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23)화 (23/143)

23화.

“미친.”

“욕도 예쁘게 한다니까.”

“취향 한번…….”

아까부터 욕 듣고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질색하는 내 눈빛에도 딜리언은 하하, 웃을 뿐이다.

“저였으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미친 새끼라고 욕했을 텐데. 상냥하기도 하시지.”

어이없는 눈으로 딜리언을 보던 나는 다치지 않은 발로 그의 옆구리를 꾹꾹 밀어냈다.

“저기요,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미친 새끼님, 저리 가주실래요?”

“이렇게 바로 응용하다니, 잔인하네요.”

나는 있는 힘껏 딜리언을 밀어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위야? 왜 안 움직여?’

꾹꾹, 몇 번 밀어냈을까. 가만히 당하고만 있던 딜리언이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우리 결혼식은 올렸습니까?”

“큰일 날 소리 하지 마세요! 안 했어요!”

“이런, 제가 무심했군요. 이른 시일 내로 합시다.”

“싫……앗!”

거부의 말을 꺼내려던 순간, 시야가 뒤집혔다. 딜리언이 내 발목을 당겼다. 그 힘에 주르륵 끌려간 나는 눈만 깜박거렸다. 푹신한 면에 머리가 닿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딜리언의 얼굴이 성큼 다가왔다.

“그 전에, 첫날밤부터 다시 할까요?”

설탕을 녹인 듯 달콤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당신 진짜 중간이 없어?”

“부부 사이에 중간이 왜 필요해요.”

사르르 접힌 눈꼬리가, 지독히도 유혹적이었다.

“앞만 보고 달리면 그만이지.”

앞만 보고 달리겠다. 그리 말한 딜리언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좁혀진, 한 뼘 남짓의 거리.

서로의 숨결이 얽힐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는 눈을 맞췄다.

찰나의 순간이 마치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지던 그때, 딜리언이 입을 열었다.

“지금 할 일은 하나뿐이겠죠?”

“뭐, 뭘요?”

꼴사납게 떨리는 내 목소리와 달리, 딜리언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여전히 듣기 좋았다.

“뭐긴요, 부부끼리 하는 일이지.”

딜리언이 엄지로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연애 고자인 나도 알아차릴 만큼 노골적인 신호였다.

나는 입술을 매만지는 뭉근한 손길과 시야를 가득 채운 붉은 입술에 허둥지둥했다.

밀어내야 하는데, 꺼지라고 걷어차야 하는데.

표백제를 들이부은 듯, 머리가 새하얗게 녹아버렸다.

버벅거리는 내 모습에 딜리언이 입꼬리를 당겼다.

시각적인 자극을 참지 못한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난 몰라!’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입술에 닿는 게 없었다.

뭐지? 의아함을 느끼던 그때,

“큭.”

낯익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번쩍 눈을 뜨자, 눈꼬리를 접어가며 웃고 있는 딜리언이 보였다.

숙였던 상체를 세우고,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고 있는 그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또 놀린 거야? 이 자식……!’

얼굴이 화끈거렸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아……. 큭.”

딜리언이 입을 가리며 끅끅거렸다.

“웃지 마요! 웃지 말라고!”

벌떡 상체를 일으킨 나는 쿠션으로 딜리언의 어깨를 마구 때렸다.

팡, 팡. 날리는 먼지에도 딜리언은 마냥 재밌는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하하.”

“악! 진짜 싫어!”

짜증을 내며 마구잡이로 쿠션을 휘두르던 그때,

턱, 손목이 붙잡혔다.

“난 좋은데.”

불시에 날아든, 그의 능글맞은 미소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쿠션을 집어 던진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방법까진 쓰기 싫었는데…….

“알았어요. 우리가 부부였다고 치고.”

애매한 긍정에 딜리언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이혼해요.”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

“자, 우린 오늘부로 남남이에요. 각자의 인생을 삽시다.”

졸지에 이혼녀 타이틀을 얻게 됐지만, 딜리언만 보낼 수 있다면 뭔들 못 할까.

“이유가 뭡니까. 신분 차이 때문이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요.”

그놈의 신분 차이! 도대체 어쩌다 그런 망상을 펼치게 된 거야?

“신분 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지도 않는데 같이 사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우리 둘은 사랑을 하지 않았어. 그 말에 딜리언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그가 미소를 지우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원작 속 ‘딜리언 시나이즈’의 얼굴이 이렇지 않을까.

“……설마 저 혼자만의 짝사랑이었습니까.”

내가 졌다. 껍데기만 무섭지 알맹이는 착각계 여주인공 뺨을 쳤다.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선택지는 없어요?”

힘없이 묻자 딜리언이 제 가슴에 손을 올렸다.

“내 심장이 이렇게 뛰는데 이게 사랑이 아닐 리가.”

“……환장하겠네.”

딜리언한테 사랑의 정의를 가르쳐 준 사람이 도대체 누구야!

나는 이마를 부여잡고 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속이 타서 죽을 것 같았다.

뜨거운 차든 뭐든 일단 때려 부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다급히 잔을 찾는 내 손을 막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딜리언이었다.

빠르게 뜨거운 잔을 가져간 딜리언이 다른 잔을 내밀었다.

“냉수는 여기.”

이 인간, 진짜 뭐냐…….

