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41)화 (41/143)

41화.

* * *

콕, 콕콕, 콕.

무언가가 리아의 뺨을 찔렀다. 부드럽고 말캉한 감촉에 눈을 뜨자, 둥근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그녀를 보고 웃었다.

“일어났구나!”

저게 뭐야. 솜뭉치……? 손바닥만 한 솜뭉치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인간도, 짐승도, 마물도 아닌 존재가 방방 뛰며 몸을 흔들었다.

온몸으로 ‘좋아요! 신나요!’를 외치는 솜뭉치에 당황한 것도 잠시.

“너, 설마 티피야?”

“기억하고 있구나!”

그러자 티피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이제야 온 거니?”

“나, 나?”

솜뭉치는 나를 잘 아는 듯, 친근한 태도를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일까. 아까도 내 이름을 불렀는데, 줄곧 나를 지켜보고 있던 걸까?

“티피. 나를 알아?”

“당연하지.”

“어떻게?”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어. 내가 너를 모를 리가 없잖아.”

알쏭달쏭한 말이다. 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티피도 함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왜……?”

“너는 너니까.”

응, 그래. 아무래도 이 물음의 해답은 듣기 힘들 것 같다.

자꾸만 어긋나는 대화를 빠르게 포기한 리아는 티피의 몸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데 이 몸은 뭐야? 여긴 어디고?”

“아, 이건 내 분신이야. 움직이기 편하거든. 그리고 여긴 내 안이지.”

리아는 푸른 초원을 천천히 둘러본다.

고목 나무의 안이라는 소리였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하지만, 판타지 세계관에서 불가능이란 없는 법.

리아는 깊게 파고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리아, 나를 치료해 줄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죽어가는 숲을 살리고 싶은 마음은 저도 마찬가지니까.

그러자 티피가 기뻐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산과 숲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어.”

“응. 알고 있어.”

“사람들은 나를 수호 정령처럼 여기고 나를 위해 기도를 올렸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갔어.”

“그래서 힘이 약해졌구나?”

본디 수호신이나 정령은 사람의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사람들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되느냐, 신앙심이 얼마나 깊으냐에 따라 힘이 결정된다고 들었다.

“맞아. 약해졌어. 그래서 악한 기운도 막지 못하고, 결국 저주에 걸려버렸어.”

과거를 회상하는지 티피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죽어가니, 숲도 죽어갔고, 사람들도 이곳에서 떠났지.”

티피는 그날부터 지금까지 도와주는 이 없이 혼자 외로운 싸움을 했다.

어떻게든 저주를 밀어내려고 버티고 또 버텨봤지만 결국, 저주에 잠식되어 미쳐버렸다.

“내가 완전히 정신을 놓기 전에 네가 와서 다행이야.”

배시시 웃은 티피는 이제 곧 도착한다며 리아를 이끌었다.

“저기야.”

마침내, 핵에 도달한 티피가 나무를 관통한 검은 가시를 가리켰다.

“저걸 제거하면 되는 거야?”

“응.”

티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아는 성큼 다가가 가시를 움켜쥐었다.

‘너무 커서 뽑는 건 안 되겠어. 이건 저주라고 했으니까 신성력으로 부숴버리자.’

가시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신성력을 쏟아낸 동시에, 가시가 부서져 바람에 휘날렸다.

단단히 각오하고 있던 리아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했다.

“잠깐, 이게 끝이야? 너무 쉬운데?”

“그 쉬운 걸 지금껏 누구도 하지 못했지.”

만개한 꽃처럼 피어난 티피의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그 자리에서 뛰어올라 리아의 어깨에 올라탄 티피가 그녀의 뺨에 몸을 부볐다.

“내가 더 많은 생명을 해치기 전에 와줘서 고마워.”

그건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친애의 표시.

맞닿은 체온을 통해 티피의 마음이 전해졌다.

* * *

고목에서부터 터져 나온 빛무리가 빠른 속도로 산을, 그리고 숲을 덮었다.

황폐한 숲. 죽음의 향기가 짙게 풍기던 그곳에 새 생명이 돌기 시작했다.

썩은 가지에 새살이 돋고, 검게 물든 땅이 노르스름한 황갈색으로 새롭게 칠해졌다.

흐리던 하늘이 맑게 개고, 사라졌던 새 소리가 멀리서 들리기 시작했다.

딜리언은 의식을 잃은 리아를 품에 안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기운. 이 따스하고 다정한 빛.

누구보다 잘 아는 힘이었다. 몇 번이고 저를 구해준 힘이었으니까.

‘이 힘은 대체…….’

딜리언은 품에서 새근새근, 숨을 내쉬는 리아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 * *

리아가 눈을 뜬 건, 어스름한 새벽녘이었다.

깜박.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 너머로 날카로운 턱선이 보였다.

‘뭐지?’

꿈을 꾸나 싶어 눈을 비비자, 리아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반응한 딜리언이 고개를 내렸다.

“일어났어요?”

무심한 얼굴이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렸다. 딜리언의 다정한 미소에 리아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뒤늦게 딜리언의 무릎을 베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윽.”

