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44)화 (44/143)

44화.

5장. 다가오는 그림자

망연자실하게 집을 바라보던 나는 황급히 마당을 향해 달렸다.

“허…….”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다.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에 눈앞이 아찔했다.

“이게 뭐야…….”

차라리 무너진 집의 상태가 나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내 리아 어디 갔어! 이 자식들아!”

“의뢰 때문에 산에 갔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나!”

“그러니까 의뢰를 왜 지금까지 하냐고. 리아라면 벌써 의뢰 끝내고 와서 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내가 왔음에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꼭 뒤가 구린 새끼들이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속이려 들지!”

“……왜 광견이라고 불리는지 알겠네. 진짜 미친개잖아.”

기사단이 질색하든 말든 메이는 연신 그들을 몰아붙였다.

“리아는 가진 게 없어서 털어봤자 먼지밖에 안 나온다고!”

“그 말 취소해라, 마법사! 마님은 우리 전하를 가졌다고!”

딜리언 극성팬인 루도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네 전하가 누군데.”

“딜리언 시나이즈 님이시다!”

“뭐? 그 미친놈?”

“누구보고 미친놈이라는 거냐!”

……그 미친놈 지금 내 옆에서 다 듣고 있다.

“……메이.”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그녀를 불렀다.

“리아가 왜 그 미친놈을 가져? 리아한테는 입이 떡 벌어지게 잘생긴 남편 있거든?”

“메이, 내 말 안 들려?”

나는 팔을 높이 휘둘렀지만 메이의 시선은 루도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남편? 마님의 남편은 우리 전하시다! 그리고 우리 전하도 얼굴로 어디서 빠지지 않아!”

“저기요? 제 말 안 들리냐고요!”

“뭐래! 우리 리아도 얼굴로 어디 가서 지지 않아!”

안 들리는구나. 그렇구나. 나 혼자서 허공에 소리치는 거구나.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신이시여, 저 새끼들 죽이고 지옥 가겠습니다.”

빠득, 이를 간 나는 얼굴을 붉히며 싸우는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 나를 막은 건 딜리언이었다.

딜리언의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휘감았다.

“놔! 쟤들 죽이고 지옥 갈 거야!”

“리아 씨, 그럼 안 되죠.”

“왜 안 되는데?”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도끼눈을 뜨고 딜리언을 노려보자 그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리아 씨는 천국 가야죠. 쟤들 다 죽여도 천국 갈 테니까 걱정 마시고 처리하세요.”

당당하게 살인을 권하는 말에 말문이 막힌 것도 잠시, 나는 손등을 감싼 뜨거운 온기에 흠칫 몸을 떨었다.

어느새 내 손을 붙잡은 딜리언이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닙니다. 리아 씨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처리하죠.”

단단히 돌아버린 딜리언의 말에 집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딜리언이라면 진짜 할지도…….’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어깨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딜리언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됐어요.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진정했으니까 이제 좀 놓아주세요.”

하지만 허리를 감싼 팔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억지로 떼어내려 하면 할수록, 깊이 나를 옥죄었다.

“딜리언 씨?”

“무섭습니다. 저 흉흉한 눈을 좀 보십시오.”

딜리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자 입을 벌리고 우릴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전쟁 같던 싸움은 멈춘 지 오래였다.

‘……어딜 봐서 흉흉한 눈인데?’

내가 당황하든 말든 딜리언은 내 어깨에 턱을 괬다.

꼼짝없이 그에게 잡혀버리고 만 것이다.

‘멍청이, 또 당했잖아.’

결국, 그에게 벗어나지 못한 채, 시시각각 변하는 그들의 얼굴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얗게 질렸다가 파랗게 질렸다가, 떨떠름히 변했다가, 붉게 물들었다가.

아주 제각각이었다.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주시죠.”

그 말에 메이와 루도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리아!”

“전하!”

두 팔을 벌리며 달려오는 메이를 피한 나는 그녀의 귀를 잡아당겼다.

“메이, 도대체 남의 집에서 무슨 짓을 벌인 거야!”

“아. 아파! 리아, 귀 떨어질 것 같아!”