“뜨거운 차 들이켜면 속 다 망가집니다.”

“네, 그렇죠…….”

이제 대꾸하기도 지쳤다. 나는 두말없이 냉수를 들이켰다

“요즘 리아 씨 태도가 묘하다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군요.”

“……네. 저흰 결혼도 안 했고, 같이 지낸 지 한 달 조금 넘었다고요. 남이에요. 남.”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구구절절 설명했다.

가만히 듣던 딜리언이 이제야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당신을 사랑해서, 가문을 버리고 당신을 찾아 여기까지 온 거였군요. 식은 못 올렸어도 혼인 신고는 했겠죠?”

X발. 더는 못 하겠다. 무슨 말을 하든 저 좋을 대로 듣는 딜리언의 뇌내 필터링에 나는 눈을 감았다.

아아, 이 착각의 늪에 빠진 남자를 어떻게 하리오.

늪에 빠진 딜리언을 건져 올리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그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혼인 신고도 안 했어요…….”

“그럼 지금 당장 혼인 신고부터 하러 갑시다.”

안 되겠다. 이대로 뒀다간 또 무슨 소설을 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돌파 하는 수밖에.’

도박에 가까운 행위였지만, 딜리언의 오해와 착각이 더 무서웠다.

“사실대로 말할게요.”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진실을 밝혔다.

“당신이 기억을 잃은 건 나 때문이에요.”

“리아 씨 때문이라고요?”

“제가 당신 머리를 후려쳤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기억을 잃으신 거고요. 전부 제 책임이니, 딜리언 씨를 보살핀 거예요. 다른 사심은 전혀 없었어요.”

“……리아 씨가, 제 머리를 쳤단 말입니까? 그 죄책감 때문에 지금껏 나를 보살폈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젠장,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은데.’

나는 황급히 자기변호에 나섰다.

“네, 하지만 여기엔 다 사연이 있어요. 갑자기 폭주한 딜리언 씨가 절 덮치려 했거든요.”

왜, 어째서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차근차근 설명을 마친 나는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그의 답을 기다렸다.

나를 잡아먹으려 한 딜리언이 먼저 잘못했지만, 그의 뒤통수를 깨트린 것도 사실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거기다 딜리언 입장에선 농락당한 기분이지 않겠는가.

“그렇군요. 그러니까 이 감정은 전부 다 만들어진 가짜라는 거군요. 당신은 은인이 아니라 내 원수고.”

“원수까지는……. 그래도 제가 치료했,”

“-라고 말할 줄 알았습니까.”

미처 끝맺지 못한 말이 허공에 흩어졌다. 급격히 바뀐 분위기에 나는 눈을 키웠다.

“저는 이제 리아 씨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왜요? 어째서요!”

사람이 큰맘 먹고 말했더니 거짓말 취급이라니!

일자도 다물린 입매가 서서히 위로 향했다. 한쪽 끝만 비틀린 그 미소는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이번엔 꽤 그럴듯했습니다. 하지만 또 속아 넘어갈 정도로 반푼이는 아니라서요. 안타깝게 됐네요. 절 떼어낼 회심의 패였는데 보기 좋게 실패했군요.”

이 새끼가 진짜 뭐라는 거야…….

이 지경까지 오자 헛웃음이 나왔다.

“……당신, 의심증이라도 있어요?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못 믿어요!”

“글쎄, 기억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하하, 바람 빠진 소리를 내던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래요, 그놈의 기억. 그 기억이 문제죠.”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건 왜……?”

“다시 처맞으면 돌아오겠지.”

나는 프라이팬을 높이 쳐들었다. 그와 동시에 딜리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리아 씨. 무리하면 안 됩니다. 진정하세요.”

“괜찮아. 그때처럼 한 방에 보내줄 테니까.”

원샷원킬. 고통 없이 보내주마.

나는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프라이팬을 휘둘렀다.

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사나웠다.

“예쁜 뒤통수 이리 가져다 대세요.”

“리아 씨 말은 다 들어주고 싶지만.”

딜리언이 웃는 낯으로 내 손목을 쳤다. 순간 힘이 풀린 손에 떨어진 프라이팬이 추락했다.

그걸 가볍게 받아낸 딜리언은 프라이팬을 소파에 던지고 남은 손으로 내 허리를 감쌌다.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연계였다.

“기억은 잃었지만, 이거 하나는 확신합니다.”

허리를 감싼 단단한 팔이 나를 끌어당겼다.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딜리언의 품에 안긴 나는 귓바퀴를 간지럽히는 목소리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내가 있을 곳은 당신 옆이라는 걸.”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에 눈앞이 어지러이 흐려졌다.

“설령, 외사랑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미, 미친.”

“욕도 귀엽게 하네요.”

딜리언이 가느스름하게 눈매를 휘었다.

홀린 듯 그를 바라보던 그때, 문이 쾅 열렸다.

“너, 딜리언 네 이놈! 이 무슨 파렴치한 짓이냐!”

뒤늦게 등장한 나단이 고성을 질렀다.

나는 이때다 싶어 후다닥, 딜리언의 품에서 벗어났다.

딜리언은 아쉬운지 주먹을 쥐었다 펴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붉어진 얼굴을 애써 숨기며.

쾅!

닫힌 문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진 나는 귀를 벅벅 문질렀다.

뜨겁고,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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