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왜 그러십니까.”
딜리언의 의아한 물음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 눈앞에 나비가 춤을 추고 있어요.’
라고 말한들, 나비를 볼 수 없는 딜리언은 이해하지 못할 거다.
딜리언과 내 주변을 맴돌던 나비가 이내, 앞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이 마치 따라오라는 것처럼 보여 나는 재빨리 나비의 뒤를 쫓았다.
물론, 딜리언의 손을 꽈아악 붙잡은 채.
“아까랑 다르게 거침이 없네요. 아는 길입니까?”
“그건 아닌데, 왠지 이쪽일 것 같아요.”
직감. 그리고 확신이었다.
‘나단이 부르고 있어.’
나는 오직, 나비를 보며 직진했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는 내 직진 본능에 딜리언이 내 손을 당겼다.
“리아 씨. 저 방, 안 열어봐도 됩니까.”
“네. 저기에 없어요. 분명해요.”
느껴진다. 저긴 텅 빈 방이야.
“빨리 가요. 이쪽이에요.”
나비가 날갯짓에 박차를 가했다.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딜리언의 손을 놓고 달렸다.
“리아 씨!”
딜리언의 부름에 대답할 여유 따윈 없다.
스르륵, 나비가 문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손잡이를 비틀었다.
쾅! 거칠게 열린 문이 덜렁거렸다. 기대와 달리 문 너머엔 아무도 없었다.
“하아. 하아.”
왜, 없지? 분명 나비가 가리키는 곳은 여기였는데.
낡은 제단과 부서진 석상, 그리고 잔뜩 녹이 슨 촛대와 잔.
“기도실?”
익숙한 곳이었다. 수습 신관으로 지낼 때 질리도록 본 곳이니까.
그 순간, 팟! 플래시가 터진 듯 눈앞이 번쩍거렸다.
지저분하던 제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깨끗해진 제단과 신을 본뜬 석상, 그리고 촛대와 황금 잔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순백의 여인.
‘저를 사랑한다고 하셨잖아요. 누구보다 저를 아낀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그러신 거예요. 차라리 저도 데려가지 그러셨어요!’
‘한 번만,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제발…….’
분노, 원망, 절망. 그리고 짙은 슬픔.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나를 덮쳤다. 누가 쥐어뜯는 것처럼 가슴이 욱신거렸다.
‘뭐야, 왜 내가…….’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어깨에 올라온 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리아 씨. 갑자기 그렇게 달려가면 위험-.”
100미터 달리기를 한 것처럼 가슴이 들썩이고 호흡이 가빴다.
호흡이, 돌아오지 않았다.
“리아 씨. 나 봐요. 천천히 숨 쉬어요. 그렇지. 천천히.”
나는 딜리언을 따라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주한 딜리언의 두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했다.
천천히 나를 품에 안은 딜리언이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맞닿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온기, 다정한 손길.
욱신거리던 통증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호흡을 되찾은 나는 고개를 돌렸다.
다시 방을 보았지만, 그냥 낡아빠진 기도실이었다.
“이제 괜찮습니까?”
“네. 아깐 이상한 게 보여서…….”
“뭐가 보였는데요?”
“모르겠어요. 그게 도대체 뭔지…….”
처음 겪어본 현상에 머리가 혼란스러운 그때, 몸이 뒤로 끌려갔다.
“쉿.”
딜리언이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에게 이끌려 문 뒤에 숨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목표물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하필 이 성이냐. 더럽게 넓어서 우리도 찾기 힘들잖아.”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여긴 뭐냐.”
“기도실 같은데.”
고개를 내밀고 슥, 방을 살피던 그들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다시 재잘거렸다.
“그나저나 대장 옆에 있던 그 녀석들은 뭐야?”
“의뢰인이 보낸 놈이란다. 우릴 못 믿나 보지.”
“참 내, 그럴 거면 저들끼리 할 것이지. 귀찮은 일만 우리한테 떠넘겼네.”
불만을 토해내는 목소리가 다시 멀어졌다.
‘기다리세요.’
소곤소곤, 내게 속삭인 딜리언이 조용히 그들 뒤로 접근했다.
잠시 뒤, 퍽.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렸다.
“리아 씨, 오세요.”
딜리언의 부름에 밖으로 나가자, 배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두 사내가 보였다.
딜리언은 근처에 있던 녀석의 뒷머리를 짓누르며 물었다.
“그래서, 나단이 있는 곳이 어디라고?”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 해줄 말도 없다고! 크윽!”
저러다 목 부러지겠네. 힘줄이 잔뜩 선 손이 남자의 머리를 사납게 짓눌렀다.
“딜리언 씨.”
그를 향해 눈짓하자 딜리언이 남자의 머리채를 당겨 올렸다.
“이대로 입 다물고 있다가 죽겠다는 생각 안 들어?”
“큭.”
“흠, 말할 생각이 없구나. 그럼 이건 어때?”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손가락을 펼쳤다.
“의뢰인이 얼마나 제시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린 그 두 배를 주지.”
“그, 그런다고 우리가 넘어갈 줄 알아?”
“응. 분명.”
나는 활짝 미소 지었다.
아닌 척해도, 진실의 울대는 움찔거리며 연신 침을 삼켜댔으니까.
* * *
본성과 동쪽 탑을 이어주는 다리.
어느새 내리기 시작한 눈이 리아의 뺨을 적셨다.
이 다리만 건너면 나단을 만날 수 있어.