“악!”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거리를 계산하지 않고 무작정 몸을 일으킨 리아가 제 이마를 딜리언의 턱에 들이박은 탓이었다.

리아는 찌르르한 이마를 문지르며 딜리언의 몸을 살폈다.

“괜찮아요?”

“기왕 부딪히는 거, 입술이 부딪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고통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하는 말이 저거라니.

‘아직 덜 아프구나.’

저런 상큼한 얼굴로 능글거리는 말이라니. 딜리언을 차게 식은 눈으로 보던 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은 아니고, 오두막?’

얼기설기 엮인 나무들과 타닥타닥, 타고 있는 모닥불. 그 옆에서 푹 퍼진 채 잠이 든 나단이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리아 씨가 너무 곤히 자길래 그냥 여기서 하룻밤 묵기로 했습니다. 날도 어두워져서 하산하기 위험하기도 했고요.”

그들이 머무는 곳은 산 중턱에 있는 작은 오두막으로 티피가 안내해준 곳이었다.

“몸은 괜찮습니까?”

“자고 일어나서 그런가. 더 가뿐한걸요.”

위험한 일도 아니었고. 리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딜리언 씨는 괜찮아요?”

“저, 말입니까?”

“네, 딜리언 씨는 어디 다친 곳 없어요?”

“……제가 걱정됩니까.”

“……? 당연하죠. 딜리언 씨 아까 정말 이상했던 거 알아요?”

리아는 저를 바라보는 묘한 눈초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못할 말을 했나?’

딜리언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리아를 바라보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계곡물이 너무 차가워서 잠시 쇼크가 왔나 봅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다행이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는 리아의 모습에 딜리언은 그만 웃고 말았다.

‘누가 누구 걱정을 하는 건지.’

지금처럼 순수한 걱정을 받아본 적이 언제지? 모르겠다. 너무 오래돼서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는 시나이즈의 주인이 되어야 했고, 주인이 될 자는 절대 나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됐다.

그래서 저를 향한 걱정의 말을 모두 잘라냈다. 주제넘다는 이유로 벌했다.

평소라면 기분이 나빠야 하건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혹시 모르니까 손 줘보세요.”

자신의 손등을 덮은 리아의 손이 따뜻하다. 딜리언은 그 손을 힘껏 잡았다.

이제 인정하자. 나는 그냥 이 여자가 좋은 거다.

리아 델리스가 좋다.

기억을 잃었지만, 자신이 리아에게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기억이 돌아왔다고 희석되거나, 변질하지 않았다.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이 그걸 증명했다.

자다 깨서 퉁퉁 부은 저 얼굴이 사랑스러워 보이면, 이미 끝난 게 아니겠나.

‘자, 그럼 이제 어떡할까.’

딜리언은 저를 걱정하는 리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기억이 돌아온 걸 밝힐까, 말까.’

모든 사실을 밝히고 책임지라 몰아붙이면 분명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가문으로 데려가기도 꽤 수월할 것이다.

하지만 나를 두려워하고, 호시탐탐 도망칠 기회를 엿보겠지.

‘그건 곤란하지.’

딜리언은 자신을 대하는 리아의 태도가 변하는 걸 원치 않았다.

지금처럼 스스럼없이 다가와 대화를 나누는 게 좋았다.

만약 리아가 자신을 겁내고 피한다면…….

‘가둬버릴지도.’

딜리언이 리아에게 족쇄를 채우는 시늉을 한 건 장난이 아니었다.

기억을 잃었어도 무의식중에 드러난 소유욕이었다.

하지만 그건 최악 중에서도 최악의 이야기.

자신을 위해서도, 리아를 위해서도 그 결말만은 막아야 했다.

‘역시, 기억을 잃은 척하고 데려가는 방법뿐이네.’

가문으로 데려가는 게 조금 힘들겠지만 리아는 결국 함께 갈 수밖에 없을 거다.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만들 거니까.

“딜리언 씨?”

한참 동안 말이 없는 딜리언이 이상한지 리아가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흔들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저주에 대해선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젠 상관없다. 중요한 건 리아 델리스가 제 옆에 남아있느냐는 것.

만약, 리아가 렉스터의 스파이라 할지라도 그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왜냐고? 그것 또한 리아의 약점이 될 테니까.

‘우선, 내려가자마자 뒷조사부터 해야겠군.’

딜리언은 자신의 유일한 약점인 저주의 존재를 들켰음에도 느긋했다.

“리아 씨…….”

여유가 넘치다 못해 개수작을 부리기 시작했다.

“네, 말씀하세요.”

딜리언은 이마를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약한 소리를 냈다.

“제가…… 윽.”

“헉! 딜리언 씨!”

“리아 씨, 머리가…….”

눈을 찡그리고 고개를 숙이자 리아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어, 어떡해. 많이 아파요?”

허둥지둥하던 리아가 딜리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딜리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리아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얇은 옷 사이로 전해지는 단단하고 뜨거운 온기에 리아가 움찔거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