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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50)화 (50/143)

50화.

딜리언이 네이선의 입술을 힘껏 때렸다. 짝, 소리와 함께 네이선의 입이 다물렸다.

“네놈은 그 자유분방한 주둥이가 문제야.”

“……전하, 아픕니다.”

정말로 아픈지 안경에 가려진 눈에 눈물이 찔끔 맺혔다.

“리아 씨 앞에서 헛소리 지껄이다 걸리면 정말 죽을 줄 알아라.”

“세상에. 전하, 정말 사랑해서 부인으로 모시려고 데려오신 겁니까?”

대답할 가치도 없는 물음에 딜리언은 그를 무시하고 서류를 검토했다.

침묵은 긍정. 그 뜻을 알아차린 네이선이 답지 않게 허둥거렸다.

“하지만, 그분은 평민이잖아요……?”

“곧 이 가문의 안주인이 될 텐데 어디 계속 평민이라고 지껄여보든지.”

싸늘한 경고에 네이선이 입을 합 다물었다.

‘이게 도대체 뭔 일이래.’

설마 딜리언이 진심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네이선은 뻑뻑한 목을 돌려 카나에에게 물었다.

‘정말?’

‘정말.’

목이 떨어져라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카나에의 몸짓에 네이선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제국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어……!”

종말론을 펼친 네이선이 집무실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저 미친 새끼.”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부하의 작태에 딜리언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미쳤다. 뭐지, 이 신의 손은?

나는 하렌 자매의 손길에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분명 기회는 한 번이었는데 왜 두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시중을 받고 있는 걸까.

“리아, 저 아이들을 꼭 보내야겠느냐? 심성도 곱고 싹싹한데 곁에 둬도 나쁘지 않을 텐데.”

“미숙한 솜씨가 나단 님의 마음에 들어서 다행입니다.”

“훌륭한 솜씨구나!”

내가 도망자 신세를 면하자, 더는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어진 나단은 말문이 트인 사람처럼 조잘거렸다.

“네가 좋은 건 아니고?”

세라가 먹여주는 포도에 눈을 번쩍 뜬 나단이 홍홍거리며 몸을 들썩였다.

“옛날 생각이 나는구나. 그땐 다들 나를 우러러봤었지.”

깨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극진한 대접에 나단의 얼굴에 아련함이 떠올랐다.

“그런데 어쩌다 딜리언 같은 놈을 만나서……!”

딜리언의 사람들 앞에서 그의 욕을 실컷 한 나단은 다시 허기가 진다며 포도를 꿀떡꿀떡 삼켰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치는 내 모습에 어색하게 웃었다.

‘진짜, 안 어울린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예뻤다. 푸른색 드레스도 잘 어울렸고,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에선 윤기가 흘렀다.

모습만 보면 곱게 자란 귀족 아가씨처럼 보였다.

문제는 내 마음이었다.

평범한 약초꾼이던 내가 눈을 뜨니 공작부인?!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지독히도 어색했다.

‘낡은 원피스를 입고 지낼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이런 고가의 드레스일 줄이야.’

어느 정도 대접을 받겠거니 예상은 했지만, 본격적으로 마님 대접 받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나는 이제 뭘 하면 될까?”

“아무것도요.”

“리아 님은 그저 편하게 지내시면 돼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니. 그토록 바라던 백수의 삶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왔건만, 생각만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놀아본 놈이 놀 줄 안다고. 지난 일 년간 치열하게 살다가 갑자기 할 일이 사라지자,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안 되겠어.”

“리아, 어딜 가려고?”

“딜리언 씨한테. 가서 앞으로의 일을 얘기해 봐야겠어.”

역시 너무 대책 없이 온 것 같았다.

“넌?”

“흠, 모처럼 기분 좋은데 딜리언 놈 얼굴 보고 망칠 필요는 없지.”

침대 위에 늘어진 나단의 배웅을 받으며 문을 열었다.

우선은 이 말도 안 되는 약혼녀 자리부터 정리해야 했다.

* * *

“딜리언 씨, 저예요.”

딜리언의 집무실 앞에서 문을 두드리자, 방에서 덜컹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들리던 걸음 소리가 커지더니 이내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가도 될까요?”

나는 대답을 기다렸지만, 딜리언은 어딘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그러지?’

아, 드레스. 뒤늦게 평소와 다른 옷차림을 떠올린 나는 민망함에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음, 이상해요?”

늘 그랬듯 능글맞게 굴 줄 알았던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어색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 헛소리에 익숙해진 거야?’

내가 정녕 미쳐버린 걸까. 나는 딜리언과 다른 의미로 말을 잃어버렸다.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건 딜리언이었다.

“……그럴 리가요. 잘 어울립니다.”

막 잠에서 깬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귀가 간지러웠다.

“가, 감사합니다.”

화려한 미사여구 따윈 없는 담백한 칭찬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너무 아름다워서 말을 잃었지 뭡니까.”

응, 그대로네. 능글맞은 말투와 미소에 나는 안도했다.

‘이런 일에 안심하는 내가 싫다.’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딜리언은 내 곁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딜리언 씨. 일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책상 한가득 쌓인 서류를 가리키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잠시 쉬려 했습니다.”

일은 잠시 미뤄도 상관없다 답한 딜리언은 나를 소파로 이끌었다.

“여독을 풀고 계실 줄 알았는데, 절 보러 와주신 겁니까?”

