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21)화 (21/143)

21화.

눈앞에 펼쳐진 애정행각에 굳은 건 나단과 메이도 마찬가지였다.

“부인은 쉬고 있으세요.”

싱긋, 달콤한 미소를 지은 딜리언이 주방으로 향했다.

“어머, 어머!”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메이였다. 매서운 손길이 내 등을 마구 때렸다.

“아, 아파!”

“너, 너어! 나 없는 사이 저런 잘난 남자를! 제엔자앙, 부러워!”

“저, 저! 여우 같은! 아이고, 두야.”

나단이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다.

“윽, 그런 사이 아니야! 네가 착각하는 거라고!”

“착각은 무슨! 너 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그건……!”

나도 궁금하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건지.

“기억을 잃은 게 흠이긴 하지만 아주 괜찮은 남자야. 리아, 절대 놓치지 마.”

딜리언이 기억을 잃은 탓에 이상한 착각을 하고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메이는 계속 남편 타령을 했다.

“그런 거 아니야.”

‘아무리 오해라지만, 정도가 심한 거 아닌가.’

한껏 높아진 공략 난도에 착잡해진 것도 잠시. 나는 메이를 향해 자세를 한껏 낮췄다.

“메이. 부탁이 있어.”

“뭔데?”

덩달아 자세를 낮춘 메이가 물었다.

나는 힐끔, 딜리언을 살피다 메이에게 비밀을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딜리언을 수도에 있는 시나이즈 공작저로 보내줘. 너라면 할 수 있지?”

“뭐? 네 남편을?”

“남편 아니라고 했다.”

이를 악물고 노려보자 메이가 합, 입을 다물었다.

“……정말 보내? 싸우기라도 한 거야?”

“그런 거 아니고,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주려는 거야.”

“뭐야, 공작가 사람이었어?”

메이는 딜리언의 얼굴을 모르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딜리언은 대외 활동을 즐기지 않아 연회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어쩌다 그 미친놈 쪽이랑 엮인 거야?”

얼굴은 몰라도 소문은 얼추 아는지 메이가 딜리언의 흉을 봤다.

“큼, 하여튼 보내 줄 거지?”

딜리언이 기억을 잃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딜리언을 알아볼 거다.

그 뒤는 알아서 하겠지.

“부탁할게.”

내 눈빛에서 진심을 읽은 메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부탁인데. 들어줘야지.”

때마침 딜리언이 다가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차를 건네는 딜리언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딜리언 씨, 드릴 말씀이 있어요.”

“또 그 이야기입니까.”

딜리언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저는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만약 돌아간다면 리아 씨도 함께 가야 합니다. 저흰 부부니까요.”

무슨 소리야, 같이 갔다가 죽을 일 있나! 나는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딜리언 씨, 우리는 남이에요. 함께 가문으로 돌아갈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요.”

“그럼 이 대화는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딜리언이 전처럼 내빼려 했다.

‘또 놓칠 줄 알고?’

나는 도망가려는 딜리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만 도망쳐요!”

애도 아니고 도망치면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딜리언 씨는 꼭 돌아가야 한단 말이에요! 그 녀석들이 또 찾아오면 어떡하려고요!”

나는 딜리언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한 채 외쳤다.

“메이! 시작해!”

내 외침에 메이가 재빨리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꾸 피한다면 강제로라도 보내는 수밖에.’

이런 내 의지를 읽은 딜리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날 강제로 보내려고?”

“그렇다면요?”

“정말 이렇게 나올 거야?”

“말했잖아요. 딜리언 씨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니까.”

“어디에 있을지 정하는 건 나야.”

“지금 기억이 없으니 그렇게 말하는 거지. 기억이 돌아오면 내게 고마워할걸?”

그리고 왜 다짜고짜 반말이야. 나는 반말 못 할 줄 알아?

딜리언의 붉은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내 눈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다.

나를 뿌리치려는 딜리언과 그럴수록 올가미처럼 그에게 엉겨 붙는 나.

뿌리치려면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딜리언은 끝내 나를 뿌리치지 못했다.

나를 제 부인이라 착각한 탓이겠지.

‘흥, 바보 같긴.’

그리고 그때 들려온 메이의 외침.

“다 됐다.”

나는 아래서 반짝이는 마법진을 향해 딜리언을 힘껏 밀쳤다.

“누가, 혼자 갈 줄 알고?”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휘감아 당겼다. 그 힘을 못 이기고 끌려갔다.

숨결이 얽힐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헉.”

그의 눈이 번들거렸다.

‘잠깐, 얘 눈 풀렸는데……?’

딜리언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왜 이러냐고! 당신은 집에 가고! 나는 내 집에 남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지금 별거를 하겠다고? 내가 용납할 것 같아?”

“악, 진짜 미쳤나 봐!”

저승사자도 너처럼 끈질기진 않겠다!

