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33)화 (33/143)

33화.

그러고 보니 딜리언에게 여자가 있다고 한 녀석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딜리언이 다른 사람 같다. 평소와 다르다.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내처럼 보였다.

둘이나 그렇게 말한다면 마냥 허튼소리는 아니겠지.

“그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조사해봐.”

“네.”

창틀에 걸터앉은 렉스터가 턱을 매만졌다.

‘딜리언이 기억을 잃어?’

그게 사실이라면 이건 기회였다.

딜리언을 가주 자리에서 끌어내릴 기회.

“하. 그래. 이래야지.”

신이 존재한다면 저주에 걸린 그 괴물 자식을 세상에 풀어놓을 리가 없잖아?

“아무래도 신은 내 편인 것 같군. 딜리언.”

이를 드러내며 웃던 렉스터가 벽에 비치는 그림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쩔 거냐.”

“당연히 가봐야지.”

신이 버린 사내와 그런 사내가 목숨처럼 아끼는 여인이라니.

오만하게 다리를 꼰 사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 *

꿈을 꿨다.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한 꿈이었다.

나는 설원을 달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는 다급한 발걸음으로.

눈 속에 파묻힌 남자에게 달려간 나는 그를 끌어올렸다.

“나으리, 나으리. 제 말 들리세요?”

나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남자의 몸을 껴안고 온기를 나누어주었다.

그러자 파랗게 질린 입술에서 마침내 생명의 숨이 터져 나왔다.

살렸다는 안도감에 눈을 감았고, 다시 떴을 땐 장면이 바뀌어 있었다.

이번엔 침실이었다.

나는 깊은 잠에 빠진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설원에 쓰러진 남자를 성으로 데려온 지도 벌써 사흘째.

상처는 모두 치료했건만 눈을 뜨지 않는 남자에 초조해진 나는 두 손을 맞잡고 기도를 올렸다.

‘신탁의 주인공이야. 절대 죽게 둬선 안 돼.’

내 정성 어린 기도가 신에게 닿은 걸까.

“으…….”

마침내 남자가 눈을 떴다.

“일어나셨어요?”

남자는 바짝 다가온 내 얼굴에 놀랐는지, 숨을 삼켰다.

그제야 너무 가까이 다가섰다는 걸 깨달은 나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죄송해요. 너무 기쁜 나머지……. 몸은 어떠세요?”

“…….”

“어디 불편하세요?”

낯선 나를 믿지 못하는지, 경계하는 기색이 짙었다.

“당신은 누구지?”

“아리아네. 이 성의 주인이에요.”

“빌헬름의 성주라고?”

“네.”

서서히 경계를 풀어가는 그의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건강해 보여.

안도한 나는 긴장으로 굳었던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대가 나를 구했나?”

“나으리를 발견한 건 제가 맞지만, 모두 함께 구했습니다.”

나는 수레를 끌고 온 집사님과 그를 간호하는 데 도움을 준 하녀들의 이름을 차근차근 입에 올렸다.

“나으리께서 이리 눈을 뜨셔서 모두 기뻐하고 있어요.”

가장 기쁜 건 바로 나지만.

그런 감정을 온몸으로 내보이자, 당황한 나으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렇게 갑자기 움직이시면 큰일 나요.”

“도와준 건 고맙다. 내 반드시 사례하지.”

“가시게요?”

“그래. 가야지.”

막무가내로 나가겠다 하는 그의 태도에 당황한 나는 창밖을 가리켰다.

“어제부터 폭설이 시작됐어요. 지금 나가면 눈에 파묻힐 겁니다.”

쏟아지는 폭설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휘이이잉- 들리는 바람 소리가 사나웠다.

“그리고 또 제가 나으리를 구해서 돌아오겠죠.”

어제와 같은 결과가 펼쳐질 게 뻔히 보여 나는 적극적으로 그를 막아섰다.

“곧 눈이 그칠 거예요. 길어도 일주일일 테니, 조금만 여유를 갖고 기다려 보는 건 어떠세요?”

