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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43)화 (43/143)

43화.

잔뜩 상기된 목소리에 눈앞이 아찔했다.

“안 해요! 절대 안 해!”

“아쉽네요.”

진심이다. 딜리언 저 녀석,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잖아.

물론, 원래도 능글맞은 사람이긴 했지만 갑자기 이렇게 급발진을 한다고?

경악하는 나를 본 그가 싱긋 웃었다.

“평범하게 행복해서 죽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것도 전혀 평범하지 않거든.

길지 않은 대화에 기가 쭉 빨린 나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평소엔 이 정도는 아닌데, 오늘따라 유독 중간이 없었다.

“그렇게 좋으면 나중에 연인한테나 해주시죠?”

“네, 하고 있습니다.”

딜리언이 샐쭉 눈을 접었다.

“부인에게.”

“아, 예…….”

나는 떨떠름히 대답했다.

이 인간, 정말 머리 괜찮은 거 맞아? 왜 하룻밤 사이에 더 능글맞아진 것 같지?

“네네, 그건 다른 분께 하면 되고, 어쨌든 과해요. 나중에 도망치면 어쩌려고 그래요.”

여주들이 잘난 남주 두고 왜 도망치겠어? 그게 다 집착이 너무 심해서 그런 거라니까.

“……도망치고 싶습니까.”

“아니, 꼭 제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은 상관없습니다.”

나는 상관있다니까? 아무리 기억이 없다지만 이 행동은 정상이 아니다.

‘신성력이 문제냐, 아니면 부부라고 믿고 있는 게 문제냐.’

착각할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딜리언 씨, 우리가 정말 남남이면 어쩌려고 그래요.”

“상관없습니다.”

“상관있을걸요?”

“없습니다.”

“있어.”

“없어.”

“있다고!”

“없다고 했다.”

……이제 열 받으니까 막 반말하네?

서로 얼굴을 붉히며 ‘있다, 없다’로 싸움을 하던 그때, 구석에서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시끄럽다.”

잠에서 깨어난 나단이 비틀거렸다.

“나단, 깼어? 미안해.”

나는 재빨리 나단을 들어 품에 안았다.

“이제 집에 갈 건데 괜찮아?”

어느새 아침이 밝았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하산해도 될 터.

“……그래.”

잠 덜 깬 거 같은데. 아무래도 제정신을 차리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았다.

‘안고 가야겠다.’

나단을 고쳐 안고 뒤를 돌자, 딜리언이 내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우리가 남이었다고, 한 달간 함께했던 시간이 사라집니까? 아니잖아요.”

아까 대화의 연장선이었다.

“사라지진 않죠. 하지만 딜리언 씨는 우리가 부부라서, 제가 당신 아내라서 앞으로도 쭉 함께해야 한다고 믿고 있잖아요.”

나는 딜리언과 눈을 맞추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시작점을 잘못 잡았다면? 그게 다 착각과 오해로 만들어진 관계였다면?”

이제는 정말 알아야 할 때다.

나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한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쩔 거예요?”

솔직히 나는 딜리언이 계속 부부라고 헛소리를 할 줄 알았다. 그도 아니면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웃었다.

“착각과 오해라, 글쎄요. 저는 제 감정만 믿습니다.”

성큼 다가온 그가 길게 늘어트린 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제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겁니다.”

머리카락을 따라, 목을 스쳐 내려온 손이 내 어깨를 은근히 매만졌다.

“그러니 아무리 당신이라도 내 감정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권한은 없어.”

매끄럽게 올라간 입매가 부드러우면서도 사나워 보였다.

반박은 받지 않겠다는 듯.

“……그래요. 그건, 그렇죠.”

전부 맞는 말이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한텐 그럴 이유도, 권한도 없으니까.

“……마음대로 해요.”

그래. 마음대로 해도 좋은데 기억을 찾고, 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들지만 않았으면.

나는 딜리언을 지나쳐 오두막 문을 열었다.

가자고 고개를 까딱이자 그가 나를 따라왔다.

“리아 씨, 당신은 제게서 무언가 느끼는 게 없습니까?”

“있죠.”

매일매일 느낀다. 그리 답하자 딜리언의 얼굴에 미약한 기대가 떠올랐다.

“느끼함이요.”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 오늘 정말 느끼하거든.

* * *

“리아 씨, 발밑 잘 봐요. 빠지면 큰일 납니다.”

“네, 그러고 있어요.”

그래도 내가 걱정이 되는지 딜리언은 약초 가방을 챙기랴, 나를 챙기랴 정신이 없었다.

나는 빵빵한 약초 가방을 보고 뺨을 긁적였다.

너무 신세 지는 것 같은데.

‘이게 뭐예요? 헉, 눈꽃의 숨결?’

‘정령이 보답이라며 주고 가더군요.’

은혜 갚은 까치도 아니고, 정령에게 보답 받는 날이 올 줄이야.

‘덕분에 의뢰는 무사히 성공했으니 다행이야.’

나는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 우리 집 지붕이 보였다.

다행이다. 우리가 머문 오두막이 집과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서.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서 가요.”

딜리언의 광신도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감도 안 잡혔다.

‘내 집을 함부로 들쑤시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엄습한 불안에 나는 발을 바삐 놀렸다.

후, 내뱉은 숨에 하얀 입김이 공기 중에 부서졌다.

“리아 씨, 계속 여기에서 머물 겁니까?”

