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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27)화 (27/143)

27화.

성큼 리아의 앞으로 다가온 여인이 슬쩍 로브를 위로 올렸다.

그 사이로 드러난 녹색 눈동자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

“다친 곳은 없으세요?”

“아…….”

며칠 전, 딜리언을 찾으러 집까지 찾아온 그 여인이었다.

‘이쪽도 딜리언을 노리던 사람이었는데 왜 도와주는 거지?’

아니, 도와준 게 아니라 쟁탈전인 건가.

경계 가득한 리아의 눈빛에 마법사, 카나에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가씨,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카나에가 양손을 들어 올리며 공격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지만, 우선 이 일부터 해결하죠.”

카나에는 비틀거리는 괴한에게 다가가 어깨를 짓눌렀다.

“사주한 사람이 누구죠?”

“큭!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이런, 아직 달려들 힘이 남아 있나요?”

카나에의 신경이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사내에게만 쏠린 그 순간.

일은 뒤에서 벌어졌다.

“그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마법사 아가씨.”

흉터가 그어진 얼굴이 비열하게 일그러졌다.

“으아아악!”

클로드의 비명과 함께,

탕-!

작은 구슬이 총성과 비슷한 소리를 내며 빠른 속도로 리아를 향해 날아왔다.

날아간 구슬은 총 세 개.

캉, 캉!

재빨리 뒤를 돈 카나에가 두 개를 파괴했으나 미처 잡지 못한 구슬 하나가 존재했으니.

리아가 피하기엔 늦었다. 지척까지 다가온 구슬이 리아에게 닿기 직전, 나단이 힘껏 그녀를 밀쳤다.

“리아!”

전력을 다한 박치기에 리아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챙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강한 빛이 골목을 집어삼켰다.

“윽.”

번개가 치듯 눈앞이 번쩍거렸다.

뒤늦게 시야를 되찾은 리아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도망친 것 같네요.”

카나에의 말대로 그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리아는 클로드에게 달려갔다.

“클로드. 클로드! 정신 차려.”

“으으.”

다행이다. 꼴이 엉망이긴 하지만 단순한 기절이었다.

“……하아.”

긴장이 풀리자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나단, 이만 돌아가자.”

“아가씨…….”

“네?”

“그, 부엉이 말인데요…….”

카나에가 우물쭈물 말을 얼버무렸다.

‘설마, 아니야.’

리아는 황급히 나단을 찾아 주변을 둘러봤지만 지저분한 골목 어디에도 나단은 보이지 않았다.

“나단!”

미친 사람처럼 골목과 골목 끝을 뒤지던 리아는 이내 벽을 짚고 주르륵 무너져내렸다.

나단이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 * *

리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숨을 헐떡였다.

“나단……. 우리 어르신은 나 없으면 안 되는데……. 세상 물정이라곤 하나도 모르는 순진한 녀석인데…… 사탕 준다고 하면 아무나 넙죽 믿을지도 모르는데…….”

딜리언은 애처롭게 뚝뚝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나단,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옆에 있어 준다고 했으면서.”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흐르는 눈물방울이 커질수록 딜리언의 속이 타들어 갔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됐다.

리아에게 나단이 어떤 존재고, 어떤 의미인지.

‘마음에 안 드네.’

그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딜리언을 편안하게 해줬을 리아의 향기도 지금만큼은 달갑지 않았다.

이건 저를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짜증 나는군. 딜리언은 비틀린 마음을 꾹 누른 채 리아의 뺨을 감쌌다.

“그게 그렇게 슬퍼요?”

리아는 대답 없이 울기만 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대답은 충분했다.

제가 해야 할 일도.

딜리언은 리아의 턱을 잡은 채 가볍게 당겼다.

토끼처럼 놀란 눈을 보며 딜리언은 리아의 붉어진 눈가에 입을 맞췄다.

‘짜네.’

리아의 향기처럼 달콤할 줄 알았는데.

속으로 중얼거린 딜리언은 몇 번이고 리아의 눈가를 꾹 입술로 눌렀다.

간혹 들리는 쪽 소리가 간지러웠다.

딜리언은 입을 맞출 때마다 달라지는 온기에 웃음을 삼켰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리아가 딜리언의 손목을 붙잡았다.

“……무슨 짓을…….”

“리아 씨는 우는 얼굴도 예쁘지만, 다른 새끼 때문에 우는 건 보기 싫거든요.”

고여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딜리언은 한 방울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쫓아가 눈물을 훔쳤다.

“그러니까 지금 안 그치면 다음은 입술을 훔칠 겁니다.”

눈꼬리에서 뺨으로, 입술까지 빠르게 내려온 딜리언이 고개를 비틀었다.

퍼억-!

묵직한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리아가 주먹을 쥐고 그의 복부를 때렸다.

꽤 힘이 실린 주먹이었지만 딜리언에겐 솜방망이나 다를 게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다 당신 때문이잖아!”

“나오지. 당신이 정신을 놓고 있는데 나라도 차려야 하지 않겠어?”