그래도 가야겠다면 어쩔 수 없이 보내줘야겠지만, 나는 부디 그가 이곳에 머물기를 바랐다.

지금 그를 내보내면 안 된다는 강렬한 예감 때문이었다.

‘분명, 위험에 빠질 거야.’

나는 그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만큼은 지켜야 했으니까.

그는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한참을 고민하더니 다시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잠시 신세 지겠다.”

“부디 편하게 있으세요.”

혹시라도 그가 밖으로 나갈까 봐 걱정이 된 나는 재빨리 그를 눕히고 이부자리를 정돈했다.

그는 내심 당황한 듯 보였다.

“나으리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나요?”

“내 이름은…….”

* * *

내가 눈을 뜬 건, 노을이 짙게 깔린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름을 못 들었네.”

이름을 말해주긴 했을까? 경계심이 보통이 아니던데.

그나저나, 이건 무슨 꿈이지?

그냥 내 상상력이 만들어낸 개꿈으로 치부하고 싶지만, 꿈속에서 본 그 성은 나단이 납치되었던 그 고성이었다.

그리고, 그 침실.

‘쓰러지기 전까지 있던 곳이잖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그 성. 저주받았다느니, 귀신이 나온다느니 흉흉한 소문이 들릴 때부터 이상했어.

기도실에서 본 환영도 그렇고.

믿기진 않지만, 기도실에서 본 환영의 주인이 이 꿈에서 나온 여자 같았다.

‘나 뭐에 씐 건 아니겠지?’

어깨를 부르르 떨던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떠올리고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나단, 나단은 어떻게 됐지?”

“어떻게 되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지.”

등 뒤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뒤를 돌자, 은은하게 미소 띤 얼굴이 나를 반겼다.

“나단……?”

“어찌나 곤히 자던지, 깨우지도 못하겠…… 컥!”

나는 두 팔을 뻗어 나단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버둥거리는 그를 힘껏 껴안았다.

“리, 리아! 숨 막힌다!”

“너! 다음부턴 절대 그러지 마!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울음기 섞인 목소리에 나단의 버둥거림이 멈췄다. 그리고 날개를 펼쳐 내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미안하구나. 다음부터는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다.”

“또 나만 두고 가기만 해봐. 눈썹 다 뽑아버릴 거야.”

무시무시한 눈으로 으름장을 놓자, 나단이 다급히 제 눈썹을 가렸다.

“큰일 날 소리! 이게 바로 내 근엄함의 상징인데!”

“헛소리도 신박하게 하는군.”

언제 들어온 것인지, 딜리언이 삐딱한 눈으로 나단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딜리언 씨!”

눈이 마주치자, 붉은 눈이 말랑하게 풀렸다.

“몸은 어때요.”

“괜찮아요, 그보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내가 기절한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나단은 또 어떻게 구한 거고?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십니까?”

“네. 의식을 잃은 후에는 아무것도…….”

기억을 더듬던 나는 유독 강하게 남아 있는 감각을 떠올렸다.

“쓰러지고 너무 아픈 거예요. 그런데 딱 죽겠다 싶던 때에 갑자기 편해진 거 있죠?”

나단 덕분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탁상 위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눈을 키웠다.

“이건 뭐지?”

붉은 자국을 손으로 더듬었다. 아프진 않은데? 간지럽지도 않고.

“저 뭐에 물렸어요?”

목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피던 그때, 낯선 손길이 자국 위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딜리언 씨?”

“지울 거예요?”

“……보기 흉하면?”

“하나도 안 흉합니다.”

딜리언은 한참이나 내 목을 문질렀다. 맞닿은 목에서 점점 뜨거운 열기가 퍼졌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묘한 감각에 목을 움츠리자, 나단이 꽥 소리를 지르며 날아와 딜리언의 손을 매섭게 쪼았다.

“리아, 당장 지우거라. 아주 징그러운 벌레한테 물린 거다!”

“얼마나 큰 벌레한테 물렸길래 이 꼴이야…….”

신성력을 남발하는 건 좋지 않지만, 남에게 보여줄 꼴이 아니었던 나는 목의 자국을 지워냈다.

