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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31)화 (31/143)

31화.

피이이-

황금 나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툭 치면 부서질 것 같던 책장에서 푸른 싹이 자란다.

엄지손톱만 한 싹은 빠르게 크기를 키워 몸집을 불렸다.

쉭-!

동시다발적으로 자라난 팔뚝만 한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뻗어져 나갔다.

쾅!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벽이 크게 흔들렸다.

리아를 공격하던 암살자가 벽에 처박혔다. 딜리언에게 달려든 세 사람도 전부 벽에 처박혀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가지에선 다른 가지가, 그 가지에서 또 다른 가지가.

끝없이 증식하는 가지에서 이내 꽃이 피어났다.

퐁퐁, 휘날리는 꽃을 바라보던 암살자들은 달큰한 향기를 맡더니 이내 스르륵, 정신을 잃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리아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녀석과 나뭇가지를 뜯고 탈출한 녀석은 딜리언의 몫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모지스는 나비들에게 둘러싸여 꼿꼿이 서 있는 리아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믿기지 않았다. 가장 약해 보이던 여자가 어떻게 저런 힘을.

저게 인간의 힘이란 말이야? 원초적인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도망가자. 여기서 도망가야 해. 본능이 시키는 대로 뒤를 돈 순간이었다.

퍽, 발치에 칼이 꽂혔다.

“어딜 가려고.”

그가 멈칫한 사이에 딜리언이 퇴로를 차단했다.

끼긱. 끼기긱-.

소름 끼치는 소리에 모지스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섬찟했다.

“누나 칼 뽑았다, 널 때리러 가.”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린 리아가 입술을 당겼다.

복수의 시간이었다.

* * *

“젠장! 이제 그만하라고! 왜 나만 쫓아오는 건데!”

“나는 한 놈만 팬다.”

리아는 우는 소리를 하며 도망치는 모지스의 뒤를 쫓으며 의자를 휘둘렀다.

후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모지스가 두려움에 떨었다.

“허억!”

제 발에 걸려 나자빠진 모지스는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 구경하는 딜리언을 향해 소리쳤다.

“차라리 형씨가 기절시켜줘!”

그 목소리가 어찌나 간절한지, 강 건너 불구경하던 딜리언을 움직이게 했다.

“리아 씨, 여길 때려야 더 아픕니다.”

물론, 도와준다는 말은 안 했다.

딜리언이 모지스의 정강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리아가 귀를 쫑긋 열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열성적인 그 모습에 모지스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미친 커플 같으니라고!”

“보는 눈은 있네.”

욕을 칭찬으로 받아들인 딜리언이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 또라이 새끼!’

모지스가 딜리언을 보고 질색했다.

차라리 대놓고 미친 저 여자가 나았다.

이 모든 걸 관망하며 방긋 웃고 있는 놈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래서 나단은 어디에 있어?”

“끝 방. 제일 끝 방에 있다.”

“만약 나단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건드리긴 뭘 건드려! 그 미친 부엉이가 내 동료의 머리 뜯고 있다고!”

“……진짜네요?”

“그렇다니까요.”

마주 본 두 사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유하게 풀린 분위기에 안도하던 순간. 리아는 모지스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퍼억!

마지막 체어샷에 쓰러지는 모지스를 뒤로한 리아는 휘두르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당장 나단을 구하러 가야 하는데 몸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힘을 너무 많이 썼어.’

지친 기색이 역력한 리아의 곁으로 다가온 딜리언이 무릎을 굽혀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리아 씨, 괜찮습니까.”

“모르겠어요. 한계까지 써본 건 처음이라…….”

몸을 일으키던 리아는 현기증에 휘청거렸다.

딜리언이 리아의 허리를 끌어안지 않았다면 앞으로 고꾸라졌을 거다.

“리아 씨, 우선 신성력부터 갈무리하세요.”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이 방을 가득 채운 향기가 얼마나 짙은지 아십니까.”

“……그게, 조절이 안 돼요.”

리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어딘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자꾸만 신성력이 새어나갔다.

“미안해요……. 그런데 나 잠이 너무 많이 와요.”

자꾸만 눈이 감기고,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리아 씨?”

딜리언은 무너지는 리아의 몸을 힘껏 껴안았다.

“리아 씨, 정신 차리세요.”

애타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나단, 데리러 가야 하는데. 나단이 기다리고 있는데…….’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 달리 의식은 빠르게 멀어졌다.

* * *

리아의 의식이 끊어진 그 순간.

동쪽 탑, 끝 방에서 커다란 불길이 치솟았다.

“곤란하구나, 곤란해.”

“허억, 헉.”

“기어코 일이 터지고 말았구나.”

“수, 숨이.”

“너희가 그런 거겠지?”

나단은 목을 틀어쥐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용병들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인자하던 눈빛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신수로서 세상의 모든 생명을, 인간을 사랑한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사람이, 사람을 해치면 그것을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단은 벌레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 용병들을 향해 무감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 너 뭐야!”

자신이 원하던 대답은 아니나 상냥하고 다정한 나단은 악트의 무례한 질문에도 선선히 답했다.

“내 아이의 수호신이지.”

그렇기에 리아의 위험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리고, 날카롭게 반응했다.

리아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아차린 나단은 더는 얌전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인간의 일엔 개입하지 않는다. 그게 내 철칙이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인간계를 헤집는 걸 그분께서 썩 좋아하지 않으시니, 어쩔 수 있나. 내가 참아야지.”

