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그러거나 말거나, 딜리언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 때문이란 말이지?”
“그래. 전부 네놈 때문이다!”
일 년 내내 평화롭던 리아의 일상이 부서진 것도, 위치가 발각된 것도, 끝도 없이 신성력을 쥐어 짜내는 것도. 전부!
비난의 의미였으나 자체 필터링을 걸어버린 딜리언에겐 ‘널 지키려고 그랬다.’로 변환되어 들렸다.
딜리언이 황급히 제 입을 가렸다. 커다란 손에 가려진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하마터면 꼴사나운 모습을 나단에게 보일 뻔했다.
“너 진짜 어디 아픈 거냐?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질색을 넘어 진심으로 딜리언이 걱정되기 시작한 나단이 날개를 뻗어 딜리언의 이마에 올렸다.
“열은 없는데…….”
이상하게 손끝이 간질거렸다. 당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켜.”
나단을 밀쳐낸 딜리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니 이놈이 걱정을 해줘도?”
“리아 씨께 최고의 아침을 만들어서 대접하겠어.”
“호오, 그런 이유라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어가야지. 좋은 포부다! 가라, 딜리언!”
혼자 이상한 착각을 한 딜리언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리아가 집에 들어선 순간, 후광이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뭐예요? 그 눈?”
리아가 본 것은 멜로 눈깔이 맞았다. 딜리언이 저도 모르게 달콤한 눈으로 리아를 바라본 것이었다.
딜리언도 몰랐다. 리아도 몰랐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결계석도 설치했으니 이제 괜찮을 거예요.”
“그래도 아주 안전한 것은 아니죠?”
“뭐, 그렇죠.”
“빨리 방법을 강구해야겠군요.”
“맞아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해요.”
의견이 일치한 둘은 마주 보며 웃었다.
‘하루라도 빨리 리아 씨와 떠나야겠군.’
‘메이가 돌아오면 딜리언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떠나야겠어.’
그들은 같은 집, 같은 식탁에서 같은 요리를 먹으며 동상이몽에 빠졌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딜리언과 함께한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기껏해야 보름 정도 함께 지내겠거니 했더니, 한 달이라니!
“하아…….”
땅이 꺼질 듯, 무거운 한숨에 딜리언이 다가왔다.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네. 빨리 와야 할 텐데…….”
“괜찮을 겁니다.”
“당연하죠. 메이는 강해서 괜찮아요. 제가 걱정하는 건 그쪽이 아니에요.”
“그럼?”
턱을 괸 채 창밖을 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딜리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딜리언 씨죠.”
“저요?”
생각도 못 한 답인지 딜리언이 눈을 깜박였다.
“절 걱정하셨습니까?”
“당연하죠. 제가 딜리언 씨 아니면 누굴 걱정해요?”
잘 먹고 잘 자는 나단을 걱정하리? 당연히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걱정하지.
“기분 좋은 말이네요.”
딜리언의 얼굴이 만개한 꽃처럼 피어났다. 그에게만 조명을 비춘 듯 빛이 나는 얼굴에 눈을 게슴츠레 떴다.
‘시한폭탄 취급이 좋은 건가? 하여튼 취향 한번 고상하다니까.’
“계속 제 걱정 해주세요.”
“그렇게 말 안 하셔도 매일매일 하고 있어요.”
봄처럼 따뜻한 기운이 맴돌던 눈동자는 곧이어 나온 말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얼른 집에 돌아가셔야 하는데 발이 묶였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가족이 보고 싶으시죠?”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눈을 도르르 굴린 나는 딜리언의 손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역시, 집 얘기는 꺼내지 말 걸 그랬나.
나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메이가 돌아오면 최대한 빨리 딜리언 씨를 집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할게요.”
“…….”
“솔직히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어요. 최대한 빨리 보내드리고 싶었는데…… 미안해요.”
“하. 그걸 지금 말이라고.”
기가 차는지 딜리언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못 믿는 건가? 하지만 메이라면 할 수 있는데.
“불안한 거 이해해요. 하지만 메이라면 분명 안전하게……?”
턱, 딜리언이 내 입을 막았다.
“그만, 그만 말해요.”
뭐가 그리 답답한지 딜리언이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저를 이 집에서 내보내려는 이유가 뭡니까.”
“이유요? 당연히 딜리언 씨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그리고 위치가 발각된 이상 언제까지고 여기에 머물 수는 없잖아요.”
“그럼 같이 다른 곳으로 떠나면 되는 일 아닙니까.”
“네? 저도요?”
뭔 소리래. 나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농담도. 집이 여긴데 어디를 가요.”
“그럼 제가 있을 곳도 여깁니다.”
어색하게 웃던 나는 딜리언의 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저 눈은 진심이었다. 정말로 여기에 남아 있을 생각인 거였다.
‘미친 거 아니야?’
나는 벌떡 일어나 딜리언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왜요? 이제 곧 딜리언 씨가 그렇게 궁금해하던 것을 전부 알 수 있다고요! 가족도! 친구도! 본인이 누구였는지까지. 전부!”
“이제 안 궁금합니다.”
안 궁금하다니? 그게 궁금해서 나를 마구 들쑤셨으면서!
“그 얘긴 그만하죠.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딜리언은 붙잡을 틈도 없이 모습을 감췄다.
“왜 저래……?”
“뭐긴 뭐야. 개수작이지.”
나단이 꼴값을 떤다며 흥흥, 콧방귀를 뀌었다.