순식간에 매끈해진 내 목을 노려보던 딜리언이 나단을 거칠게 쳐냈다.

“아이고! 나 죽네!”

침대 위를 뒹구는 나단을 무시한 딜리언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막 깨어나서 배가 안 고파요.”

입맛도 없고, 물 한 잔이면 충분했다.

“그럼 잠시 나와 보시겠습니까. 리아 씨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요?”

다소 심각해 보이는 딜리언의 표정에 다급히 그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

곧이어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커다란 텐트와 그 앞에 타고 있는 모닥불, 그리고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는 닭고기까지.

“이게 다 뭐예요?”

내 집 앞마당이 언제 캠핑장으로 변한 거야?

“리아 씨가 깨어난 걸 확인하고 가야겠다며 그 녀석들이 무단 침입하여, 저희 마당을 점거했습니다.”

“그 녀석들? 무단 점거?”

딜리언이 손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시선을 옮기자 눈을 그릇에 퍼 담는 카나에와 장작을 패는 엘드먼이 보였다.

아니, 멀쩡한 집을 두고 왜 노숙을 하고 있는 거야? 잠깐 사이에 꼬질꼬질해진 모습에 기가 막혔다.

“왜 저러고 있어요? 집에 들어오면 되잖아요?”

“주인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다며 저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웃기시네. 내 허락이 아니라, 딜리언의 허락이 필요했던 거겠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에도 딜리언은 뻔뻔히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나단이 속삭였다.

“저놈 저거 다 거짓말이다. 집에 들어오는 녀석들보고 당장 꺼지라고 얼마나 눈을 부라리던지.”

“신혼집에 함부로 들어오려는 저 녀석들이 잘못한 겁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억울하게 들리는지, 하마터면 깜박 속아 넘어갈 뻔했다.

‘다시 쓰러지고 싶다…….’

문득 이는 현기증에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쉰 나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행방을 물었다.

“해리스 씨는요?”

“클로드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겠다며 마을로 갔습니다.”

클로드 때문이 아니라, 딜리언의 태도에 질려 숙소로 돌아간 게 아닐까.

뭐, 상관없다. 그가 클로드를 지켜준다면 안심이니까.

“마님! 깨어나셨군요!”

“마님 아니래도.”

진정한 마이페이스는 얘가 아닐까. 이젠 정정하는 것도 지친다니까.

나는 코를 빨갛게 물들인 루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마님! 몸은 어떠세요?”

루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기사단이 모두 달려왔다.

“마, 아니.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이 사람들, 분명 나를 마님이라고 부르려 했어.

도대체 내 존재가 어디까지 깊숙이 침투한 건지…….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추운데 왜 이러고 계세요. 들어오세요.”

“아닙니다. 저흰 여기면 충분합니다.”

충분하긴 무슨, 다들 얼어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좁긴 하지만, 텐트보단 나을 거예요.”

나는 가장 가까이 있던 카나에의 팔을 잡아당겼다.

“리아 씨. 이 녀석들은 이만 집에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알겠다. 내 입으로 샤텐 기사단을 쫓아내고 오순도순 지내고 싶었나 본데, 내가 들어줄 줄 알고?

“내가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으로 보여요? 딜리언 씨. 문 열어요.”

나단을 구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준 은인을 모른 척할 만큼 막돼먹은 사람이 아니라고.

“어서요.”

“……그래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이기겠어요.”

고개를 저으며 허탈한 웃음을 터트린 딜리언이 순순히 문을 열었다.

제 주군이 내 말 한마디에 꼼짝도 못 하는 모습을 본 기사단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뭐 해요, 들어와요.”

문이 열렸음에도 여전히 딜리언의 눈치를 보는 그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빨리 안 오면 문 닫을 거예요!”

아무리 충신이라도 영하의 날씨에 밖에 있는 건 싫었는지 냉큼 집으로 들어왔다.

“와아…….”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입술이 파래진 그들에게 옷과 이불을 던져준 후, 소파에 앉아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자, 이제 얘기해봐요. 어떻게 된 일이에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