“뭐, 그것도 있고. 겸사겸사?”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천천히 운을 띄웠다.

“딜리언 씨, 우리 관계에 대해 정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정이요?”

“저를 약혼자로 소개한 거 말이에요. 다들 속아 넘어간 것 같은데, 뒷일을 어쩌려고 그러세요.”

정말 결혼할 것도 아니고, 그가 기억이 돌아오면 제가 저지른 일을 후회할 게 분명했다.

착각하는 거야, 뭐. 그럴 수 있지. 조금 쪽팔리고 어이없지만, 기억에서 지우고 없던 일로 치면 그만이다.

하지만 약혼은 다른 이야기다.

나야 때가 오면 떠나면 그만이지만, 딜리언은 꼴이 우스워질 거다.

“잘됐군요.”

그런데 이 인간은 잘됐다며 웃고만 있다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제 약혼녀로 있는 게 리아 씨께 좋을 겁니다.”

“제가 아니라 딜리언 씨한테 좋은 거 아니에요?”

그는 나를 진짜 부인으로 만들고 싶어 하니까. 이걸 기회로 삼았을 게 분명했다.

“저도 좋긴 합니다만, 조만간 대신전에서 리아 씨를 부를 겁니다.”

“네, 나단 일로 추궁당하겠죠.”

“그게 아니라 리아 씨가 티피의 숲을 치료했잖습니까. 해리스가 그 소식을 전했으니 하루라도 빨리 리아 씨를 손에 넣으려고 안달이 났을 겁니다.”

“안달이 났다는 건……?”

“대신전으로 데려가겠다는 뜻이죠. 아마 신전에 입적시키려 할 겁니다.”

“뭐라고요? 절대 싫어요!”

나는 질색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 지긋지긋한 곳에 들어가라고? 또 신성력이나 뽑히는 신세는 절대 사양이다.

더군다나 그곳엔 아이나가 있다.

모든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고귀한 성녀님이!

지금으로선 딜리언의 곁보다 그곳이 더욱 위험했다.

“대신전에서 성녀를 기다렸다곤 하나, 제가 보기에 리아 씨의 힘은 성녀와 맞먹거나 그 이상일 겁니다.”

“……무서운 소리 하지 마요.”

안 그래도 요즘 불안하다고.

몸속의 신성력을 운용하는 아이나와 달리 자연으로부터 힘을 얻어 오는 내 신성력은 무한이다.

‘……단순히 신성력의 양으로 따진다면, 그래. 내가 이기겠지.’

그만큼 내가 강하다는 뜻이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몸속의 신성력을 운용하는 아이나와 달리 나는 자연으로부터 힘을 얻어 오니까.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리아 씨처럼 대단한 인재를 그들이 놓칠 것 같습니까?”

아니, 절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겠지.

누구보다 끈질긴 신전의 성향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불안했다.

나는 정말 위험한 일에 엮이고 싶지 않단 말이야.

“그러니 임시방편이긴 하나 제 아내로 지내는 편이 좋을 겁니다.”

불안함에 손톱 뿌리의 여린 살을 긁어대는 내 손을 딜리언이 부드럽게 감싸왔다.

“그러다 제가 마음에 들면 진짜 부부가 되면 좋고요.”

딜리언의 엄지가 욱신거리는 피부를 살살 쓸었다.

“그 대단하다는 대신전이라 할지라도 제 아내는 건들 수 없거든요.”

황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딜리언이다. 대신전이라고 건드릴 수 있을 리가.

더군다나 대신관은 딜리언에게 부채감을 갖고 있다.

딜리언의 저주를 풀어주지 못한 미안함과 죄책감.

대신전은 더더욱 딜리언을 대하기 조심스러울 터.

‘약혼자로 지내는 편이 내게는 좋을지도…….’

어차피 속박에 걸려서 딜리언의 곁을 떠나지도 못하는걸.

갈대처럼 흔들거리는 내 마음을 귀신같이 읽어낸 딜리언이 쐐기를 박았다.

“반드시 신전으로부터 지켜드리겠습니다.”

“별의별 이유를 들어가며 데려가려고 하면요?”

“그럼 대신전을 엎어버리죠.”

참, 쉽죠?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니, 쉬운 게 아니라 반역 같은데…….

신성 국가에서 대신전을 엎어버리겠다니. 큰일 날 소리였다.

“온건한 방법은 없어요?”

“그 온건한 방법이 저와 혼인해 시나이즈의 성을 받는 것이죠.”

딜리언의 말대로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시나이즈가 되는 것이었다.

문득 혼인까지는 너무 갔고, 약혼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딜리언은 좋은 사람이다.

능글맞고, 나를 잘 놀리지만 다정한 사람이다. 내가 위험에 빠지면 제일 먼저 달려와 지켜주었다.

‘항상 딜리언이었지.’

딜리언 때문에 위험에 빠진 적도 있었으나, 늘 나를 구해주는 건 딜리언이었다.

황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권력, 넘치는 재력, 잘생긴 얼굴, 세계관 최강이라 불릴 정도로 강한 힘.

거기다 나한테 잘해준다.

그야말로 1등 신랑감이었다.

‘딜리언이 남편이라면 재밌게 잘 살지 않을까? 평생 고생이라는 걸 모르고, 행복하게…….’

순간 딜리언과 함께하는 미래를 그린 나는 깜짝 놀라 뺨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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