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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47)화 (47/143)

47화.

“난 그런 아빠 둔 적 없어. 어차피 친아빠도 아니잖아.”

메이가 전 마탑주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럴 만도 했다. 메이에게 배신자 낙인을 찍은 게 그였으니까.

슬하에 자식이 없던 전 마탑주는 불혹의 나이에 두 명의 아이를 입양했다.

엄선된 두 아이는 천재였다. 하지만 너무 자유분방했던 메이는 마탑주의 그릇이 되지 못했고, 사사건건 아버지와 마찰을 일으켰다.

그러던 어느 날, 마탑주가 오랜 공을 들여 만든 최상급 포션이 박살이 난 채 발견된다.

그는 이번에도 당연히 메이의 짓이라 여겨 화를 냈고, 억울한 메이는 악을 쓰며 대들었다.

평소라면 적당히 타이르고 말았을 마탑주도 이번엔 제대로 화가 나서 메이를 향해 몹쓸 말을 했고, 이에 메이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작정하고 서로를 할퀸 싸움은 이내 주변을 초토화해버렸다.

둘의 다툼에 마탑 반이 날아갔다고 하면 믿겠는가?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마탑이 무너지자 이에 화가 난 마탑주는 메이를 마탑에서 제명했다.

메이는 잘됐다며 마탑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떠돌던 그녀를 내가 주운 것이었다.

남들은 차기 마탑주가 되지 못한 메이가 앙심을 품은 것이라 수군거렸지만, 내가 보기엔 그저 초보 아빠와 사춘기 딸의 개싸움이었다.

‘그 스케일이 너무 커서 문제인 거지.’

누구 한 명이라도 굽히면 회복될 관계지만, 문제는 둘 다 황소고집, 쇠고집이었다.

“네가 정 싫으면 나도 더는 강요하지 않을게. 하지만 메이, 오해를 풀고 배신자 낙인을 벗을 기회야.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고.”

“관심 없어. 배신자 낙인 좀 찍히면 뭐 어때. 어차피 날 건드릴 수 있는 놈은 없어.”

그녀는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그깟 명예 관심 없어. 난 너만 있으면 돼. 네가 더 소중하다고.”

“메이…….”

메이의 진심에 가슴이 찡했다. 이렇게까지 날 생각해주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코가 시큰거렸다.

“그러니까 우리, 조용한 곳에서-”

그 순간, 메이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내 손을 감싼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진짜 징글맞네. 여기까지 쫓아온 거야?”

후, 바람을 불어 거칠게 앞머리를 날린 메이가 팔을 걷어붙였다.

“리아, 여기서 딱 기다리고 있어. 쫄따구들 조지고 온다.”

“나도 같이-.”

“아니, 그런 지저분한 광경을 보여줄 수는 없지.”

메이가 악동처럼 사악하게 웃었다.

얼마나 심하게 괴롭히려고.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에게 신신당부했다.

“죽이지는 말고.”

“그럼 반 죽이고 올게.”

이러나저러나 쥐어패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루도는 얻어터지겠네.

열혈 소년을 향해 심심한 애도를 보내던 때였다.

“어?”

무언가 빠른 속도로 시야 끝에 스쳐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는 눈을 도르르 굴렸다.

“메이?”

대답이 없다.

“카나에 씨?”

여전히 대답이 없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등 뒤가 스산했다.

‘착각인가?’

분명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는데…….

불안해진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겼다.

그 장소로부터 멀어졌음에도, 내 등 뒤를 쫓는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필 메이가 그런 얘기를 해서…….’

나는 메이를 찾으려 점점 속도를 올렸다.

“메이, 어디에 간 거야!”

애타게 그녀를 부르며 골목 모퉁이를 돈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 인영에 몸이 부딪혔다.

“윽.”

크고 단단한 몸에 튕겨 나간 내가 비틀거리자, 민첩한 속도로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붉은 눈동자에 숨을 삼켰다.