그래, 그래서 참았다. 리아가 저를 구하러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그 대가가 이거라니.”

“사, 살려줘!”

“아니. 자네들에겐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

화르륵!

불길이 높게 타올랐다.

신수의 불길이 태운 것은 오로지 인간.

비명은 화염에 묻히고, 이내 그들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아, 배후를 물어보지 못했군.”

대장으로 보이던 그놈은 살려서 딜리언에게 던져줬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리아의 위치를 가늠하던 그때, 시선이 느껴졌다.

홱. 나단의 고개가 쥐새끼에게 향했다.

“허억! 부, 부엉이가 말을 해!”

“…….”

“…….”

눈치도 없이 루도가 나단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 무례한 손길에 해리스가 짝! 소리 나도록 루도의 손등을 쳤다.

기묘한 침묵이 세 사람 사이에 맴돌았다.

위엄 넘치던 얼굴에 쩍, 금이 갔다.

‘크, 큰일이다!’

절대 들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내가 들키다니!

나단의 샛노란 눈동자가 풍랑처럼 흔들렸다.

“혹시…….”

“우후후후- 후- 우후후후-.”

크흡! 기껏 생각해낸 게 부엉이인 척 구는 거라니. 딜리언이 봤다면 비웃을 광경이었다.

당황한 것도 잠시. 해리스는 금방 진지한 얼굴로 다가왔다.

“큼, 크음. 혹시 나단 님 아니십니까?”

“우후후- 우후?”

“이름이 같아서 우연이겠거니 했는데, 정말이셨군요.”

“우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 한 톨까지 탈탈 털렸건만 나단은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

‘나는 부엉이다. 이 몸은 평범한 부엉이야.’

성실한 나단은 자기최면까지 걸었으나 안타깝게도 통하지 않았다.

“아까 말씀하시는 거 다 들었습니다.”

쯧, 저도 모르게 혀를 찬 나단이 입을 꾹 다물었다.

“신전에서 사라지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마실 나온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마실, 말입니까…….”

세상 어디에도 일 년짜리 마실은 없다. 누군가 나단을 깨운 거야.

‘누구지? 누가…….’

해리스는 조금 전,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신성력을 떠올렸다.

이곳에서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

하지만 한 명 있다.

누구보다 나단을 아끼고 사랑하는 자.

“……나단 님을 깨운 자, 리아 씨군요.”

의문이 아니었다. 확신에 가득 찬 말이었다.

‘이래서 눈치 빠른 것들이 싫다.’

나단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모른 척해줄 수는 없겠나.”

“그건 곤란합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종적을 감춘 나단과 나단을 깨운 계약자를 찾는 것.

해리스는 아주 작은 단서로 시작해 겨우 여기까지 왔다.

“나단 님의 행적을 찾은 이상 반드시 보고해야 합니다.”

“해리스.”

거대한 힘이 해리스의 어깨를 짓눌렀다.

“때가 되면 반드시 돌아갈 터이니 얌전히 기다려라.”

맹금류의 날카로운 눈이 저를 쏘아보자, 해리스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포식자에게 잡힌 쥐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에 해리스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네.”

해리스는 도무지 그 말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한편, 나단과 해리스의 대화에 병풍이 됐던 루도는 눈치를 보다 해리스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넌 왜 꿇느냐?”

나단의 물음에 루도가 눈을 반짝였다.

“분위기가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부엉이 님!”

“나단이다.”

“나단 님!”

“음, 괜찮은 녀석이군.”

“영광입니다! 나단 님!”

만담 같은 둘의 대화에 해리스가 이마를 짚었다.

* * *

리아가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리아를 품에 안은 딜리언은 다급히 그녀의 코 밑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부드러운 숨이 손끝을 간지럽혔다. 딜리언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터트렸다.

방을 가득 채운 나무와 꽃, 그리고 포근한 향기.

전부 신성력의 잔재였다.

정황상 리아의 기절은 한계까지 신성력을 썼기 때문인 듯했다.

피로 때문이라면 푹 쉬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신성력이 계속 새어나가고 있어.’

“나단부터 찾아야겠군.”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녀석은 나단뿐이었다.

딜리언은 힘없이 늘어진 리아를 조심스럽게 안아 몸을 일으켰다.

딜리언은 리아가 의식을 잃었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나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단을 찾아. 당장.”

너희라면 분명 알고 있겠지. 아까부터 내내 리아의 곁을 맴돌고 있었으니.

확신에 가득 찬 말투였다. 아니면 몰라도 알아내라는 협박성 짙은 말이거나.

리아에겐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강압적인 태도에 나비들이 눈치를 보며 움찔거렸다.

리아를 위해서라면 저 사내를 도와줘야 한다. 하지만 너무 건방지다.

양립하는 감정에 갈팡질팡하던 나비들은 곧이어 들려온 리아의 신음에 재빨리 딜리언의 등을 밀었다.

‘내가 찾는 것보다 이 녀석들을 믿고 따라가는 게 더 확실해.’

한참을 날아가던 나비가 한 곳에 멈춰 빙글빙글 돌았다.

“여기인가.”

정답이라며 위아래로 날갯짓하는 나비의 몸짓에 딜리언은 거침없이 문을 걷어찼다.

콰앙!

발길질에 부서진 문이 너덜거렸다.

그거, 열려 있는 문이었는데. 나비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침묵했다.

“아, 열려 있었군.”

태평한 목소리에 나비들은 저 인간을 리아의 곁에 둬도 되는지 진심으로 걱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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