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나는 티격태격하는 둘을 바라봤다.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이었다.
마침내 되찾은 일상에 안도하며 눈을 감았다.
* * *
싸우던 둘은 머리 위에서 들리는 고른 숨소리에 모든 행동을 멈췄다.
리아가 잠들었다. 휴전의 시간이었다.
딜리언의 팔을 할퀴던 나단은 자리로 돌아가 리아의 붉은 눈가를 바라보았다.
“많이 울었느냐.”
“펑펑 울었지. 질투가 날 정도로.”
나단은 지끈거리는 심장에 눈을 일그러트렸다.
아껴주겠노라, 지켜주겠노라 약속했는데 결국 리아를 아프게 만들어 버렸다.
‘미안하구나.’
작은 날개로 리아의 머리를 쓰다듬던 나단은 제 아이를 향한 시선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갑자기 욕이냐.”
“아마 평생 좋아할 수 없겠지.”
늘 그랬던 것처럼.
나단은 고개를 돌려 딜리언과 눈을 맞췄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
“고맙다. 곁에 있어 줘서.”
“너한테 인사를 들을 이유는 없어. 내가 그러고 싶어서 한 거니까.”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리아를 위해서였지만, 동시에 자신을 위한 행동이었다.
가녀린 어깨를 감싸고, 품에 가둬 서럽게 우는 그녀를 달래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나단, 언젠가 네가 말한 적이 있지.”
가슴이 뛰고, 정신이 아찔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이 감정의 정체가,
“사랑이라고.”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 그 안에 담긴 것은 명백한 애정.
그 눈이 향한 곳은 다른 누구도 아닌 리아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았어.”
딜리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 감정이 가짜일 리 없다. 그리 외치고 있는 딜리언의 눈빛에 나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그때 물어본 거 네 얘기였느냐.”
딜리언은 말없이 빙긋 웃었다.
침묵은 긍정. 나단이 경악했다.
‘내가, 내가 우리 리아를 호랑이 입 안으로 밀어 넣었구나!’
그제야 딜리언 저놈의 행동이 하나둘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제가 사랑이라 말해서, 분노를 사랑이라 착각한 것이었다.
이제 와서 정정해 줄 수도 없고.
‘리아야……. 내가 미안하다…….’
잠든 리아에겐 절대 닿지 못할 사과였다.
나단은 리아와 딜리언을 번갈아 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리아야, 어떡하면 좋을까.’
저건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사내의 얼굴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나단은 저 얼굴을 잘 알았다.
익숙한 얼굴이었고, 익숙한 눈빛이었으며, 몸짓이었다.
“뭘 봐.”
저런 싹수 노란 놈을 봤나.
이런 놈을 리아의 곁에 보내다니. 다 자신의 실책이었다.
“너도 참 한결같구나. 이렇게 싸가지 없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야.”
나단의 독설에도 딜리언의 시선은 리아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 꼴을 더 보고 있다간 속이 뒤집어질 거다.
“에휴.”
연신 한숨을 내쉬던 나단은 몸을 일으켰다.
제 실수 때문에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딜리언이 리아를 해칠 위험은 없었다.
이건 장담할 수 있다. 제 멋스러운 눈썹을 걸 수 있을 만큼.
리아가 싫어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려는 녀석이니까.
“잠시 밤 산책을 다녀오마.”
“마음대로.”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리아에게 손을 댔다간.”
나단의 눈이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네놈의 머리털을 뽑아 대머리로 만들어주마.”
대머리가 되면 리아도 네 잘난 얼굴을 외면할 거다!
저주와도 같은 말을 남긴 나단은 창문으로 쏙 나가버렸다.
* * *
나단이 날린 회심의 공격은 안타깝게도 딜리언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잘 자네.”
딜리언의 모든 신경은 리아에게 향해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뒤돌아볼 청초한 미인.
매일 보는 얼굴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 예쁘게 보였다.
둥근 이마와 단정한 눈썹, 눈꺼풀 안에 숨겨진 호수를 담은 눈동자, 오뚝한 코와 갸름한 턱, 붉은 입술.
리아는 아름다웠고, 어디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딜리언은 색이 옅은 리아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모든 걸 눈에 새겨 넣었다.
자신의 눈에 각인하려는 듯이.
“으으.”
뭐가 불편한지 리아가 뒤척거리며 이불을 걷어찼다.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이 짜증 나는지 고운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딜리언은 검지로 리아의 미간을 살살 문질렀다.
“그때도 이랬는데.”
딜리언은 이 집에서 눈을 뜬 그 순간을 떠올렸다.
모든 것을 다 잊고 백치가 된 그 순간을.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리아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의자에 기댄 채 불편하게 자는 모습이 왜 그리 눈에 밟혔는지.
보고 있으면 가슴에 무언가 얹힌 듯 답답하고, 먹먹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불편하게 꺾인 목을 바로 해주고 싶어서. 잔뜩 주름이 진 미간을 펴주고 싶어서.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한 사람은 리아가 처음이다.
“당신은 언제나 예외였어.”
리아 외에는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길가의 돌멩이처럼 흔했고, 무의미했다.