신이 조각한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코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쿵.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리아 씨, 어딜 그리 급하게…….”

나는 딜리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제야 익숙한 향기,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 순간, 긴장으로 굳었던 몸에서 힘이 풀렸다.

“딜리언 씨!”

안식처를 찾은 것마냥, 그에게 찰싹 달라붙은 나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주변을 살폈다.

“뭔가, 자꾸 쫓아와요.”

그 순간, 당황으로 물들었던 딜리언의 적안이 섬뜩하게 빛났다.

“어떤 새낍니까.”

“모르겠어요. 엄청 기분 나쁜 시선이에요.”

어깨를 부르르 떨자, 딜리언이 나를 보호하듯, 품에 안았다.

평소라면 질색하며 벗어났겠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먼저 매달렸다.

‘다 뒤졌어. 오기만 해봐라.’

딜리언을 믿고 안도하는 나를 비웃듯, 머리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졌다.

“어……?”

저건, 여관에서 눈이 마주친 그림자잖아.

마주친 자색 눈동자가 히죽 웃는 동시에,

촤악-!

담벼락 아래에서 검은 덩어리가 솟아올랐다.

하나, 둘, 셋…….

순식간에 늘어난 숫자에 나는 숨을 멈췄다.

저건, 내가 흔히 아는 그림자가 아니었다.

바닥이나 벽에 붙어있는 평면적인 모습이 아닌, 마치 사람처럼 땅을 딛고 일어선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으니.

검고 끈적거리는 덩어리가 꿀렁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디, 딜리언 씨, 뒤에……!”

그러자 내 목소리에 기민하게 반응한 마물이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

처음엔 사물을 찾지 못하고 허공을 더듬던 보랏빛 눈이 이내 정확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메이가 경고한……!’

철퍽.

나는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바닥에 떨어진 머리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확실히, 기분 나쁜 시선이군요.”

언제 검을 뽑아 든 건지, 진득한 액체에 딜리언이 쯧, 혀를 찼다.

“감히 더러운 눈으로 리아 씨를 쳐다보다니, 죽고 싶어 환장했군.”

나는 허무하게 무너진 마물의 육체로부터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어둠이 아닌가?

* * *

소문에 비해 너무 약한 게 아닌가 했던 나는 재빨리 그 생각을 철회했다.

동료의 죽음에 분노한 마물들이 기괴하게 입을 벌렸다.

입에서 타르처럼 검고 진득한 액체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검게 물든 바닥과 달리 내 머리는 새하얗게 변했다.

산에서 만난 티피의 마물과 느낌이 달랐다.

저 마물은 저주와 같은 양상을 띠었다.

그만큼 삿되고, 지독한 기운이었다.

“딜리언 씨, 아무래도 쟤네 화난 것 같은데요.”

정답이라는 듯, 마물이 우리를 향해 돌진했다.

그 순간, 몸이 크게 붕 떴다. 딜리언이 나를 안고 마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딜리언 씨, 어쩌려고요?”

“전부 죽여야죠.”

“그럼 저, 내려주고 편하게…….”

“그러면 좋겠지만, 제가 리아 씨를 내려놓자마자 바로 잡아갈 것 같아서 안 됩니다.”

딜리언의 말대로 남은 세 마리의 마물이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었다.

거기다 죽은 줄 알았던 마물은 조각이 난 채로 다른 마물에게 흡수당해 몸집을 키웠다.

딜리언이 썰어내면 썰어낼수록, 몸만 커질 뿐이었다.

핵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저주와 비슷한 형태라면, 내 신성력이 통하지 않을까?’

못 먹어도 고다. 나는 딜리언의 목을 안은 채 속삭였다.

“신성력을 써볼게요. 그때까지 지켜줘야 해요. 알았죠?”

“그거야 제 전문이죠.”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주변에 생명을 끌어모았다.