나는 딜리언의 발을 힘껏 밟았다.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이 먹혀들었는지 그의 입에서 희미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윽.”

그 순간, 무형의 힘이 나를 뒤로 잡아당겼다.

“매달리는 남자는 매력 없어요.”

“마법사는 성가신 존재군.”

메이의 마법이 딜리언과 나를 갈라놓은 것이었다.

마법진 밖으로 나온 그 순간, 새하얀 빛이 딜리언을 감쌌다.

마법이 발동된 것이다.

간신히 그에게서 벗어난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딜리언에게서 해방됐다.

드디어 자유…… 응?

“리아 씨, 저 발 아픕니다.”

딜리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척이나, 사나운 얼굴로.

“……뭐야. 왜 이러지?”

귓가에 당황한 메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술식을 제대로 넣었는데.”

마법의 문제는 아니다. 그럼 뭐지?

별안간, 나단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리아, 너, 속박에 걸린 것이냐?”

“속박? 그게 뭔데?”

뭔진 몰라도 단어가 주는 불길함에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나를 요리조리 살피던 나단이 이번엔 딜리언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이럴 수가.”

어리둥절하기는 딜리언도 마찬가지였다.

“속박? 그게 무슨 소리야?”

메이가 어서 말하라며 나단을 닦달했다.

“둘 사이가 연결되어 있어. 도대체 무슨 속박에 걸린 거지?”

딜리언에게서 나를 떼어낼 때는 언제고. 나를 다시 그의 옆에 붙인 나단이 우리를 유심히 살폈다.

“리아, 혹시 약속 같은 거 한 적 없느냐. 아니면 뭔가 대가를 지불한다는 말이나.”

“약속은 무슨, 그런 게 있을 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나는 멈칫했다.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그럼, 제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옆에 있어 주세요.’

‘딜리언 씨가 이겼어요. 옆에 있어 줄게요.’

‘그럼, 약속해주세요.’

‘그래요. 해요.’

그 후 나는 딜리언과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런데 그게 속박이 됐다고?

그러고 보니, 간절한 염원이 담긴 말은 때론, 상상 이상의 힘을 갖기도 한다고 했다.

특히 저주와 같은 어두운 힘에 깊게 연관된 사람의 말은 더욱.

‘그 정도로 간절했단 말이야?’

충격으로 굳어있는 내 어깨를 나단이 흔들었다.

“리아. 했구나.”

“아니야. 이건 그냥…….”

“뭐라고 약속했어?”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곁에 있어 주겠다고…….”

부서질 것처럼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거짓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초점 없는 눈은 이내 딜리언에게 닿았다. 줄곧 나를 보고 있었는지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저를 배신한 나를 사납게 노려보던 시선은 온데간데없다.

그의 눈에 떠오른 건, 사랑스럽다는 감정뿐.

그 달콤한 시선에 기겁한 나는 메이에게 매달렸다.

“메이, 이거 풀 수 있지? 응? 그렇다고 해줘.”

제발……. 간절한 내 목소리에 메이가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리아, 속박은 마법사의 영역이 아니야.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당사자들끼리 해결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불가능하단 소리.

딜리언의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그는 나를 떠날 수 없고, 나는 딜리언을 떠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딜리언 씨 말처럼 운명이라고 생각해. 건국왕 리산드로랑 그의 연인 이야기 너도 알지? 눈 오는 설산에서 만난 두 사람. 눈꽃처럼 피어난 사랑. 말하고 보니까 진짜 비슷하네.”

“미쳤어?!”

어디서 세기의 사랑이랑 우리 상황을 비교하는 거야?

그리고 그런 헛소리를 하면 딜리언이 더 착각한다고.

“역시, 저흰 운명이었군요.”

딜리언이 부드럽게 내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밖에 쌓인 눈을 단번에 녹여버릴, 한여름의 태양 같은 미소였다.

“이제 보니까 그냥 천생연분이네, 천생연분이야.”

징그러운 커플을 바라보듯 눈을 찌푸린 메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휴, 싸웠으면 진작 말을 하지. 사랑싸움 한번 무섭게 한다.”

“메이?”

“나단은 내가 데려갈게. 좋은 시간 보내.”

“뭐?! 이거 놓거라, 메이! 읍! 으읍!”

나단의 입을 틀어막은 메이가 눈을 찡긋거렸다.

‘리아? 언니만 믿어라!’

믿긴 뭘 믿어! 이 화상아!

“너 이리 안 와?!”

쾅!

문이 닫혔다. 동시에 내 인생도 닫혔다.

“메이 씨,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꽤 괜찮은 사람이네요.”

“……하.”

“부인, 그럼 지금부터 화해의 시간을 가져볼까요? 가여운 제 발이 울고 있거든요.”

“아, 하하. 그게 말이죠…….”

나는 슬금슬금 걸음을 물렸다. 물러난 만큼 딜리언이 다가왔다.

‘메이! 나만 두고 가면 어떡해!’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울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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