‘딜리언, 네가 착각하는 거다. 그건, 알에서 깨어난 오리가 처음 본 자를 어미라 여기는 것과 같은 거야.’
해리스는 일시적인 각인일 뿐이라며 자신을 만류했다. 기억이 돌아오면 잊힐 감정이라며.
‘그래, 각인이라면 각인이겠지.’
해리스의 바람과 달리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각인.
딜리언은 리아의 손목에 얼굴을 묻었다.
콧날이 손목에 스치자 리아의 향이 짙어졌다.
딜리언은 숨을 한껏 들이켰다.
그러자 방 안을 가득 채운 것과 같은 청량한 향기가 몸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줄곧 텅 비어있던 가슴이 뻐근하게 차올랐다.
‘이것도 리아의 신성력과 관련이 있는 걸까.’
신성력을 가진 사람들은 원래 다 이런 향기를 풍기는 걸까.
“이상하지. 왜 당신만 괜찮은 걸까.”
해리스는 신성력이란 독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하지만 리아의 신성력은 따스하고, 포근했다.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짙은 포만감과 충족감이 그를 감싼다.
딜리언은 이 매혹적인 향기에 중독돼서 리아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놓치지 마. 놓치면 평생 후회할 거다. 두 번 다시 기회는 돌아오지 않아.’
그의 본능이 매섭게 경고했다.
그래서 버텼다. 부부가 아니라는 말에도 모른 척, 어떻게든 저를 돌려보내려고 할 때도 끝까지 모른 척했다.
함께 살을 부대끼며 살다 보면 진짜 부부가 될 수 있을지 누가 알겠나.
그리고 마침내, 리아가 스스로 제 품에 들어온 순간.
딜리언은 리아에게 집착하던 이유가 단순히 향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터질 것 같은 심장. 속이 울렁거릴 정도의 만족감과 충족감.
동시에 추악한 질투를 느꼈다.
‘다시 생각해도 짜증 나네. 부엉이 자식 털을 몇 개 뽑아버릴 걸 그랬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안다.
리아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호의나 호감은 있을지언정, 그 이상의 감정은 품지 않는다.
환자와 치료사, 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 마침내 뭔가가 변하기 시작했다.
‘딜리언 씨 잘못은 하나도 없으니까 사과하지 마세요.’
‘당신도 피해자인데 제가 왜 화를 내요.’
리아가 화를 내며 편을 들어줬다.
딜리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였다면, 자신과 더럽게 엮인 자를 가차 없이 버렸을 테니까.
‘……당신 생각밖에 안 났는걸요.’
그 순간, 심장이 멈췄다. 저를 보며 배시시 웃는 얼굴, 다정한 눈동자, 손등에 닿아오던 온기.
딜리언은 마침내 알아차렸다.
리아를 볼 때마다 느끼던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녀의 향기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 시작은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리아 씨, 제가 바라는 건 하나입니다.”
함께 우리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
“다행이지 않습니까. 당신도 내가 집으로 돌아가길 원하고 있으니.”
딜리언은 이번 일로 깨달았다.
재산은 많을수록, 권력은 클수록 좋다.
자신의 권위가 커질수록 리아를 좀 더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테니까.
“당신에게 부와 권력을 줄게요.”
“모든 영광을 줄게요.”
“세상을 줄게요.”
딜리언은 몇 번이고 제 마음을 토해냈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 가줘요.”
딜리언은 리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승리의 키스 대신이었다.
“응…….”
긍정의 대답처럼 흘러나온 잠꼬대에 딜리언이 눈을 키웠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대답한 거예요.”
“응…….”
“리아 씨랑 평생 함께하고 싶어요.”
“응…….”
“리아 씨도 그렇죠?”
“으응…….”
절묘한 타이밍에 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
“이런 땐 ‘응’이라고 해야죠.”
“으응…….”
“끝까지 아니라고 하네. 얄밉게.”
딜리언은 리아의 코를 아프지 않게 잡았다 놓았다.
리아는 자꾸만 얼굴 근처를 지분대는 손길이 귀찮은지 아예 몸을 돌려버렸다.
딜리언은 리아의 등을 보며 실없이 웃었다.
리아는 기억도 하지 못할 잠꼬대에도 세상을 가진 것 같아서.
“좋아해요.”
딜리언은 귓가에 몇 번이고 속삭였다.
“어쩌면 난, 당신을 본 순간 마음을 빼앗긴 걸지도 몰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언젠간 제 마음이 그녀에게 닿기를 바라며.
* * *
“고얀 것. 내 말은 듣지도 않지.”
“네가 참아. 원래 성격이 그런 놈을 무슨 수로 막겠어.”
“참았다가 고놈이 우리 리아를 홀라당 잡아먹어 버리면 어떡하나!”
“나단, 너는 걱정이 너무 많아. 리아가 어디 순순히 잡아먹힐 사람이야?”
“그건 그렇다만…….”
마당의 고목나무에 앉아 참새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나단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커다란 보름달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참새 형태를 한 신수, 미카가 물었다.
“왜, 옛날 생각이 나?”
“옛날 생각이야 늘 하지.”
리아와 처음 만난 그날도, 이처럼 아름다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