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크으으으으.”
그루X처럼 생긴 마물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팔을 휘둘렀다.
재빨리 마물의 팔을 잘라낸 딜리언이 멋쩍은지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이건 좀 별로죠?”
“말이라고 해요?!”
빽 소리를 지른 나는 호미를 휘둘렀다.
“키, 키킥 키키익!”
“입 좀 다물어!”
나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 괴상하게 웃는 마물의 얼굴을 호미로 후려쳤다.
‘마을에 내려갔을 때 활을 사 왔어야 했는데!’
나단이 납치당하는 바람에 잊고 말았다.
“더러워 죽겠네!”
나는 짜증이 담긴 손길로 호미를 털어냈다.
“잘하시네요.”
“시끄러워요!”
이 정도도 못 하면 쪽팔리지.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적어도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달려드는 마물을 후려치던 나는 딜리언을 향해 날카롭게 외쳤다.
“뭘 봐요! 빨리 저놈 뚝배기부터 깨버리라고요!”
누구는 죽어라 싸우고 있는데 왜 멍하니 있는 거야?
“음, 리아 씨가 싸우는 모습을 보니까 뭔가 떠오르는 것 같아서요.”
“……떠올리지 마요.”
나는 마물의 머리통을 두드리던 호미의 위치를 바꿔 목을 후려쳤다.
하지만 패도, 패도 끝이 없었다.
마물의 부서진 가지에서 새 마물이 태어나, 자꾸만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일단 부수고 봤더니 이젠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개체 수를 늘린 후였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먼저 방전되겠어.’
딜리언은 버티겠지만 나는 슬슬 한계였다. 나는 딜리언을 향해 외쳤다.
“딜리언 씨, 우선 피하죠!”
“그럴 필요 없습니다.”
뭐야, 언제 저기까지…….
빠르게 마물의 앞으로 파고든 딜리언이 갑옷처럼 단단한 가슴을 뚫었다.
푸욱-!
날카로운 검이 마물의 심장을 뚫었다.
그러자 채찍처럼 휘두르던 가지가 파스스 부서지더니, 커다란 몸이 무너져 내렸다.
마물의 곁가지에서 태어난 분신도 함께 말이다.
나는 더는 재생하지 않는 마물을 보며 슬금슬금 딜리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한 거예요?”
“핵을 파괴했습니다.”
“내가 알려줬다.”
“나단, 네가?”
딜리언의 어깨에 내려앉은 나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싸우더니 이럴 땐 또 죽이 잘 맞았다.
“그런데 어쩌다 마물이 여기까지 온 거예요?”
분명 마물 위험지역은 피해서 들어왔는데.
“제가 마물의 팔을 부러트렸습니다.”
“네?”
뭘 부러트려?
“눈사람을 장식하기 좋은 나뭇가지가 있길래 부러트렸는데 그게 마물의 팔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던 마물의 팔을 뽀개서 이 사달이 났다는 소리였다.
님, 정말 흑막 맞아? 최종 보스 맞냐고, 너무 허술하잖아.
아니면 흑막이라서 안하무인으로 사는 거야?
목 끝까지 한숨이 차오르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딜리언 씨, 그냥 지금 돌아가시면 안 돼요?”
“그건 곤란하겠습니다.”
“왜요?”
대형 사고를 쳤으면서 무슨 똥고집이야.
짜증스럽게 눈을 구기던 나는 딜리언의 가라앉은 얼굴에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뭘 보고 있는…….”
산꼭대기에서 뭔가가 몸을 일으켰다.
꼭, 골렘처럼 생겼네.
“……저게 뭐야?”
“정령.”
나는 나단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정령이라고?”
“그래, 이 산의 정령이구나.”
……정령이면 뭔가 신비롭고 아름답지 않나? 내가 아는 정령은 그런 건데…… 저건, 몬스터 아니야?
석탄처럼 검은 몸 사이사이로 용암처럼 붉은 물이 들끓었다.
“딜리언이 제 터전을 함부로 건드려서 화가 단단히 났어.”
응, 그건 말 안 해도 알겠어. 머리 꼭대기까지 열이 받아서 우릴 죽이고 싶어 하는 것도 알겠다.
“도망가자.”
그 순간, 인간의 언어가 아닌 무언가가 비명을 질렀다.
“윽!”
손으로 귀를 틀어막아도 뚫고 들어오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삐이이- 울리는 이명에 눈을 찌푸리던 그때, 별안간 딜리언이 나를 안아 들었다.
“딜리언 씨?!”
“꽉 잡으세요.”
딜리언이 빠르게 산 아래를 향해 달렸다. 그 옆에 나단이 재빨리 따라붙었다.
딜리언의 어깨에 반쯤 걸쳐진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쿠쿠쿠쿵-!
산꼭대기에서, 눈이 쓸려 내려왔다.
이 산의 유일한 옥에 티인 우리를 묻어버리겠다는 듯이.
* * *
눈사태에 땅이 울렸다. 눈발은 거칠게 휘날리고, 주변의 모든 것을 삼키며 우리를 향해 돌진했다.
나는 딜리언의 어깨를 세차게 두드렸다.
“달려, 달려요!”
내가 닦달하지 않아도 딜리언은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연의 힘을 인간이 이길 수는 없는지라, 파도처럼 덮쳐오는 눈이 점점 가까워졌다.
새하얗게 질린 나는 새된 소리를 질렀다.
“더, 더 빨리! 빨리!!”
원초적인 공포에 숨을 삼킨 나는 제일 가까이에 있던 딜리언의 머리를 당겼다.
“달려! 딜리언!”
“리아 씨, 아픕니다.”
“난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아!”
