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나는 왁자지껄한 식당에서 들려온 정보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아직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더군.”
“대신전에서도 조심스럽겠지. 그토록 기다리던 성녀인데 큰일이라도 나면 누가 책임을 지겠나.”
아이나가 나타났다는 건, 원작이 이미 시작됐다는 뜻.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야겠어.’
수다를 통해 정보를 모으던 그때,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성녀에 관심이 있으신가 봅니다.”
옆 테이블에 앉은 갈색 머리의 사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성녀가 나타났다는데 관심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긴, 그렇죠.”
너무 뻔한 질문이었다며 남자가 실없이 웃었다.
나는 사내의 옷차림을 훑었다.
국경 마을인 빌헬름은 외부인의 출입이 잦은 곳.
이방인을 만났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다만, 남자가 허리춤에 찬 검이 신경 쓰일 뿐.
그리고 굳은살 가득한 손, 절도 있는 움직임.
‘보통 사람이 아닌데…….’
딜리언 때문에 잔뜩 예민해져 있던 나는 반사적으로 이방인을 경계했다.
“아, 이상한 사람 아니니 너무 경계하지 말아주세요. 빌헬름은 초행이라 길을 물어보고 싶어 그렇습니다.”
품에서 지도를 꺼낸 남자가 식탁에 펼치며 물었다.
“빌헬름에 저주받은 땅이 있다 들었는데, 맞습니까?”
“검은 숲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검은 숲?”
처음 듣는 명칭이 낯선지 남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기예요.”
나는 지도 한 구석을 가리켰다.
검은 숲은 마을 사람들끼리 부르는 명칭이지 진짜 이름은 아니었다.
“티피의 숲이에요. 저주받았다고 불리는 땅은 이곳뿐이에요. 땅이 썩고, 마물이 나타나는 곳이거든요.”
“이곳이 맞는 것 같군요.”
“그런데 검은 숲은 왜 찾으세요?”
마을 사람들도 쉬쉬하는 곳인데 이방인이 이곳을 찾는다고?
“반드시 찾아야 할 게 있습니다.”
“중요한 건가 봐요.”
저런 진중한 눈빛을 할 정도면 엄청나게 소중한 것이겠지.
“네.”
뭘까, 그 중요한 게.
‘땅에 금은보화라도 묻어뒀나?’
그때, 나단의 날카로운 발톱이 내 어깨를 꽉 꼬집었다.
‘더는 가까이하지 말거라.’
나는 깜짝 놀랐다. 나단이 이토록 날카롭게 경고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딜리언을 피하라고 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감사합니다. 레이디.”
만족스러운 답을 얻었는지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보답으로 식사는 제가 대접하도록 하죠. 일행분이 돌아오시면 함께 음식을 고른 후 알려주세요.”
“네? 아니에요. 별것도 아닌데요.”
이방인의 과도한 친절이 부담스러울 때쯤, 시선 끝에 딜리언이 보였다.
딜리언이 반가운 날도 다 있네.
나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딜…….”
잠깐, 이 의문스러운 남자 앞에서 딜리언의 이름을 불러도 되나?
고민은 짧았다.
“……런!”
멋대로 그의 이름을 개명한 나는 뻔뻔하게 밀고 나가기로 했다.
“딜런 씨, 이리로 오세요.”
“딜런……?”
내 말을 따라 딜리언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남자가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이름 정도는 제대로 불러주세요. 리아 씨.”
하지만 곧이어 들어온 딜리언을 보고 입을 벌렸다.
주르륵, 입 안에 있던 물이 그대로 컵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예나, 선정이 딸이에요.’ 장면을 눈앞에서 볼 줄이야.
“대박.”
“신기한 재주를 가졌군.”
나단이 습관적으로 중얼거렸다.
다행히 남자는 듣지 못한 것인지 테이블을 치고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딜리언?!”
“뭐야?”
“이 싸가지 없는 말투! 싸늘한 목소리! 딜리언, 너 맞구나.”
내가 네 목소리도 못 알아들을 것 같냐며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커다란 목소리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딜리언이 눈을 왈칵 찌푸렸다.
그와 반대로 활짝 핀 사내의 얼굴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역시 살아있었어! 그럴 줄 알았다니까. 네가 쉽게 죽을 녀석이 아니지.”
“…….”
“왜 안 돌아왔어. 살아있었으면 재깍재깍 돌아왔어야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맡은 일은 무사히 끝냈고? 부하들은 다 어디로 가고. 설마, 너 빼고 다 죽은 거냐.”
“…….”
이게 무슨 상황이래.
나는 멍청하게 눈만 깜박였다.
어딘가 의뭉스럽던 이방인은 어디로 사라지고 극성 보호자만 남았나.
“아니다. 무사히 살았으니 됐다. 어디 다친 곳은 없고?”
남자가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쏟아낼 동안, 딜리언은 단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는 거겠지. 기억을 잃은 딜리언에게 눈앞의 사내는 남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나는 원맨쇼를 펼치는 사내를 바라보다, 딜리언과 눈이 마주쳤다.
낮게 가라앉은 눈이 짜증과 곤란함을 담고 있었다.
‘숨기고 싶나 보네.’
하긴, 적이 많은 딜리언에게 기억상실증이란 큰 약점이니까.
‘어쩔 수 없지. 상냥한 내가 대신 물어봐야겠네.’
“누구세요?”
이것저것 질문을 쏟아내던 남자가 나를 돌아봤다.
뒤늦게 내 존재를 떠올렸는지 그가 큼, 헛기침했다.
“해리스 트리시오라고 합니다. 딜리언, 이 녀석의 사촌 형입니다.”
“사촌이요?”
딜리언에게 사촌이 있었던가? 모르겠다.
‘진짜 사촌은 맞아?’