귓불을 비틀자 메이가 아프다고 징징거렸다.

우는 소리를 무시한 나는 침을 꿀꺽 삼키는 기사단을 향해 날카롭게 타박했다.

“집을 봐준다면서 박살을 내놔요?”

“그, 그게 저분이 먼저 공격을 하셔서……. 죄송합니다!”

기사단이 머리를 박고 사죄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또 메이가 앞뒤 없이 달려든 것이었다.

“넌 왜 다짜고짜 공격했는데.”

“자꾸 네가 산에 갔다고 거짓말하니까! 난 네가 납치당한 줄 알았단 말이야!”

분이 풀리지 않는지 메이가 식식거렸다.

“너 얼마 전에도 습격당했잖아! 내가 그 무기 추적해봤거든? 그런데 어디 건 줄 알아? 블렌트 가문이었어. 시나이즈 공작가의 방계!”

메이가 루도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런데 이놈들이 딱 시나이즈의 개더라고. 나는 당연히 이놈들이 또 널 잡으러 온 줄 알았는데, 진짜로 산에 갔었네……?”

불처럼 화내던 메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종극엔 먼 산을 바라보며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메이의 오해에서 비롯했다는 소리.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오해할 만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집을 박살 내?

메이의 등을 찰싹, 때린 나는 엉망이 된 집을 황망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직 계약 남았는데……. 잠은 또 어디서 자…….”

현실적인 문제가 눈앞에 닥치자 눈물이 찔끔 났다.

그러자 당황한 메이가 나를 품에 안고 달랬다.

“울지 마. 너한텐 내가 있잖아! 우리 집으로 가면 돼!”

메이가 뭐가 걱정이냐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메이의 집을 봤다.

“다 타고 없잖아…….”

당연했다. 메이와 우리 집은 바로 옆집이었으니까.

내 집이 재가 되어 사라진 순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뒤늦게 불이 옮겨붙은 자신의 집을 발견한 메이가 털썩 주저앉았다.

“내 집…….”

메이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씁쓸히 폐허가 된 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림자가 왜 저렇게 크지?’

나는 창문 아래으로 시선을 던졌다.

바람에 펄럭거리는 이불 밑으로 진 그림자가 유달리 짙고 커다래 보였다.

“리아 씨, 저기에 뭐가 있습니까?”

딜리언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나는 이불 아래를 가리켰다.

“저기에…….”

나는 말끝을 흐렸다. 아까 느꼈던 이질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바람 때문에 잘못 봤나 봐요.”

하긴, 집이 저 모양인데 정상인 게 있을 리가.

나는 금세 기억에서 지워냈다.

* * *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나는 결국 기사단을 따라, 여관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리아, 미안해…….”

“죄송합니다, 리아 님!”

“됐어…….”

나는 번갈아 들리는 사과에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지쳤다. 더는 화를 낼 힘도 없었다.

‘무너진 집은 메이랑 기사단이 책임진다고 했으니까 됐어.’

거기다 피해 보상까지 확실히 해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집은 잃었지만, 그 이상의 것을 얻자 ‘아무렴 어때.’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딜리언이었다.

‘그렇게 좋을까.’

집이 무너진 걸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딜리언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해리스와 기사단이 흠칫 놀랄 정도로 밝은 모습이었다.

‘집이 무너져도 시나이즈 공작가로 갈 생각은 없는데.’

내가 미쳤다고 거기에 가겠어. 차라리 노숙하고 말겠다.

‘저 얼굴에 넘어가지만 않으면 돼.’

평정심을 유지하자, 딜리언에게 틈을 보이지 말자.

그렇게 다짐한 지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무슨 방이…….”

재가 된 집 때문에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던 나는 여관 주인이 준 방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대로 키를 받아왔다.

그런데 이런 대참사가 벌어질 줄이야.

넓은 침대는 딱 봐도 2인용이었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딜리언이 이끌었다.

“피곤할 텐데 어서 씻고…….”

그 순간, 잽싸게 나를 낚아챈 메이가 딜리언을 밀어내고 문을 닫았다.

