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메이, 이제 그만 진정…….”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메이가 냅다 그녀의 어깨를 잡아챘다.
“리아, 절대 안 돼!”
귀가 찌릿할 정도로 큰 목소리에 리아가 목을 움츠렸다.
메이가 리아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이 언니는 용납할 수 없어! 허락할 수 없다고!”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메이는 알 수 없는 말을 연신 중얼거리더니 리아를 어깨에 들쳐 멨다.
헉, 주변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흡사 납치와도 같은 장면에 기사단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막아야 하는 거 아니야?’
메이가 리아를 해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녀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아 괜스레 의심됐다.
그들이 눈빛을 교환하며 검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당사자인 리아는 눈을 찌푸리기만 할 뿐,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리아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메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메이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이유라도 알아야 할 게 아닌가.
“다 널 지키려고 그러는 거야.”
비장하게 말한 메이는 리아를 따라 나온 딜리언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 간사한 놈! 얼굴만 믿고 나대지 마라, 네가 무슨 개수작을 부리든 리아는 절대 못 데려가니까!”
딜리언을 향해 욕 섞인 경고를 뱉은 메이는 그대로 난간을 밟고 뛰어내렸다.
단번에 2층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에 기사단이 경악했다.
‘마법사라며! 근육 마법사냐? 뇌까지 근육으로 만들어진 거 아냐?’
마법사는 신체 능력이 떨어진다던데 마탑의 광견에겐 통하지 않는 말이었나 보다.
“사람 맞냐…….”
여관 밖으로 달아나는 메이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피부가 저릿한 살기에 움찔 몸을 떨었다.
“감히, 내 앞에서 부인을 훔쳐 가다니. 배짱 좋군.”
살기의 주인공은 딜리언이었다.
딜리언과 눈이 마주친 기사단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저 눈, 저 목소리, 저 분위기.
‘기억이 돌아오셨다!’
단번에 자신들의 주인을 알아본 기사단이 그의 앞에 부복했다.
딜리언은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명령했다.
“찾아와. 당장.”
자연스러운 하대, 싸늘하고도 오만한 목소리에 기사단이 환희하며 고개를 숙였다.
“존명.”
기사단은 빠르게 흩어졌다. 앞다투어 달려 나간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조용한 여관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에 투숙객들이 딜리언을 흘끔거렸다.
그 시선 속엔 해리스도 있었다.
“너 기억…….”
돌아왔냐. 그 짧은 뒷말은 나오지 못했다.
딜리언의 서늘한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닥쳐. 입도 뻥긋하지 마.’
협박성 짙은 그 눈빛에 해리스가 허,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살다 살다 딜리언 시나이즈가 아쉬워하는 꼴을 보는군.’
세상 모든 사람에겐 다 들켜도 리아에게만큼은 끝까지 숨기고 싶은 모양이다.
저런 놈에게 잡힌 리아 씨가 가여웠지만, 한편으론 저 미친개의 목에 목줄을 채운 사람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그리고 딜리언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리아를 수도로 데려갈 테니 그로서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리아 씨, 죄송합니다.’
해리스는 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 * *
욱신, 메이의 어깨에 짓눌린 복부가 불편했다.
‘답답해.’
나는 메이의 어깨에 매달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딜리언은 흔들림 없는 편안함이었는데…….’
무의식중에 딜리언을 떠올린 나는 흠칫 떨며 머리를 흔들었다.
“메이. 어디까지 가려고?”
“그 여우를 피할 수 있으면 어디든!”
“여우? 딜리언 말하는 거야?”
메이가 말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구겨진 얼굴이 대답을 대신했다.
“그 자식이 무슨 개수작을 부릴지 모르니까.”
“마법사! 마님을 납치하다니! 당장 그분을 놓아줘라!”
“저것 봐. 너 데려갔다고 득달같이 달려들긴. 집착하는 남자는 매력 없는데 말이야.”