“그건 곤란합니다. 아직 정식으로 식도 못 올렸잖아요.”
“그러니까! 일단 살아야 하니까 더 빨리 달려요!”
“살아남으면, 해줍니까?”
안 해준다고 하면 자리에서 멈출 기세였다. 그 증거로 딜리언의 다리가 서서히 느려졌다.
“미쳤어요?”
“지극히 정상입니다만.”
나는 그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 질렀다.
“해줄게! 해준다고! 그러니까 달려!”
“약속했습니다.”
딜리언은 진짜로 미쳤다. 옆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미친놈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미친 소리를 하고 웃을 수 있을까.
맞닿은 가슴에 떨림이 느껴졌다.
나는 딜리언의 머리를 쿵쿵 때렸다.
“이 미친 인간아! 이러다 죽으면 어쩌려고!”
“그럴 수는 없죠. 목숨을 걸고 살아남아서 결혼을 해야 하는데.”
딜리언이 웃으며 바위가 절벽처럼 꺾인 경사 아래로 그대로 뛰어내렸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딜리언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심장이 덜컹거렸다.
“쉬이, 괜찮아요.”
무릎을 굽혀 무사히 착지한 딜리언이 내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미친, 이게 사람의 신체 능력이야?’
나는 절벽을 따라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눈을 보며 다급히 물었다.
“나단! 신성력으로 막을 수 있을까?”
“아니, 못 막는다. 여긴 정령의 본거지야. 힘의 차이가 압도적이다. 그리고 저 녀석, 저주받았어. 쉽지 않을 거야.”
상대의 홈그라운드에서 싸워봤자 탈탈 털릴 거라는 소리였다.
거기다 흑화까지 했다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딜리언이 지치지 않도록 그의 체력을 끊임없이 회복시켜주는 것뿐이었다.
“리아 씨, 전 괜찮습니다.”
“입 다물고 달려요. 딜리언 씨가 죽으면 저도 죽는 거예요.”
같이 순장 당하고 싶지 않다고!
딜리언에게 끊임없이 신성력을 퍼붓던 나는 뺨을 스쳐 지나가는 날붙이에 얼어붙었다.
“리아 씨!”
뺨이 화끈거리고 피가 흘렀다.
뺨을 가볍게 훔쳐내 치료를 마친 나는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아장아장 뛰어오는 눈덩이는 분명…….
“나단.”
“응?”
“아니, 너 말고…… 리틀 나단이 우릴 죽이러 와!”
“쿠쿠쿠쿠쿠.”
“심지어 이상한 소리를 내!”
리틀 나단을 본 진짜 나단이 버럭 화를 냈다.
“딜리언 넌 하필 왜 나를 만들었냐!”
“나라고 저렇게 될 줄 알았겠냐.”
짧은 다리로 쫑쫑거리는 모습은 귀엽지만, 무차별적으로 날아오는 눈 화살은 전혀 귀엽지 않았다.
나단이 장막으로 화살을 막아냈다.
나는 옆에서 등장한 다른 눈사람에 침음을 삼켰다.
“딜리언 씨…….”
우리 양옆에서 딜리언과 내가 달려왔다.
“정말, 정교하게 만드셨네요.”
그 짧은 시간에 저런 작품을 만들어냈을 줄이야.
감탄과 질색을 동시에 내비친 나는 날아오는 공격을 막아냈다.
“리아 씨, 저걸 부술 겁니다.”
“괜찮을까요?”
“아마도. 결국엔 눈이니까요. 그러니 꽉 잡으세요.”
빠르게 달려간 딜리언이 긴 다리를 휘둘렀다.
퍼억.
눈사람 딜리언의 머리가 날아갔다.
그다음 타깃은 나였다.
“죄송합니다. 리아 씨.”
딜리언이 내 눈사람의 배를 걷어차며 사과를 했다.
“사과를 왜 해요! 저거 나 아니잖아요!”
“그래도 부수기 좀 그렇잖아요. 리아 씨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했으면서 나단은 가차 없이 개박살을 냈다.
리틀 나단도 딜리언의 발에 단숨에 짓뭉개졌다.
“딜리언 이놈 자식! 감히 나를!”
나단한테 억하심정 있냐고. 무참하게 부서진 눈사람이 가여웠다.
“왜 화를 내지? 리아 씨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매도를 당하니 기분이 좋진 않군.”
딜리언은 미친 신체 능력만큼이나 입도 잘 털었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나단이 콧김을 뿜어대며 식식거렸다.
“리아! 난 저 녀석이 정말 싫어!”
“통했군. 나도 너 싫다.”
나단의 속을 박박 긁은 딜리언은 그 외에도 여러 공격을 피해가며 빠르게 산 아래로 달려갔다.
이대로 무사히 피해가나 싶던 그때, 딜리언이 급하게 멈췄다.
“왜, 왜 멈춰요?”
“더는 길이 없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아래로 쏟아지는 거센 폭포가 보였다. 아찔한 높이에 눈앞이 빙글 돌았다.
“제 목 꽉 잡고, 숨 참아요.”
“어, 어쩌게요?”
“어쩌긴요, 뛰어야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딜리언이 폭포 아래로 몸을 던졌다.
나는 비명도 못 지르고 딜리언의 목에 매달려 몸을 웅크렸다.
풍덩-!
물 깊숙이 처박힌 몸이 이내 위로 떠올랐다.
“푸하!”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급격히 떨어진 온도에 이가 딱딱 부딪혔다.
나는 뼛속까지 얼려버릴 추위에 온몸을 덜덜 떨며 두리번거렸다.
이상하다. 제일 먼저 나를 찾아야 할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딜리언 씨?”
“리아! 딜리언이 가라앉았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