철컥. 단단하게 문을 걸어 잠근 메이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리아, 저놈! 네 남편이 딜리언 시나이즈라고? 그 괴물 공작?”

“남편 아니라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진짜야?”

기억을 잃었다 하더라도 그가 시나이즈 공작인 건 변하지 않는다.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메이가 하얗게 질린 제 뺨을 세게 때렸다.

“난 바보 멍청이야! 널 사지로 밀어 넣다니!”

“맞아. 반은 네 잘못이야.”

그러자 뺨을 때리는 메이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저러다가 볼 다 터지겠네.’

심술 좀 부렸더니, 이렇게 격하게 반응할 줄이야.

나는 연신 제 뺨을 때리는 메이를 말렸다.

“이제 됐으니까 그만해.”

“그 잘난 얼굴이 시나이즈 공작인 줄 알았으면 절대 안 그랬어!”

메이가 욱신거리는 뺨을 붙잡고 절절하게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했을 땐 이미 늦었다.

“부인.”

딜리언은 이미 나를 아내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보아라, 잠긴 문을 따고 들어오는 집념을.

“미친!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어느새 활짝 열린 문에 메이가 기겁했다.

“메이 씨야말로 방을 잘못 찾은 것 같습니다만.”

“뭐?”

“메이 씨 방은 저깁니다. 여긴 제 방이고요.”

“여기가 왜 당신 방이야.”

호의와 호감이 가득하던 첫 만남과 달리 메이의 얼굴엔 경계의 빛이 가득했다.

반대로 딜리언은 그때보다 더 여유가 넘쳤다.

“부부가 한방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인데 뭐가 문제죠?”

더 능글맞아졌고 말이다.

“부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댁이랑 리아는 남이야!”

그 순간, 딜리언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누가 리아 씨께 헛바람을 넣나 했더니 당신이었군. 제삼자는 빠지지 그래.”

“뭐? 제삼자? 이봐, 잘나신 공작님, 리아랑 나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야!”

“그래 봤자 친구 아닌가? 친구보다 더 끈끈하게 이어진, 부부 앞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군요.”

메이가 허, 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착각도 심하지. 나중에 기억 돌아오면 쪽팔려서 죽고 싶을 텐데. 불쌍해라.”

공포의 주둥아리, 메이가 딜리언을 향해 빈정거렸다.

하지만 상대는 지옥의 주둥아리다.

“전 당신이 더 불쌍합니다.”

“내가 뭐.”

“사랑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

“미친, 닥쳐!”

사랑이란 단어에 경기를 일으킨 메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리아, 저 새X 완전 미쳤어.”

“리아 씨에게 미쳐있죠.”

“아악! 듣기 싫어!”

처음 맛본 쓰디쓴 패배에 메이가 쓰러졌다.

딜리언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줄곧 내 손을 잡고 있던 딜리언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전쟁에서 승리해 돌아온 기사처럼.

그 숭고한 키스에 얼굴이 붉어졌다.

“리아 씨, 저희의 사랑을 방해하는 극악무도한 적을 처치했습니다.”

졸지에 악당이 된 메이가 뒷목을 부여잡았다.

“그럼 불청객은 이만 가주시길.”

“누가 불청객……!”

딜리언이 손가락을 튕기자, 메이가 사라졌다.

당황한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딜리언이 내 뺨을 붙잡아 고정시켰다.

“카나에가 옆방으로 보낸 거니까 걱정 마세요.”

매혹적으로 눈꼬리를 접은 그가 속삭였다.

“적을 무찔렀으니 상을 받아야겠죠?”

“네, 네?”

흥미진진한 얼굴로 메이와 딜리언의 싸움을 보던 나는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몸을 뒤로 뺐지만, 벽에 부딪혔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상, 주실 거죠?”

“그러니까 어떤 상을……?”

얼떨결에 분위기에 휩쓸린 내가 대꾸하자, 딜리언이 엄지로 아랫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당연히 승리의 키스죠.”

서서히 다가오는 미형의 얼굴에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딜리언의 날카로운 콧날이 내 코에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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