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딜리언에게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또 휩쓸린 나는 다급히 양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코앞에서 막히자 딜리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깝다.”
마주친 눈이 여우처럼 샐쭉, 휘었다.
* * *
-리아! 이 언니가 곧 구해줄게!
-시나이즈, 이 망할 여우 새끼야! 리아 몸에 손대기만 해봐! 그땐 너 죽고 나 사는 거야!
리아는 여전히 코앞에서 아른거리는 붉은 눈을 보며 말했다.
“딜리언 씨, 메이 화났어요.”
“네,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네요.”
아주 잘 들린다. 광견의 포효가.
‘말로만 듣던 마탑의 광견을 여기서 볼 줄이야.’
익히 들어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실물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건 광견 또한 마찬가지였을 터.
‘그러니 날 리아의 남편이라 속이며 놀린 거겠지.’
결과적으로 그녀의 무지함이 제게 도움이 됐다.
딜리언은 속으로 감사를 보냈다.
손톱만큼의 작은 감사를.
‘그나저나 미친개들이 자꾸 들러붙어서 큰일이군.’
그 미친개란 메이미 알트란과 자신이었다.
스스로를 미친개라 칭한 딜리언은 심각한 표정으로 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당장 잡아 먹혀도 이상하지 않을 무방비한 얼굴이었다.
이러다 엉뚱한 미친개에게 물릴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아니면 한입에 꿀꺽 삼켜지거나.
‘내가 잘 지켜야겠군.’
딜리언이 걱정 어린 한숨을 쉬자 리아가 손을 움찔 떨었다.
딜리언이 아직 제 손에 얼굴을 묻고 있는 탓에 감각이 곤두섰다.
딜리언이 말할 때마다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뜨거웠다.
발끝이 곱아드는 감각에 몸서리가 쳐졌지만, 손을 뺄 수는 없었다.
손을 치우면 분명 당하고 말 거다.
딜리언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노련한 사냥꾼이니까.
어쩌다 보니 딜리언의 먹잇감이 된 리아는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메이가 이 모습을 보면 딜리언 씨를 죽이려 들걸요.”
“절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상냥하기도 하시지. 걱정 마세요. 제가 이깁니다.”
걱정한 건 아닌데. 저 좋을 대로 해석한 딜리언이 눈을 어여쁘게 휘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딜리언은 리아의 뜻대로 순순히 몸을 뒤로 물렸다.
때로는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니까.
‘이 이상 다가가면 도망가겠지.’
무작정 달려드는 행위는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피곤하게 만들 뿐이다.
딜리언은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기회는 아직 많으니까.’
딜리언이 부드러이 미소 지으며 리아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그래서, 상은 언제 주실 겁니까.”
“……준다고 한 적 없거든요?”
애초에 메이는 적이 아니었는걸, 하고 덧붙이자 딜리언이 눈썹을 늘어트렸다.
딜리언의 시무룩한 얼굴에도 리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비 맞은 강아지 표정 지어도 소용없어요.”
“제가 강아지처럼 귀엽습니까?”
“…….”
리아는 할 말을 잃었다.
‘뭔 개소리야, 라는 얼굴이군.’
정확히 리아의 생각을 읽어냈음에도 딜리언은 모른 척 대답을 종용했다.
“귀여우면 만지게 해주실래요?”
리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그녀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덧붙였다.
“상으로.”
“정확히 머리카락 말하는 거죠?”
리아의 머리카락에 묻혀있는 귓바퀴를 은근히 만지던 딜리언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 이상은 안 된다. 미리 선을 긋는 모습에 딜리언이 가느스름히 눈매를 휘었다.
“아쉽네요. 눈치는 좀 없어도 좋을 텐데.”
의외의 곳에서 눈치가 좋단 말이야.
딜리언이 속으로 중얼거리자 리아가 헛웃음을 뱉었다.
“허어…….”
그러니까, 내가 머리카락이라고 특정하지 않았다면 멋대로 할 생각이었다는 거잖아?
능글맞다 못해 뻔뻔한 작태에 리아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 원래 성격이 이런 거예요? 아니면 기억을 잃어서 뻔뻔해진 거예요?”
“글쎄요. 어떨 것 같아요?”
아니, 그걸 나한테 되물으면 어떡해…….
당황한 리아의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딜리언이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머리카락을 감싸 쥐었다.
“리아 씨 한정입니다. 제가 다른 사람한테 이런 짓 할 리 없잖아요?”
목을 쳐내면 쳐냈지, 이렇게 조심스럽게, 다정하게 대한 건 당신이 처음이다.
하지만 리아에겐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녀에게 자신은 기억을 잃은 가여운 환자, 혹은 머리를 후려쳤다는 죄책감과 부채감을 가진 존재로 있어야 하니까.
‘하필 나 같은 놈한테 걸려서.’
리아가 가엽지만 어쩌겠나. 갖고 싶어져 버렸는걸.
악당 같은 미소를 지은 딜리언이 리아의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췄다.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에게 이런 짓을 할 정도로 파렴치한 사람 아닙니다.”
아직은 진실을 밝힐 수 없다. 리아를 완전히 옭아매기 전까진.
