너무 닮아서.

내가 멈칫한 사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지만 한 벌레가 몸을 비틀며 빠르게 움직였다.

“으악!”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기사들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놀라 펄쩍 뛰었다.

“저게 뭐야! 벌레?!”

“자, 잡아!”

기사들이 바퀴벌레를 본 사람처럼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푸직, 듣기 거북한 소리와 함께 벌레가 터졌다.

흙먼지가 가득한 연무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신발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햇살이 부서지는 듯 찬란한 은발이 허리춤에서 휘날렸다.

바다처럼 깊은 청안이 나를 보며 느릿하게 휘어졌다.

“안녕하세요.”

“아…….”

나는 그가 누군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대신관, 에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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