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렉스터 블렌트의 소행이에요. 아마, 아가씨가 전하의 약점이라는 걸 알고 납치하려 했겠죠.’
‘비열하고 손속에 자비가 없는 놈이에요. 전하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몇 번이고 전하를 위험에 빠트렸어요.’
‘기억을 잃으신 것도 전부 렉스터의 짓이 분명해요!’
카나에의 어두워진 얼굴과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귓가에 맴돌았다.
왜 몰랐을까, 왜 잊고 있었을까.
렉스터 블렌트.
시나이즈 공작가의 방계인 블렌트 백작가의 가주.
렉스터는 대외적으론 딜리언의 친척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딜리언의 이복형제였다.
그리고 반쪽이긴 하나, 시나이즈의 피를 이었다는 사실 하나로 딜리언의 자리를 위협하며 세력을 키웠다.
‘유년기부터 딜리언을 쭉 괴롭혀 온 전형적인 악당이지.’
사실 여기까진 흔하디흔한, 가문 간의 권력 싸움일 뿐이었다.
내가 저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건 모든 일의 원흉이 저놈이기 때문이다.
딜리언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세상이 멸망하는 것도 전부.
렉스터의 공격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딜리언은 저주에 완전히 먹히고, 이지를 잃은 채 세상을 멸망시킨다.
‘만약 그 공격만 막을 수만 있다면, 딜리언만 지켜낸다면 제국은 멸망하지 않고 모두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아이나 또한 죽지 않아도 될 거고. 딜리언도 비참한 결말을 피해갈 수 있을 터.
‘아니, 공격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는 안 돼. 그 전에 싹을 잘라 버려야지.’
평소라면 모든 사실을 알아도 적당히 손만 쓰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늘 그렇듯 나는 조용히 살고 싶으니까.
하지만, 렉스터는 나단을 건드렸다. 하나뿐인 내 가족을.
‘언제가 되든, 얼마나 오래 걸리든, 이번 일은 반드시 갚아주겠어.’
복수심에 활활 타오르던 그때, 나단이 내 손을 날개로 툭툭 건드렸다.
“리아, 너 신성 증폭은 어디서 배운 것이냐. 나는 그걸 가르친 기억이 없는데.”
“아, 그냥 본능적으로 그렇게 해야 될 것 같아서 했는데, 그게 신성 증폭이야?”
나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나단에게까지 거짓말하고 싶진 않지만 책에서 봤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나단이 한숨을 푹 쉬며 내 머리를 콩 두드렸다.
“그 방법은 잘못된 거니 싹 다 잊거라. 네가 아팠던 것도, 의식을 잃은 것도 전부 그것 때문이니까.”
“응?”
그럴 리가. 아이나가 한 걸 그대로 따라 한 건데?
“그게 아주 틀린 방법은 아니다만, 너는 그렇게 하면 오히려 몸이 부서질 거다.”
“왜?”
“보통, 신성력을 보유한 자들은 타고난 신성력이 있지. 늘거나 줄어들 수는 없어. 그건 생명력과 귀결되는 것이니까.”
“응. 알아.”
“하지만 너는 아니다.”
“으응?”
“네 신성력의 근원은 네 자신이 아니라 자연이다. 해, 물, 불, 바람, 흙……. 이런 자연으로부터 생명력을 가져와 쓰는 거다.”
자연이라니, 갑자기 커진 스케일에 나는 침을 삼켰다.
“무한한 신성력이 네 몸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맞는데…….
“인간 중에 가장 뛰어나다 일컫는 대신관도, 성녀도 그렇게 무한으로 뽑아내는 건 불가능해.”
나단의 말이 점점 길어질수록 내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그러니까 저 말은 내가 특별하단 소리잖아? 대신관이랑 성녀보다 더!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엑스트라인 줄 알았던 내가 실은 세계관 최강자? 이딴 소리 하지 말라고.
“어제 너는 다른 이들이 하듯, 네 몸 안에 있는 신성력을 터트렸지. 하지만 너는 안이 아니라 밖에 있는 것을 터트려야 해.”
나단이 내 가슴을 콕콕 찔렀다.
“밖에서 가져오는 것에 익숙해진 너는 힘을 조절할 줄 모르고, 한계도 모르지. 그렇기에 네 그릇이 부서질 때까지 써버리는 거다.”
그래서, 그렇게 힘이 쭉 빠졌구나.
처음 경험해본 탈력감의 원인이 처음으로 내 안의 신성력을 썼기 때문이라니. 충격이었다.
“내일부터 다시 차근차근 가르쳐줄 테니 다시는 그 방법을 쓰지 말아라. 알겠느냐. 정말로 죽는 수가 있어.”
“응. 알았어.”
죽는다는 말에 하얗게 질린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단의 훈계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훈계에 지쳐 쓰러지기 직전,
똑똑. 나를 구원할 목소리가 들렸다.
“리아 씨, 접니다.”
“들어오세요!”
나는 두 팔 벌려 딜리언을 환영했다.
“무슨 일이에요?”
격한 환대에 멈칫한 것도 잠시, 딜리언이 달콤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리아 씨랑 같이 자려고요.”
“네? 갑자기 왜 그런,”
미친 생각을 했냐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왜긴요. 우린 부부잖아요.”
또 헛소리냐고 무시하기엔 내가 저지른 일이 있었다.
‘당신 입으로 말했지. 우린 부부라고. 나는 당신 아내고, 당신은 내 남편이라고. 맞지?’