딜리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도 슬슬 거처를 옮겨야죠.”

위치가 발각됐으니 떠나는 게 안전했다.

‘나단도 떠나길 바라는 눈치고.’

나는 차가운 겨울바람에 몸을 떨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따뜻한 곳이 좋을 것 같아요.”

그땐 아무 생각 없이 여기에 정착했었는데, 이렇게 추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또?”

“음, 보안이 철저했으면 좋겠어요.”

“보안은 중요하죠.”

“그리고 주변에 편의 시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즐길 거리도.”

딜리언은 조용히 내 말을 경청했다. 적당한 추임새를 넣어가며.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신이 난 나는 조잘조잘 딜리언에게 말했다.

잘 꾸며진 공원이나, 머리를 손질할 수 있는 미용실, 눈이 즐거운 극장.

늘 상상만 해보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제과점도 있으면 좋겠어요. 마카롱이 먹고 싶어요.”

“카페는 어떠세요?”

헉, 카페라니.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완벽해!’

쉬는 날, 테라스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거리를 구경하는 삶.

“상상만 해도 좋네요.”

또 숨어 지내야 하니, 다음 정착지도 분명 외진 곳이겠지만 상상은 자유잖아?

“그럼 저랑 같이 가시죠.”

“네?”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죠?

너무 황당한 이야기에 입이 벌어졌다.

딜리언은 당황한 내 얼굴을 봤음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가문에 돌아가자마자 전부 매입하겠습니다. 리아 씨가 원할 때 언제든지 가시면 됩니다.”

“네에……?”

“아닙니다. 아예 저택 내에 카페를 만들도록 하죠.”

혹하긴 하는데, 그건 좀 아니거든.

‘기억이 없어서 그런가, 금전 감각이 마비되어 있네.’

떨떠름한 내 얼굴에도 딜리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니 저와 함께 시나이즈 공작가로 갑시다.”

“사양합니다. 그리고 전 당장 떠날 생각 없어요.”

나는 딜리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절했다.

“방금까진 간다고 했잖아요.”

“떠난다곤 했지만, 아직 정리할 게 남아서 당장은 못 떠나요.”

상황이 상황이니, 빠른 시일 내로 떠나야겠지만 일 년을 살았던 집이다. 정리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수도엔 가기 싫다고. 아이나랑 마주치기도 싫고, 아이나의 물고기들이랑은 더더욱 마주치기 싫었다.

실수로 딜리언과 엮이긴 했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다면,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딜리언의 말.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게 도대체 뭔 소리야. 내 건 멀쩡히 통하잖아. 역시 해리스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주변에 걸음을 멈췄다.

딜리언이 보이지 않아 뒤를 돌자, 자리에 멈춰서 나를 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뭐예요, 그 표정은?”

“제 표정이 왜요.”

왜긴, 꼭 사탕을 빼앗긴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잖아.

“애처럼 삐진 척해도 소용없어요.”

“안 삐졌습니다.”

안 삐지긴. 목소리가 삐졌다고 티를 내는데.

“네네, 얼른 와요. 안 오면 두고 갈 거예요.”

나는 딜리언의 뒤로 보이는 산을 바라봤다.

“…….”

황폐하던 숲에 서서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시린 겨울이라 푸릇푸릇한 생명감을 느낄 수는 없지만, 전에 없던 생기가 느껴졌다.

마찬가지로 내 시선을 따라 달라진 풍경을 살피던 딜리언이 입을 열었다.

“리아 씨가 이루어 낸 겁니다.”

“아직도 꿈만 같아요.”

“하지만 현실입니다.”

딜리언이 나무의 기둥을 짚었다.

“새살이 돋고 있잖아요.”

어제까지만 해도 썩어 문드러졌던 나무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살아 숨 쉬는 숲과 약초 가방을 가득 채운 약초가 현실임을 알려줬다.

바람이 분다. 뼛속까지 얼려버릴 차가운 바람이 아닌 다정하고 부드러운 바람.

그 사이로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리아, 일어났구나.’

누구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리아 씨?”

목소리를 들은 건 나뿐이었는지, 딜리언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입술을 달싹이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다.

‘티피.’

목소리의 주인은 티피였다.

‘응! 리아. 벌써 가는 거야?’

‘응, 이제 가봐야지.’

‘있지, 네 수명이 끝나기 전에, 나를 보러 와줄 수 있을까?’

‘그래. 올게.’

‘약속한 거야.’

‘응.’

꺄르르, 간지러운 웃음소리에 나도 그만 웃고 말았다.

* * *

다 왔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낸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쑥대밭이 된 집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내 보금자리가……! 마이 스위트홈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불바다가 됐다고!

무너진 지붕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집 곳곳엔 구멍이 뻥 뚫려 바람이 숭숭 샜다.

내가 제일 아끼던 이불은 넝마가 된 채 창가에 걸려 펄럭거렸다.

‘폭탄이라도 맞은 거야?’

그게 아니고서야 하루아침에 집이 폭삭 무너질 리가 없잖아.

“리아 씨, 아무래도 저랑 함께 가야겠는데요?”

딜리언의 기쁜 목소리가 내 귓가에 웅웅거렸다.

기쁘냐? 난 울고 싶다.

“함께 가시죠, 부인. 제가 잘할게요.”

즐거워하는 딜리언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감았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사이의 C(choice)이라고 한다.

아니 틀렸어.

인생은 B(birth)와 D(death)사이의 C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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