그러자 익숙한 소리와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피이이-

슬쩍 눈을 뜨자, 몰려든 나비가 우리를 보호하듯, 우리 주변을 감싸며 빙글빙글 돌았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이었지만, 마물에겐 아니었나보다.

아까와 달리 마물의 기세가 주춤거리며 몸을 물렸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나는 재빨리 신성력을 마물을 향해 쏘았다.

파앗-!

눈이 멀 것처럼 새하얀 빛이 일대를 집어삼켰다.

빛에 잠식당한 마물이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마치, 태양에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땅에 녹아내려 흐물거렸다.

뚝뚝 떨어지던 몸은 이내, 땅 틈새로 스며들어 사라지고 말았다.

* * *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해리스를 찾았다. 메이와 기사단을 기다릴 정신이 없었다.

나는 해리스에게 달려가 다짜고짜 물었다.

“제가 만난 게 ‘어둠’인가요?”

간략한 내 설명에 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어둠이 부리는 분신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이것을 ‘그림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림자……. 그럼 제가 마주친 게 진짜는 아니군요.”

“네, 어둠은 아직 제 본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해리스의 긍정에 나는 얼굴을 흐렸다.

어둠을 만나는 것? 백번 양보해서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근래의 나는 이상하게 재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단번에 표적이 될 줄은 몰랐다.

“제가 여기에 있는 걸 알고 찾아왔을까요?”

“네, 리아 씨의 빛을 보고 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둠이 노리는 건 신성력을 가진 자니까요.”

신성력을 가진 사람들을 잡아먹는 어둠. 그리고 남들보다 많은 신성력을 가진 나.

‘좋은 먹잇감인 거네.’

“다행히 리아 씨의 힘이 압도적이라 그림자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사라진 모양입니다.”

“……이제 끝난 일일까요?”

간절한 내 물음에 해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리아 씨의 존재를 확인한 이상, 몇 번이고 다시 나타날 겁니다.”

……그래, 분명 그럴 거다.

나를 먹이로 점찍은 듯, 마주친 눈에서 진득한 집착을 느꼈으니까.

“빠른 시일 내에 여기서 벗어나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대신전에 보호 요청을 하면-”

“공작저로 간다.”

딜리언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해리스의 말을 끊어냈다.

“뭘 믿고 리아 씨를 신전으로 보내지?”

“딜리언.”

제아무리 사촌이라도 신전을 욕보이는 것은 참을 수 없었나 보다.

해리스의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간 그때, 나단이 입을 열었다.

“딜리언의 말이 맞다. 신전은 나도 불허한다. 해리스 네가 도와준다고 말은 했으나, 아직 믿을 수 없구나.”

나단까지 신전을 거부하자, 해리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해리스. 리아가 왜 신전에서 도망쳤는지 아느냐? 그곳의 신관들이 리아를 착취했기 때문이다.”

나단의 말대로다. 그들은 내게서 끝없이 신성력을 뽑아냈다.

하루에 고작 두 시간. 그게 내게 주어진 휴식 시간이었다.

매일 반복되던 기계와도 같은 삶을 떠올리자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쉴래요.”

“리아, 내가 재워줄까? 피곤하면 마법을 걸어서…….”

“괜찮아.”

나는 도와주겠다는 메이의 손길도 물리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 * *

메이의 호의를 받을 걸 그랬나?

밤이 깊었음에도 잠들지 못한 나는 한참을 뒤척거렸다.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옆에서 곤히 잠든 메이가 깰까,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침실에 딸린 테라스의 문을 열고 난간에 몸을 기댄 나는 혹시라도 또 어둠이 나타날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집에서 본 그 이상한 그림자도 착각이 아니었어.’

숲에서 터져 나온 빛을 보고 나를 찾아낸 어둠이 그때부터 뒤를 밟은 게 분명했다.

‘조용히 살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된 걸까.’

정제되지 못한 한숨이 연신 터져 나왔다.

“리아 씨.”

상념에 잠겨있던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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