둘 중 하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나단을 구하지 않겠냐는 숨겨진 뜻에 리아가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그리고 내 탓이라면, 확실히 책임질 테니까 이제 그만 울어요.”

반박할 말이 없었다. 멋대로 입을 맞춘 그에게 화를 낼 타이밍도 놓쳤다.

리아는 거칠어진 숨을 천천히 골랐다.

거칠게 눈을 비비는 리아의 손을 붙잡은 딜리언이 부탁조로 말했다.

“우선 진정해요. 이러다 당신이 먼저 쓰러질까 봐 걱정이니까.”

“……그래. 맞아. 내가 정신을 차려야지.”

“그래, 이래야 리아 델리스지.”

다행이라며 소리 내어 웃던 딜리언은 품에서 들리는 스산한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새끼들. 감히 내 가족을 건드려? 잡히기만 해봐. 삼대를 멸해버릴 테야.”

슬픔이 분노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녀의 곁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이 흉흉했다.

“네, 반드시 그럽시다. 제가 그렇게 만들어드리죠.”

나단은 마음에 안 들지만, 리아한테 점수를 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딜리언은 이제 퍽 익숙해진 손길로 리아의 어깨를 부드러이 쓰다듬었다.

별안간 작고 여린 손이 딜리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멱살을 있는 힘껏 움켜쥔 리아는 그대로 손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뿌리치려면 손쉽게 쳐낼 수 있는, 미약한 힘이었다.

하지만 딜리언은 그녀의 뜻대로 순순히 끌려왔다.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본 리아의 눈이 매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것도 색다르긴 하지만, 역시 기분은 별로네.’

리아의 새로운 면모를 보는 건 좋지만, 이 얼굴을 만들어 낸 자가 나단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딜리언.”

“네.”

“당신 입으로 말했지. 우린 부부라고. 나는 당신 아내고, 당신은 내 남편이라고. 맞지?”

“……그럼요. 부인.”

그 순간, 나단을 향한 질투는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딜리언이 짙게 미소 지으며 리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리아가 스스로 인정했다. 그 사실에 딜리언은 진한 만족감을 느꼈다.

하지만 리아는 그가 기쁨을 누릴 시간 따윈 주지 않았다.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거야.”

원하는 대답을 들은 리아는 미련 없이 딜리언의 손을 내쳤다.

그리고 둘의 애정행각에 남세스럽다며 눈을 가리고 있던 해리스를 가리켰다.

“그쪽은 내 아주버님이 되는 거지.”

“그, 그렇죠.”

리아의 기백에 짓눌린 해리스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히, 가족인 나단을 구하러 가주겠지?”

답은 정해져 있다.

닥치고 고개 끄덕여. 무언의 협박에 두 사람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럼, 나단을 찾을 방법이 없는 겁니까?”

“그분이 찾아주신다고 하셨어요.”

리아가 퉁퉁 부은 눈을 꾹 눌렀다.

“딜리언 씨 잘못도 아닌데 화내서 미안해요.”

“리아 씨, 이건 저 때문에 생긴 일이니 얼마든지 화내도 됩니다.”

“됐어요. 그럴 시간에 나단을 찾는 게 더 급해요.”

“그래서 리아 씨를 도와준 마법사는 어디에 있죠?”

해리스의 물음에 리아가 문밖을 향해 외쳤다.

“이만 나오세요.”

리아를 바라보던 두 쌍의 눈동자가 방향을 틀어 밖으로 향했다.

잠시 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저분이세요. 나단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고 하셨어요.”

뜨거운 시선에 카나에는 로브를 좀 더 깊숙이 뒤집어썼다.

“……실례합니다.”

카나에는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인 사람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문턱을 넘기 무섭게 딜리언과 시선이 마주쳤다.

단번에 카나에를 알아본 딜리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무서워…….’

아는 척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에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외롭고 쓸쓸한 싸움을 하는 그녀를 위해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있었으니.

“카나에?”

“해리스 님?”

딜리언의 심복인 카나에, 그리고 딜리언의 사촌인 해리스.

꽤나 가까운 사이인 두 사람은 단번에 서로를 알아봤다.

“저자가 리아 씨를 구해준 겁니까?”

끝까지 모른 척하는 딜리언과 달리 말이다.

“네. 저분이 아니었으면 나단과 함께 잡혀갔겠죠.”

다시금 물기가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딜리언이 리아의 눈가를 부드럽게 훔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나에는 속으로 새된 비명을 삼켰다.

‘저분이 전하라고? 말도 안 돼!’

처음 보는 딜리언의 모습에 공포에 휩싸인 카나에가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저분이 딜리언 씨를 오랫동안 찾아다니셨대요.”

“저를 말입니까.”

알면서 모르는 척, 시치미 떼는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카나에 씨 말씀으로는 딜리언 씨의 충직한 부하라고 하시네요.”

여기에 오기 전, 그녀가 가진 시나이즈 공작가의 문양을 확인했다.

그리고 해리스와 친분이 두터운 모습까지. 그의 부하가 확실했다.

리아가 소개하기 무섭게 딜리언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저를 노려보는 눈빛에 카나에가 눈물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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