누가 이렇게 고함을 지르나 했더니, 메이와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는 루도였다.
“마님!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저희가 구해드리겠습니다!!”
‘누가 보면 납치당한 줄 알겠네.’
그리고 마님 아니라고.
루도의 머릿속에 내 존재가 마님으로 박혀 버렸는지 그는 호칭을 고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난데없는 추격전이 시작됐다.
과연, 샤텐 기사단은 딜리언이 뽑은 정예부대답게 재빨랐다.
하지만 아무리 기사단이라 할지라도 한때 도망자였던 메이를 이길 수 없었다.
좁은 골목을 휘저으며 기사단을 여유롭게 유린한 메이가 한적한 곳에 나를 내려주었다.
“여기까지 쫓아오진 않겠지.”
메이가 주변을 경계했다.
“메이, 왜 그래?”
사람 속을 살살 긁는 딜리언의 태도가 짜증 날 법하긴 했지만, 이토록 경계할 줄은 몰랐다.
나는 제 머리를 뜯는 메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으아아-! 소리를 질렀다.
“리아! 너 정말 딜리언, 그 여우랑 갈 거야?”
“응? 어딜?”
“어디긴, 수도지!”
“내가……?”
나는 처음 듣는 소식에 눈을 깜박였다.
이런 내 태도가 답답한지 메이가 가슴을 퍽퍽 쳤다.
“나단이 시나이즈 공작이랑 갈 거래!”
“내가, 딜리언이랑……?”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물론 아까 미인계에 넘어갈 뻔! 했지만, 간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네가 가는 곳이 지옥이라도 난 따라갈 수 있어! 하지만 시나이즈 공작가는 너무 위험해.”
메이가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안 갈 거지?”
“메이, 일단 진정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봐.”
나는 간절히 애원하는 메이를 어르고 달랬다.
* * *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리아가 딜리언의 미인계에 홀라당 넘어갈 뻔한 그때.
메이는 열심히 나단을 설득하는 중이었다.
“나단! 수도는 절대 안 돼!”
“나단 님, 수도로 가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걸 방해하는 자가 있었으니.
성기사 단장, 해리스였다.
“웃기시네. 가긴 어딜 가. 리아가 그 위험한 곳에 갈 것 같아?”
“너는 리아 씨처럼 뛰어난 분이 이런 시골에서 재능을 썩히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 그건!”
여기서 부정하는 건 리아를 욕보이는 것. 말싸움에서 진 메이가 분한지 이를 갈았다.
“메이. 진정하거라. 이제 슬슬 돌아갈 때가 왔어.”
“하지만 나단! 전에도 말했잖아. 수도에는 어둠이 판을 치고 있다고. 거긴 피해서 가기로 했잖아!”
어둠.
그것은 최근 수도에 출몰하기 시작한 마물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출몰한 시기는 약, 두 달 전.
늦은 밤, 귀가하던 신관을 잡아먹으면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이후, 황실에서 대대적인 비상사태를 선포하긴 했지만, 아직까진 그 효과가 미미했다.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움직이는 ‘어둠’의 특성 때문에 쉽게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말이 맞지?”
메이의 공격적인 눈빛에 해리스가 묵묵히 긍정했다.
“메이 알트란의 말이 사실입니다.”
“이것 봐. 그놈들이 신성력을 그렇게 좋아한다는데 리아가 거기에 가봐. 아주 맛 좋은 먹잇감이 아니겠어?”
진수성찬이 따로 없을 거다.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들겠지.
훤히 보이는 미래에 메이가 고개를 저었다.
해리스는 혹여나 나단이 마음을 바꿀까 봐 다급히 외쳤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신전 측에서 리아 씨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지키겠습니다.”
“하! 그건 나도 할 수 있어. 그리고 신전에서 리아를 가만둘 것 같아? 리아가 괜히 일 년간 숨어 다녔겠냐고!”
“그것도 맞는 말이지.”