* * *
“딜리언 씨. 저희 얘기 좀 해요.”
“지금 좀 바빠서. 저녁에 하죠.”
“딜리언 씨.”
“마당에 쌓인 눈 좀 치우고 오겠습니다.”
“딜…….”
“바쁩니다.”
뭐가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딜리언은 대화할 틈을 주지 않았다.
번번이 사라지다 보니 말 한번 걸기조차 힘들었고, 겨우 말을 걸어도 미꾸라지처럼 피해갔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그럴 때마다 나단이 방방 뛰며 딜리언의 흉을 봤다. 나도 동의하는 바다.
저건 분명 집에서 나가지 않으려는 개수작이었다.
‘말이 안 돼. 시골구석이 뭐가 좋다고 여기에 남아 있으려는 거야.’
기억이 없어서, 마음이 너무 불안하면 이해하겠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딜리언은 멀쩡했다.
역시, 심도 깊은 대화가 필요했다.
‘이번에도 피하기만 해봐.’
딜리언이 있는 소파로 성큼 다가간 나는 비장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딜리언 씨. 이런 식으로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그렇죠.”
드디어 말이 통하는구나!
“해가 떨어지기 전에 장작을 패야겠습니다.”
“네? 아니에요. 그건 제가 하면 되는데…….”
금방이라도 떠날 것처럼 움직이는 딜리언을 따라,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잠깐……!”
어? 하는 사이에 몸이 뒤로 넘어갔다. 뭔가 했더니 개다 만 빨래를 밟고 뒤로 나자빠진 거였다.
모든 게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놀란 딜리언의 얼굴과 날 향해 뻗어지는 그의 손, 뒤늦게 방에서 날아오는 나단.
나는 곧 찾아올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쿵. 큰 소리와 함께 몸이 바닥과 부딪혔지만 기다리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눈을 뜨니 코앞에 딜리언이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얽힐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정말이지.”
한숨처럼 내뱉은 딜리언이 툭, 내 이마에 이마를 부딪쳤다.
구겨진 붉은 눈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당신 말이야. 너무 부주의해. 조금 조심하는 게 좋겠어.”
가끔 나오는 반말이 나를 가볍게 타박했다.
“무슨 사고를 칠까 봐 눈을 뗄 수가 없잖아.”
마지막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머리를 감싼 손을 당겨 천천히 나를 일으켜 세운 딜리언이 내 몸을 살폈다.
“아픈 곳은?”
“없어요…….”
그러자 딜리언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게 꼭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것처럼 느껴지면, 내 눈이 미친 걸까?
얼떨떨하게 딜리언을 바라보던 나는 무심코 그의 손등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의 손등이 붉고 또 붉은, 아픈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딜리언 씨, 손이!”
“아,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정작 딜리언은 제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무렇지 않기는요! 벌써 붓기 시작하잖아요!”
입에서 절로 타박의 말이 나왔다.
내 변화에는 무섭게 반응하면서 제 몸은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그의 모습에 순간 화가 솟구쳤다.
“화났습니까.”
“네, 화났어요.”
애꿎은 입술을 잘근 씹자, 딜리언이 엄지로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왜요?”
그가 천천히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리아 씨가 왜 화가 납니까.”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집요했다.
“……나도 몰라요.”
“몰라요?”
“몰라요!”
짜증 나. 홱 고개를 돌리자 딜리언이 서서히 내 곁에서 물러났다.
“리아 씨는 솔직하지 못하네요.”
“무슨…….”
이대로 그가 또 도망칠까 봐 걱정이 된 나는 재빨리 손을 뻗었다.
욱신, 발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삐었나?’
나는 찌르르한 통증을 무시한 채, 딜리언의 팔을 잡아당겼다.
“또 도망가려고요?”
“그게 아닙니다.”
허리를 굽힌 그가 내가 밟고 넘어진 옷가지를 들어 올렸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이 옷은 대체 누구 겁니까.”
그 옷은, 지난 한 달간 딜리언이 입었던 옷들이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서 자꾸만 남자 옷이 나오자 딜리언이 의심을 품었다.
“제가 아는 그게 맞습니까.”
딜리언이 아는……? 그게 뭔진 몰라도 저 옷은, 나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나는 꽤나 곱상하게 생겼고, 재산도 있고, 능력도 좋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하이스펙을 갖고 있다 보니 음흉한 마음을 품고 접근하는 새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저 옷은,
“같이 사는 사람 옷이에요.”
가짜 연인 혹은 배우자를 만들어낸, 일종의 보호막이었다.
‘전부 메이 덕분이지.’
메이는 이 험난한 세상에 이런 연막이라도 있어야 한다며 어디선가 구해온 남자 옷을 내게 떠넘겼다.
‘이걸로 다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없는 것보단 나아.’
‘네 옷 빨면서 같이 널어놔. 누가 집적거리면 남편 있다고 하고.’
‘그러다가 나중에 괜찮은 놈 있으면 목덜미 콱 물어서 네 남편으로 만들어. 알겠어? 그래야 위험한 놈들을 피하지.’
메이, 그런 남자가 언제쯤 나타날까. 있긴 있을까?
나는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는 딜리언과 시선을 맞췄다.
역시, 이 사람이 제일 위험했다.
“같이라…….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습니까?”
“네, 여보, 자기 옷이죠.”
낯간지러운 호칭에 딜리언이 멈칫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여보, 자기?”