‘그 부엉이는 여기에 없어. 동쪽 탑에 갇혀 있거든.’
차게 식은 손끝을 꾹꾹 누르며 긴장을 완화시키던 그때, 커다란 손이 리아의 손등을 덮었다.
“해리스에게 연락을 넣어뒀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렇겠죠?”
“네. 그리고 나단이라면 분명 납치범들의 머리카락을 잡아 뜯으며 리아 씨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아니면 얼굴을 할퀴거나 뾰족한 부리로 그 녀석들을 쪼아대고 있거나.”
“……잘 아시네요?”
“제가 어디 한두 번 당해봅니까.”
딜리언이 입술을 비틀며 사납게 웃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제가 가장 많이 당해봤으니 압니다. 쉽게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어떻게 해도 딱딱하게 굳어있던 손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리아는 제 손을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며 제 손에 힘을 줬다.
“고마워요. 딜리언 씨가 없었다면 울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고마우면, 상이라도 주실래요?”
“제가 줄 수 있는 거라면요.”
“약속한 겁니다.”
딜리언은 단단하게 맞잡은 손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망울에 딜리언이 눈을 휘었다.
리아는 알까, 방금 제 발로 짐승의 입 안으로 들어온 것을.
‘나단, 네가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날도 있군.’
리아가 알면 기함할 생각을 자연스럽게 한 딜리언은 음흉한 속내를 감추며 그녀의 손에 입술을 묻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리아의 손이 움찔 떨렸다.
딜리언은 리아의 손등에 도장을 찍듯, 꾹 누르더니 눈만 들어 리아와 시선을 맞췄다.
“기대할게요. 부인.”
붉은 눈이 유혹적으로 휘어졌다.
그 순간, 리아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철회하기 전에 딜리언이 먼저 선수를 쳤으니.
“그럼, 리아 씨께 칭찬을 받을 일을 해야겠군요.”
콰앙!
목적지에 도착한 딜리언은 거침없이 문을 걷어찼다.
그러자 부식된 문이 우지끈, 부서졌다.
“나단……!”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분명 여기라고 했는데…….”
당황하는 리아의 뒤로 비열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그녀를 놀리듯 비아냥거렸다.
“설마, 그 자리에 계속 있었을 거라고 믿은 거야? 순진하네, 아가씨.”
“너!”
“그 녀석들이 안 돌아오길래 혹시 몰라 장소를 옮겼는데, 그러길 잘했군.”
얼굴에 저 흉터. 이상한 마도구를 이용해 나단을 납치해간 그 자식이었다.
“이 개자식! 나단은 어떻게 했어!”
얼굴을 보자마자 방언처럼 터져 나온 욕에 모지스가 눈가를 움찔거렸다.
“……그 부엉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주인을 닮았네.”
그가 질린 얼굴로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머리끝까지 열이 뻗친 리아가 달려들 것처럼 그를 향해 고함쳤다.
“닥쳐! 나단은 어디에 있어!”
“리아 씨, 저길 보세요.”
잔뜩 흥분한 리아의 허리를 잡아챈 딜리언이 모지스의 뒤를 향해 턱짓했다.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는 적의 모습에 리아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녀의 뒤는 차가운 벽.
보기 좋게 함정에 걸려든 것이었다.
“형씨, 힘 빼지 말고 무기를 버리는 게 어때?”
어디서 개가 짖나, 하는 표정으로 모지스를 무시한 딜리언이 검을 뽑았다.
“역시, 리아 씨의 상을 받으려면 고난은 필수인가 봅니다.”
“……얼마나 큰 상을 원하길래 이런 고난이 와요.”
“죽어도 좋을 만한 상이죠.”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청량한 미소에 리아는 순간, 현실을 잊고 말았다.
챙, 챙!
날카로운 파열음에 곧장 현실로 끌어 올려졌다.
리아는 치열한 공방에 입술을 잘근 씹었다.
딜리언은 그 어떤 침입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 리아의 앞을 막아섰다.
우직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하지만 제아무리 딜리언이라도 한정된 공간에서 동시에 쏟아지는 적의 공격을 막기란 무리였다.
“딜리언 씨!”
서서히 붉은색으로 물드는 하얀 셔츠에 리아가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신 차려. 뭐라도 하라고!’
입 안의 여린 살을 힘껏 물며 정신을 차린 리아는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 방에 있는 거라곤 바닥에 흩어진 종이와 책장, 나무 의자 따위뿐이었다.
이런 걸로 도대체 뭘 하라고!
스스로에게 화를 내던 그때, 원작의 한 구절이 머리를 강타했다.
[아이나는 제 안의 신성력을 끌어올려 나무를 조종했다. 그러자 단단한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나가 상대를 제압했다.]
순도 높은 신성력을 가진 자만이 쓸 수 있는 기술.
작중 유일하게 성녀인 아이나와 대신관만이 쓸 수 있던 기술이었다.
자신이 그 힘을 쓸 수 있을 확률은 반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넘치는 신성력이라면 비슷하게나마 흉내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안 되면 될 때까지 신성력을 퍼부어. 안 되도 되게 만들란 말이야!’
뭐라도, 아주 작은 힘이라도 딜리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리아는 저를 향해 달려드는 암살자를 피해 바닥을 굴렀다.
노리는 건, 책장!
그리고 홀린 듯,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를 따라 읊조렸다.
신성 증폭.
그 순간, 그녀의 안에서 폭발적인 힘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