나단이 맞장구를 치자, 해리스가 다급히 그에게 다가섰다.
“그 부분에 대해선 문제없이 처리하겠습니다. 오히려, 에런 님께선 나단 님이 깨어나셨다고 기뻐하실 겁니다.”
열심히 나단을 설득하던 해리스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메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수도에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둠이 리아 씨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다.”
해리스의 말은 그저 나단을 설득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어둠은 수도뿐만 아니라 제국 곳곳으로 마수를 뻗치고 있었으니까.
최북단인 이곳까진 퍼지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다.
“이봐, 성기사님. 지금 기사님이 노리는 게 정확히 나단이야? 우리 리아야?”
메이는 짝다리를 짚은 채 해리스를 향해 위협적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질 나쁜 건달 같은 태도에 해리스가 눈을 찌푸렸다.
“두 분 다 모시고 갈 거다.”
“그건 안 돼. 수도로 갈 거면 나단만 데려가. 리아는 내가 데리고 있을 거야.”
“메이?!”
순식간에 버려진 나단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건 곤란한데. 리아 씨의 힘을 확인한 이상 그냥 넘어가긴 힘들다.”
저주받은 숲이 하루아침에 되살아났다. 리아가 산으로 향한 그날에.
리아가 죽어가던 산과 숲을 되살린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안 이상 해리스는 리아 역시 결코 놓칠 수 없었다.
“지금 우리 리아를 신전의 개로 이용하겠다는 거야?”
“개라니……. 이봐, 말을 할 때는 생각이라는 걸 하고 하는 게 어때?”
해리스를 향해 이를 드러낸 메이와 그런 그녀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내려다보는 해리스.
일촉즉발의 상황에 나단이 날아올라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 그만!”
둘이서 물고 뜯어도 결국 결정권은 나단에게 있다.
“우리는 대신전도 마탑도 가지 않을 거다.”
“그럼?”
모든 선택지를 부정하는 나단에 메이가 미간을 좁혔다.
“딜리언과 함께 갈 거다.”
“뭐?!”
“딜리언, 말입니까.”
기겁한 메이가 소리를 꽥 질렀다. 해리스도 썩 내키지 않는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그래, 시나이즈 공작가로 갈 거다.”
“왜 하필 거기인데? 그 녀석이 제일 위험하잖아?”
“아니, 지금으로선 그 녀석의 곁이 가장 안전해.”
그 말에 눈이 돌아버린 메이는 곧장 리아를 보쌈해 도주한 것이었다.
* * *
“안전하긴 개뿔. 그 녀석이 제일 위험해.”
메이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리아, 혹시 모르니까 너도 조심해. 여기서 제일 먹음직스러운 건 너니까.”
그녀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나는 창밖으로 본 그것을 떠올렸다.
‘아까 본 그게 어둠이었나?’
에이, 설마. 어둠은 수도에 있다고 했잖아. 빌헬름까지 왔을 리가.
“리아, 역시 수도는 위험해. 따뜻한 남쪽에 집을 구해서 우리끼리 살자.”
메이는 절대 수도로 돌아가지 않으려 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딜리언은 나를 포기하지 않을 거다. 내가 어디로 가든, 쫓아와 공작저로 데려가지 않을까?
그리고 세상에 마음 둘 곳은 나밖에 없는 양 구는 것도 자꾸 마음에 걸렸다.
“……수도에 가는 건 괜찮지 않을까? 네 오빠는 계속 우리가 수도로 오길 바라는 눈치던데.”
수도로 가자는 마음을 은근슬쩍 내비치자 메이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놈은 필요 없어. 버려.”
“전 마탑주도 널 보고 싶어 한대. 많이 아픈가 봐.”
“흥, 영감, 드디어 갈 때 됐나 보네.”
메이가 입술을 비틀며 이죽거렸다.
나는 모진 말을 하는 메이를 타일렀다.
“메이, 그래도 아버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