수그러들었던 의심이 다시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나는 슬쩍 딜리언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해리스가 쩍, 입을 벌렸다.
“확실해요? 증명할 수 있어요?”
“……그러는 레이디는 딜리언과 무슨 사이시죠?”
“딜리언 씨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두죠.”
“……라고 남들에게 소개하지만 내 아내야.”
“아니에요, 저 사람 지금 정신 이상하니까 들을 필요 없으세요.”
“부인, 이런 식으로 절 밀어내시는 겁니까. 저 상처 받았습니다.”
2차전이 시작되려는 그때, 해리스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어느 쪽인 건데……?”
“남남이에요!”
“부부.”
극과 극의 반응에 혼란스러워하는 해리스의 어깨를 딜리언이 붙잡았다.
꽈악. 손등에 핏줄이 솟을 만큼.
“두 번 말 안 한다. 내 아내야.”
해리스의 턱이 떨어질 것처럼 벌어졌다.
* * *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탄탄대로를 달리며 무난한 인생을 살아온 해리스는 26년 만에 인생 최대 고비를 맞이했다.
“정말,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죽은 줄 알았던 사촌의 행방을 찾은 동시에 결혼 소식을 들은 것도 황당한데 기억을 잃었다니.
“붕어도 너보단 기억력이 좋겠군.”
자꾸만 같은 말을 하는 해리스를 딜리언이 신랄하게 깠다.
해리스는 짜증이 가득한 딜리언의 얼굴을 보고 턱을 매만졌다.
“이것만 보면 그대로인 거 같은데.”
“입 좀 다물지. 시끄러워.”
“기억 잃은 거 맞냐? 싸가지 없는 말투도 그대로인데…….”
해리스가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딜리언의 관심은 오로지 리아에게 향해 있었다.
처음엔 저를 지켜주는 듯했으나, 해리스가 내민 펜던트를 보자 자리를 비킨 리아가 야속했다.
‘해리스 씨는 딜리언 씨의 가족이 맞아요.’
그러니 안심해도 좋다며 딜리언을 달랬다.
그리고,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그의 상태를 낱낱이 고했다.
가족만큼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며.
하지만 딜리언에겐 리아가 가족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나단까지.
해리스가 아무리 가족이라 주장해도, 딜리언에겐 남보다 멀었다.
그래서 순수하게 기뻐하는 해리스를 봐도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눈치챈 해리스가 물었다.
“그 여자랑 결혼했다고?”
“리아.”
“뭐?”
“그 여자 아니고, 리아라고.”
해리스가 헛웃음을 뱉었다. 어이가 없어서 그랬다.
세상에 자기밖에 모르는 사내가 남을 신경 쓰다니. 그것도 이름을 제대로 안 불렀다고 예민하게 굴 줄이야.
‘괜찮은 거 맞나.’
불안이 엄습했다.
“그래, 리아 씨. 그분은 아니라던데.”
“식을 안 올렸거든. 신고도 못 했고.”
“절대 그런 사이 아니니까 네 말을 믿지 말라던데.”
“그렇겠지. 나 혼자 좋아하는 거거든.”
“……뭐?”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해리스가 멍청하게 눈을 깜박였다.
“짝사랑이라고.”
짝사랑이라니! 천하의 딜리언이 짝사랑이라니!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는 이 사내가!
해리스가 비틀거렸다.
든든하고 단단한 성정 때문에 성기사들 사이에서 나무라 불리는 그이지만, 지금은 툭 치면 부러질 메마른 가지 같았다.
“……그러니까, 결혼한 것도 아니고, 부부도 아니라는 소리네. 리아 씨 말대로.”
“결혼식이야 올리면 그만이고, 혼인 신고서는 쓰면 그만이지.”
뭐가 대수냐며 딜리언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살다 보면 진짜 부부가 되지 않겠어?”
그러니까, 이 생활을 이어가겠다는 소리였다.
해리스가 다급히 딜리언의 팔을 붙잡았다.
“딜리언, 네가 국경까지 찾아온 건 용의 심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결혼이니 뭐니, 그런 걸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꽃을 찾았느냐, 아니냐는 중요치 않다.
찾았다면 당당하게 돌아가면 될 일이고, 실패했다 하더라도 황태자가 그를 책망하는 일은 없을 거다.
감히 누가 딜리언 시나이즈를 책망한단 말인가.
“나랑 돌아가자. 다들 널 기다리고 있어.”
“내가 왜.”
“너는 시나이즈의 가주잖아! 네 일생을 바쳐서 일궈낸 꿈!”
“지금 내 꿈은 리아 씨랑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건데.”
툭, 해리스의 손을 쳐낸 딜리언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아무런 방해 없이.”
그러니까 한마디로 꺼지라는 소리였다.
‘이 고집불통. 기억을 잃어도 이런 건 그대로냐고.’
어릴 때부터 그랬다. 딜리언은 한번 내린 결정은 절대 바꾸지 않았다.
어지간한 방법으론 딜리언을 데려갈 수 없다는 말이었다.
해리스는 답답함에 제 이마를 퍽퍽 쳤다.
“그 여자를 좋아하는 이유가 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푹 빠진 건데?”
이런 건 그답지 않았다. 제가 아는 딜리언은 가족도 미련 없이 잘라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나? 그냥 그 사람 자체가 좋은 건데.”
“그래도 뭔가 확 꽂힌 계기가 있을 거 아니야.”
해리스는 작은 꼬투리 하나라도 잡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딜리언은 작은 틈도 보이지 않았다.
“웃는 모습이 예쁘고, 착하고, 다정하고,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한 번씩 욱하는 것도 귀엽지. 가끔 내 눈치를 보는데 그게 또 다람쥐 같아서 귀엽다니까.”
쏟아지는 칭찬 릴레이에 해리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