당당하게 부부 카드를 꺼내 든 딜리언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여기서 아니라고 해봤자 안 듣겠지.
“……저흰 각방 쓰는 부부예요. 얼른 돌아가시죠.”
“그럼 오늘부터 다시 합방하면 되겠네요. 그리고 그 방은 카나에가 쓰고 있어서 못 돌아갑니다.”
역시 딜리언. 계획적이고 철두철미하며 빈틈이 없었다.
“전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그럼 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다행이다. 이번엔 물러날 건가 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한 것도 잠시.
“삼십 분이면 되겠습니까?”
되겠냐…….
“리아 씨와 함께 보낸 날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공식적으로 오늘이 첫날밤이 되겠군요.”
“딜리언! 까불지 마라!!”
듣다 못한 나단이 불같이 화를 냈다.
‘한방에서 같이 보내는 밤을 첫날밤으로 치는 거면, 진작에 치렀는데.’
그것도 공포의 첫날밤을…….
딜리언의 뚝배기를 깨고 죽을까 봐 덜덜 떨던 지난날을 떠올리자 픽, 웃음이 나왔다.
‘그랬던 때가 있었지…….’
많이 변하긴 했다. 딜리언의 눈치를 보고 벌벌 떨기만 했는데 지금은 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받아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게 됐다.
“좋아요, 같이 자요.”
“리아!”
나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와 반대로 딜리언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다.
“저는 침대, 딜리언 씨는 바닥.”
둘의 표정이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시무룩한 얼굴을 한 딜리언이 나를 불렀다.
“리아 씨…….”
“그렇게 애절하게 불러도 소용없어요.”
“그럼, 그럼. 소용없지.”
나단이 맞장구를 쳤다.
나는 딜리언의 부름을 무시한 채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그리고 딜리언이 잡을세라 냉큼 이불을 뒤집어썼다.
딜리언은 단호한 내 태도에 포기한 것인지 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뒤, 어둠 속에서 서로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리아 씨, 신경 쓰이십니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뭐가요?”
“전부 다요. 나단이 납치당한 것도, 그게 실은 당신을 노렸다는 것도, 쓰러진 것도 전부 저 때문이잖아요. 미안합니다.”
나는 딜리언을 향해 몸을 굴렸다.
줄곧 나를 보고 있었는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눈과 눈이 마주쳤다.
“딜리언 씨 잘못은 하나도 없으니까 사과하지 마세요.”
“제가 리아 씨였다면 화를 내고, 원망했을 겁니다.”
내가 화내길 바라는 걸까? 하지만 정말 화나지 않았는걸.
“당신도 피해자인데 제가 왜 화를 내요.”
내가 화낼 상대는 딜리언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을 꾸민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놈이다.
‘렉스터 그 개자식, 내 앞에 나타나기만 해봐라. 박살을 내주겠어.’
이를 빠득 가는 나와 달리 딜리언은 여전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가능합니까.”
“나는 오히려 딜리언 씨한테 고마워요.”
“고맙다고요?”
나는 침대 아래로 손을 뻗어 딜리언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딜리언의 손이 움찔거렸다. 나는 달빛에 물든 딜리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
“딜리언 씨가 아니었으면 다시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엉 울고 있었을 거예요. 옆에서 계속 괜찮다고 해줘서 고마워요.”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누가 뭐래도 나단을 찾을 수 있었던 건 딜리언의 공이 컸다.
그러니까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런 뜻을 담아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진심이에요.”
그를 향해 부드러이 미소 지은 나는 손을 거둬들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붙잡혔다.
“저도 고맙습니다.”
“딜리언 씨는 왜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절 가장 먼저 찾아줬으니까요.”
그게 고마울 일인가.
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딜리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당신 생각밖에 안 났는걸요.”
딜리언의 눈동자가 커졌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에 나는 볼을 긁적였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별론가.’
떨림은 잠시였다. 곧장 특유의 나른하고도 여유로운 미소가 그의 얼굴에 자리했다.
“리아 씨, 나단을 찾는 데 도움을 주면 상을 주기로 한 거 기억나십니까?”
“……나죠.”
“도움이 됐죠?”
“……됐죠.”
딜리언이 내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상으로 뭘 받을까요.”
“줄 수 있는 건 뭐든지요.”
이상한 건 빼고요. 덧붙이자 그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승리의 키스가 좋으려나.”
“그게 이상한 거잖아요.”
“그럼 사랑이 담긴 키스로.”
이러나저러나 키스였다.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랑 하면 나중에 후회할걸요.”
“그럴 리 없습니다.”
아니, 분명 그럴 거다. 기억이 돌아왔는데 제 머리를 깨트린 여자랑 키스했다고 해봐. 속은 기분이 들지 않겠어? 분노가 차오르지 않겠냐고.
화만 내면 다행이지, 죽이려고 들면 곤란했다.
“저 말고 나단한테 받는 게 어떠세요?”
“리아 씨, 방금 화낼 뻔했습니다.”
“나도 싫다! 이것아!”
“뭐야? 나단 안 잤어?”
조용히 있길래 당연히 잠든 줄 알았는데, 이 얘길 다 들었다는 거야?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우 같은 녀석! 내가 없는 사이에 우리 리아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무슨 짓은, 장인어른 덕분에 리아 씨와 한층 더 가까워진 것뿐이지.”
딜리언이 고맙다며 나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부터 수호신 말고 큐피드나 하지 그래?”
“뭐, 뭐랏!”
잔뜩 열이 받은 나단이 딜리언의 머리를 쪼아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