“제겐 리아 씨뿐인걸요.”
딜리언은 얼굴을 가리기 위해 리아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음흉한 속내를 알 리 없는 리아는 한숨처럼 신세타령했다.
‘내 신세야……. 또 딜리언한테 휘말렸잖아…….’
앞은 딜리언의 단단한 가슴이 막고 있고, 뒤는 더 단단한 벽이 막고 있다.
도망갈 길은 차단당한 지 오래였고, 머리카락은 막을 새도 없이 딜리언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나도 모르겠다.’
말해봤자 듣지도 않으니 오늘은 이만 포기해야겠다.
머리카락 정도야,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니니까.
“리아 씨.”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리아는 황급히 시선을 들었다.
딜리언은 음미하듯, 심취한 얼굴을 한 채 제 이름만 부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에 리아가 숨을 삼켰다.
“리아.”
늘 불리던 이름인데 이상하게 낯선 기분이 들었다. 괜스레 부끄러워져 얼굴에 열이 올랐다.
오로지 제게 집중하고 있는 얼굴을 보자 입술이 바짝 마르고,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저 얼굴은 반칙이잖아.’
심장이 백 미터 달리기를 한 것처럼 널뛰었다. 심장에 지나치게 자극적인 얼굴이었다.
딜리언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긴 리아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이었다.
손가락이 뺨을 톡, 건드린 순간, 내리깔았던 눈꺼풀이 느릿하게 떠올랐다.
드러난 붉은 눈이 그녀를 담은 순간, 화들짝 놀란 리아가 숨을 삼켰다.
하지만 도망치기엔 늦었으니.
딜리언은 기다렸다는 듯 그 손을 붙잡았다.
“리아 씨.”
“네, 네?”
딜리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집은 무너졌고, 더는 이 마을이 안전하지 않다는 걸 리아 씨도 알고 계시죠.”
“네…….”
“언제, 어디서, 누가 리아 씨를 공격할지 모릅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대신전에서 내 위치를 알아차린 이상, 더는 이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저와 함께 가요.”
“하지만-.”
그건 이상하다.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녀의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딜리언이 먼저 선수를 쳤기 때문이다.
“설마, 절 두고 혼자 떠날 생각은 아니시겠죠?”
“그게…….”
“저는 기억도 없고, 아는 사람이라곤 리아 씨뿐인데. 낯설고 무서운 곳에 저 혼자 가라고 하실 겁니까?”
그렇게 책임감 없는 사람이었냐고 묻는 말에 리아의 말문이 막혔다.
리아가 주춤한 사이, 딜리언은 쉬지 않고 몰아붙였다.
“매정합니다. 리아 씨가 절 버리면, 저는 누굴 믿고 의지해야 합니까.”
“…….”
“세상에 혼자 버려진 것 같습니다.”
딜리언이 세상 절절한 얼굴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그에 당황한 리아가 말을 더듬으며 그를 달랬다.
“버, 버려지다니요. 딜리언 씨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데요. 해리스 씨도 계시고, 기사단도 있잖아요.”
“제게 그들은 남입니다.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져요.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리아 씨뿐입니다.”
“아…….”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리아의 모습에 딜리언이 티 나지 않게 입술을 끌어당겼다.
완벽하게 꾸며낸 가면을 쓰고 상대의 호감을 얻는다. 그건 딜리언이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리아는 조금씩 그가 원하는 대로 넘어왔다.
“저는 리아 씨뿐인데, 리아 씨는 절 버리실 겁니까.”
절절한 목소리에 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원작의 악당인 딜리언 시나이즈는 무섭고 두렵지만, 기억을 잃은 딜리언 시나이즈는 죄가 없다.
모든 건, 제 잘못이었다. 그를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로 만든 건 저였으니까.
‘책임……져야겠지?’
리아가 갈팡질팡하는 걸 눈치챈 딜리언이 쐐기를 박았다.
“리아 씨는, 제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젠장……. 로맨틱하게 말하지 말라고.
리아가 저도 모르게 함께 가겠다고 대답하려던 그때.
-리아! 여우 새끼한테 홀리면 안 돼!
쾅, 쾅! 문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리아가 슬그머니 딜리언의 눈을 피했다.
“……나단이랑 상의해볼게요.”
“그래요.”
딜리언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거의 다 넘어왔는데, 저 미친개가.’
제 속마음을 철저히 숨긴 딜리언은 세상 다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딜리언의 품에서 빠져나오던 리아가 멈칫했다.
‘응? 저게 뭐지?’
창밖으로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사람…… 아니, 산짐승인가?’
평소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소소한 풍경에 괜히 눈이 갔다.
눈으로 뒤덮인 새하얀 세상, 눈 때문에 아래로 처진 나무, 뒷마당에 찍힌 사람과 동물의 발자국들.
건물 아래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
그리고 그 속에서 얼굴을 내민 낯선 존재.
늪에서 기어 올라오듯, 땅을 짚은 그림자가 고개를 들어 리아를 찾아냈다.
거기에 있을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눈이 마주쳤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등골이 오싹하고, 팔에 소름이 돋았다.
‘뭐야, 저게?’
낯선 존재에 당황하던 그때, 부서질 듯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신을 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